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가 만난 사람]
끈질긴 이야기꾼의 도돌이표, 영화감독 이창동
2007-03-19
글 : 김혜리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이창동 감독이 ‘이문화’라고 불린 공직자 생활을 마친 지 3년이 돼간다. 그동안 우연히 동석할 기회가 두어 차례 있었다. 그의 영화사가 자리한 성북동 호프집과 식당 주인들은 익숙한 손길로 찌개니 마른 멸치를 내왔다. <밀양>이라는 새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얼굴에 물음표라도 스칠라치면 이창동 감독은, “실사가 될지 애니메이션이 될지도 알 수 없다”는 농담으로 부드럽게 밀쳐냈다. 형광등 아래 그의 눈빛이 가뭄과 싸우는 농부처럼 팍팍해서, 나는 취하지도 못한 채 조마조마했다. 전도연과 송강호를 주연으로 맞이한 <밀양>은 지난해 9월 촬영을 시작했고 해가 바뀌었다. 비단 새 영화만 캐묻고자 청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본편의 편집이 끝난 이튿날 약속이 잡혔다. 반년 만에 만난 이창동 감독은 먼 바다에서 돌아온 뱃사람의 표정이었다. 곤하지만 평온했고 특유의 짓궂은 눈웃음이 자주 떠올랐다.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를 ‘사기’라고 표현하곤 한다. 이는 소통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소통에 대한 절대적 기대치가 높아서라고 보는 편이 옳다. 그는 대충 말을 섞고 적당한 호의를 확인하는 일을 소통이라고 인정하기 꺼린다. 자연히 그와의 인터뷰에서는 어떤 질문도 의례적 끄덕임과 함께 어물쩍 문턱을 넘지 못한다. 이창동 감독에게 소통은 좀더 간절하고 긴급한 행위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에서 이창동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아픈 발로 도시를 걷다가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애타게 다이얼을 돌린다. 그러나 대화는 쉽지 않다. 말을 걸고 싶은 상대는 부재중이기 일쑤다. 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고 다음 모퉁이의 공중전화를 찾을 때까지 고독하다. 이창동에게 소통은 애절할 뿐 아니라 엄중한 일이다. 말이 소통이지, 솔직히 이창동 감독은 우리를 충격하고자 한다. 그의 소설과 영화는 무감동한 우리의 성문을 통나무로 쿵쿵 들이받는다. 이래도? 이래도 살겠습니까? 당신이 한 일이 정말 사랑이 맞나요?

이창동의 영화는 끈질기게 이야기한다. 주인공이 죽거나 사라진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한석규)는 죽지만 그의 가족들이 경영하는 식당에 우연히 들어간 미애(심혜진)의 손에 쥐어진 한장의 사진은 그녀가 그를 보낼 수 없음을 전한다. 폐허에서 출발해 삶과 사랑이 온전했던 시절로 역행하는 <박하사탕>에서 ‘끝’은 마침표가 아니라 도돌이표였다. 장르가 공식을 완결하고 시간이 바닥을 드러내고 판타지가 막을 내린 뒤에도 이창동의 이야기는 다하지 않는다. 이창동의 ‘카메라-만년필’은 살아남는다는 것은 잔인성과 비열함을 불가피하게 내포한다는 이치를 확인시킨다. “죽은 건 우리들이에요.” 광주의 슬픔을 그린 이창동의 단편소설 <전리>의 여주인공은 그렇게 말했다. 소설가 김훈도 그렇게 써왔다. 다만 이창동에게 있어 그와 같은 인식은 날카로운 미학적 쾌감으로 신속히 전이되지 않는다. “내가 나쁜 놈이라는 걸 제대로 알아야 거기 저항하고 싶어지지”라는 덤덤한 웅얼거림이 희미하게 들릴 뿐이다.

<밀양>은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영화일 거라고 이창동 감독은 말했다. 나는 <밀양>이, 구원보다 구원을 열망하는 인간의 행태가 중요한 영화, 영화로 구원을 말하는 게 대체 가능이나 한지 묻는 영화이겠거니 넘겨짚는 것이 고작이었다. 헤어지는 차 안에서 이창동 감독은 말을 아낀 것이 미안스러운 듯 영화의 주제곡을 들려주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영화제 자원봉사자에게 선사받았다는 아르헨티나 작곡가 크리스티앙 바소의 음악은, 진국 트로트였다. 포장마차 카바이드 불꽃처럼 통속하고 훈훈하게 일렁이는 멜로디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쿵짜작 쿵짝 쿵짜작 쿵짝. 겨울의 심지가 녹아든 찬비가 밤길을 적셨지만, 차 안에는 <밀양>의 은밀한 볕이 동그랗게 괴었다.

