[Rank by Me]
[Rank By Me] 포화 속에 감동 있다! 최고의 전쟁영화, 최고의 전투신을 찾아라
2007-02-27
글 : 신민경 (자유기고가)

전쟁이 잔혹한 지옥이란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표현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훌륭한 전투신 하나로 위대한 전쟁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최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두 가지 시선에서 살펴본 위대한 전쟁영화 두편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완성했다. 전쟁을 윤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그의 성찰은, 생생한 이오지마섬 전투, 그 중에서도 미군들이 스리바치산에 깃발을 꼽는 문제의 장면에서 비롯된다. 최고의 전쟁영화를 낳은 최고의 전투신! 우리에게 아직까지 깊은 후유증을 남긴 명장면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물어봤다. 그 중 엄선한 5편, 다섯 장면을 소개한다.

5위 <플래툰> 죽음의 계곡 전투
크리스(찰리 신)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유는? 일상이 권태로워서, 영웅이 되고 싶어서란다. 이 청년, 배가 불러도 한참 불렀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영웅이 어디 있던가. 죽는 자와 죽이는 자가 있을 뿐. 불안과 공포로 다들 미쳐가던 어느 날, 크리스가 속한 제25보병대는 죽음의 계곡에서 적들의 총알세례를 받는다. 간신히 헬리콥터로 탈출했나 싶었는데, 저 아래 엘리어스 중사(윌렘 데포)가 홀로 남아 적들에게 쫓기고 있다. 포탄이 펑펑 터지고 아비규환에 휩싸이는 순간, 그 유명한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흐른다. 이미 한 차례 아군 밥(톰 베린저)의 총에 맞은 엘리어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맞으며 두팔을 하늘 높이 치켜든다. 살려달라는 뜻일까, 아니면 생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의 뜻일까? 그리고 그를 죽인 건 아군일까, 적군일까? 묘하게 일그러지던 그의 마지막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4위 <진주만> 진주만 대규모 공습
독자에게 4위로 간택되긴 했으나, 후보에 오른 다른 전쟁영화들에 비하면 <진주만>의 작품성은 한참 뒤쳐지는 편. 수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 영화가 품은 메시지는 ‘미국 만세!’ ‘일본 놈, 나쁜 놈’식의 느끼한 애국주의로, 거의 유치원생 수준이라 할 수 있다. 3시간여의 긴 러닝타임에서 그나마 건질 만한 장면은 진주만 공습신. 그러나 제작비와 홍보비가 실제 진주만 공습으로 말미암은 피해액과 맞먹는다 하니, 그 정도는 해주시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1941년 12월8일, 평화롭던 하와이섬 진주만은 일본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는다. “일요일 아침에 왜 공습 연습을 하지?” 늦잠을 자던 병사, 이렇게 중얼거리나 하늘을 수놓은 전투기들은 온통 일장기 일색이다. 어떻게 손써볼 겨를도 없이, 군함들은 두 동강이 나고 섬은 폭격을 맞아 쑥대밭이 된다. 물에 빠져 죽고, 총에 맞아 죽고, 불에 타 죽고… 3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이 공습은 곧 태평양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3위 <지옥의 묵시록> 무차별 공중폭격
이런 낭만적인 군인들을 봤나. 공습을 위해 백뮤직까지 깔아놓는 주도면밀함이라니! 베트남전쟁이 절정에 다다른 무렵, 미군 헬리콥터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을 틀어놓는다. 우아한 아리아는 미군에게는 응원가가 될지 몰라도, 적들에게는 지옥에서 건너온 장송곡으로 들릴 터. 미군들은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각오로 총탄을 갈기며, 무기창고와 다리, 심지어 민간인 지역과 나무까지도 다 쓸어버린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검은 연기 속에서 묵사발로 변해가는 적진. 그 광경은 리얼함을 넘어서서 무슨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네이팜탄의 냄새를 맡아봤나? 아침에 냄새를 맡으면 더 좋아. 그 냄새는… 승리의 냄새지.” 코앞에서 폭탄이 터져도 끄떡 않던 지휘관은 갑자기 서핑을 하겠다며 웃통을 벗어젖힌다. “서핑 아니면 전투다!” 아리아와 폭격과 서핑, 그리고 죽어라 절규하는 적들. 아이러니로 얼룩진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지옥으로 가는 오디세이의 시작일 뿐이다.

2위 <태극기 휘날리며> 두밀령 깃발부대 전투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진태(장동건)와 진석(원빈)은 아이스케키 한쪽도 나눠먹을 정도로 우애가 깊은 형제였다. 그러나 전쟁의 광기는 두 형제의 골을 깊게 만들었고, 급기야 애국군인 진태를 인민의 영웅으로 변질시켰다. 제대를 한주 남겨놓은 진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형을 찾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든다. 그 무렵 국군의 공습이 시작되는데, 이 무모한 청년에게는 아군과 적군을 분간할 여유가 없다. 오직 형을 데리고 나가겠다는 생각뿐. 그러나 붉은 깃발부대와 함께 나타난 진태는 어느새 덥수룩한 수염에 흉터투성이 야인으로 변해 있었으니! 게다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깃발로 적의 심장을 내리꽂는 품새가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 흰자위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형과 울먹이며 지난 추억을 상기시키는 동생. 이 두밀령 전투신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하이라이트이자, 전쟁의 비극을 사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명장면이다.

1위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오하마 해변 전투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능가하는 전쟁영화는 많지만, 이 영화의 초반 전투신을 능가하는 장면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감정이 개입될 틈도 없이 정신없이 몰아치는 오하마 상륙 전투신은 “과연 스필버그!”란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 1944년 6월6일, 오하마 해변으로 향하는 배 위에는 공포에 질린 표정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곧 있을 잔혹한 전투를 상상이나 했을까? 곧이어 적진으로 뛰어들자마자 쏟아지는 총알세례. 독일군들은 명사수들로만 구성돼 있는지, 그들의 총알은 정확히 미군들의 심장에 족족 박힌다. 집요하게 퍼붓는 총알은 물속으로 숨은 병사마저 따라잡고, 어느새 바닷물은 걸쭉한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떨어져나간 팔을 찾는 병사, 내장이 흘러내린 채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 상반신만 남은 전우의 시체를 끌고 가는 병사… 죽을 확률 90%인 이 해변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적진으로 향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미션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이 장면만으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최고의 전쟁영화로 꼽힐 자격이 충분히 있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