-인터뷰하는 사람으로서 감독님에게 느끼는 근본적인 부담이 있습니다. 감독님은 말에 대해 매우 엄격한 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말에 거품이나 불순물이 섞이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인상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살가운 인사치레는 안 하시는 걸로 알아요. 설경구씨 연극을 보러 가서도 “발성과 연기가 이미 영화 스타일이 되어서 네가 공연 다 버렸다”고 말씀하셨다는 후문을 읽은 적이 있어요.
=아닌데? 내 말이 100% 허튼소리인데? 내 말을 자꾸 곧이곧대로 안 받아들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웃음) 그리고 따뜻한 말은, 원래 잘 못해요. 가깝지 않은 사이에는 무뚝뚝하게 대하면 오해받으니 체면을 차리겠지만, 가까운 사람한테는 그렇게 안 하죠. 물론 가까운 사람도 오해는 하겠지만.

-본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야박하세요.
=말을 피할 뿐이죠. 감독이 자기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작가가 자기 소설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달라요. 소설가는 혼자만의 작품이니 겸손해도 되지만, 감독은 함부로 겸손해지기 어렵죠. 수십억원의 돈을 써놓고 “엉망이다”, “엉터리다” 말하기는 쉽지 않죠.

-새 영화 <밀양>을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 초까지 촬영하셨습니다. 촬영 시작 전에도 산고가 길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랜만에 돌아간 현장에서 느끼는 감각은 어땠나요? 외국에 오랫동안 살다가 돌아와서 우리말을 할 때 느끼는 희미한 어색함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하고.
=촬영 끝날 때까지 헤맸지요. (웃음) 외국어를 쓰다가 온 정도는 아니고, 모국어를 쓰긴 쓰는데 말이 잘 안 되는 정도?

-<초록물고기> 이후 10년 만에 감독님과 영화를 만든 송강호씨는 감독님이 고뇌하는 모습은 여전하신 반면에 예전보다 여유로워 보였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여유는 더 없었어요. 표정 관리, 감정 관리 기술이 늘었는지 몰라도.

-<밀양>은 알려진 바가 아주 적은 영화입니다. 스토리를 밝히기 꺼려하시니, 제가 갖고 있는 조각을 맞춰보겠습니다. 틀리면 바로잡아주세요. 신애라는 여자(전도연)가 아들과 함께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와 피아노학원을 엽니다. 카센터를 하는 종찬(송강호)은 차를 고쳐준 인연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신애는 밀양에서 아이를 잃게 되고 신앙에 깊이 빠집니다. 그러나 그 길도 벽에 부딪히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몸부림치고 종찬은 그 모습을 마음 아프게 지켜봅니다. 어떤가요?
=신앙과 관련이 있지만 신앙이나 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인간의 이야기죠. 남들이 보기에 자기를 포기하는 듯한 행동을 하지만, 신애는 자기 집착이 아주 강한 여자예요. 러닝타임 중 ‘볼 점유율’은 여자쪽이 많지만 내적으로는 신애와 종찬 두 사람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 영화죠. 그런데도 외적인 구조에서는 한쪽의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 영화예요. 왜냐하면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는 것이 실은 중요하다는 것이 <밀양>의 주제니까. 허, 이거 선문답하는 것 같네.

-<밀양>은 대부분 밀양에서 찍었습니다. 서울을 시큰둥하게 복제한 듯 보이는 우리나라 지방 도시의 전형성 외에 이 영화를 그 도시로 끌어당긴 요소는 무엇인가요?
=시큰둥하게가 아니라 열심히 복제했는데 결과들이 신통치 않죠. (웃음) 우선 도시의 이름이 중요했어요. 밀양의 밀(密)자는 비밀을 뜻하는 글자지만 원래는 빽빽할 밀자이기도 하거든. “햇볕이 참 좋은 곳”이라는 의미일 텐데, 비밀의 햇볕이라고 우리 나름대로 의미화한 것이죠. 밀양은 한국 중소 도시의 전형성을 가장 잘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해요. 이를테면 동해 하면 바다가 떠오르고 안산 하면 외국인 노동자나 공단을 생각하는데 밀양은 그런 이미지나 정보가 딱히 없어요. 그저 대도시를 복제한 듯 도시화되고 적당히 세속화된 가운데 원래 자기가 지녔던 고요한 그 무엇, 품위라 해도 좋고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 숨어버린 곳이죠. 그래서 ‘왜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해요. 그런데 나는 그 전형적인 도시에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예컨대 구원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는 것, 현실이 아름답거나 유의미해 보여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고 누추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신의 뜻이 거기 있을 거라는 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영화에서도 종찬의 대사 중 이런 말이 나와요. “(여기) 다른 데하고 똑같아요.”

-한국의 전형적 지방 도시라는 것이 이유라면 실제 촬영도 굳이 밀양에서 해야만 했나요?
=대개 영화는 필요한 장면을 여러 군데에서 찍고 그게 같은 공간인 양 꾸미죠. 그런데 <밀양>은 찍기 편한 곳, 영화적으로 보이는 곳을 찍어 밀양이라고 보여주는 것이 우리 영화의 컨셉을 배반하는 일처럼 느껴졌어요. 영화를 찍은 밀양의 피아노학원이나 동네는 햇볕이 잘 안 들어 촬영이 힘들었지만 거기가 밀양이기 때문에 찍은 거예요.

여자가 정서적으로 바닥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박하사탕>은 데뷔작 <초록물고기>보다 먼저 구상한 영화였습니다. <밀양>은 언제 시작됐나요?
=<오아시스>를 마친 2002년 말부터 머릿속에 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장’을 받아 공직에서 일하는 동안 잊고 지내다가 퇴임 뒤 다시 착수했어요. 중도에 몇번이나 포기하기도 했어요. 처음 생각한 영화의 컨셉은 지금과 좀 달라서 더 현실에 가까웠거든요. 다큐멘터리적이라면 다큐멘터리적이랄 수도 있는 형식을 생각했기 때문에 관철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죠.

-<초록물고기>는 막동이의 이야기였고 <박하사탕>은 영호의 여행이었습니다. <오아시스>는 종두와 공주의 드라마지만 결국 종두의 이야기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판타지 장면은 공주의 시점이었지만 현실에서 움직이고 사건을 만드는 주체는 아무래도 종두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밀양>은 처음으로 여성이 중심에 선 이창동 영화인데요.
=<밀양>이 특별히 여성이 중심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예컨대 이야기는 그대로 두고 신애와 종찬이 자리를 바꾸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요?
=당연히 여자가 그 자리에 있어야죠. 남자가 삶에 절망했다고 하면 믿겨져요? 남자가 삶의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가슴에 와닿나? ‘지가 아프면 얼마나 아파’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여자가 정서적으로 바닥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남자는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자는 훨씬 제약이 많죠. 사람의 고통은 하나의 사건에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거든요. 최종적으로는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좌절할지라도, 실은 살아온 시간 동안 쌓인 절망감 위에 어떤 사건이 최종적 무게로 얹히는 거죠. 그 같은 실존적 고통의 총량이 여자쪽이 크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한 가지만 더 여쭤보면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서 여자들은 남자주인공의 여정에서 희생자까지는 아니라 해도 대상화됐고 영화는 그 이상 그녀들에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오아시스>에서도 관객이 누구의 위치에서 공주와 종두의 사랑을 바라보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죠. 그래서 <밀양>이 혹시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와 같은 수난극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어린 공상을 하기도 합니다.
=수난극이라 보긴 어려워요. 신애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당하는 여자가 아니고, 어떤 사태에 남다른 반응을 보이는 여자예요. 어떤 면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죠.

-감독님은 <박하사탕>의 홍자(김여진)를 두고 “간지럼 잘 타는 여자”, <오아시스>의 한공주는 “한 공주하는 여자”라고 소개하신 적이 있어요. 전 그런 식의 인물 설명이 참 좋던데, 신애는 어떤 여자죠? 전도연씨에 대해선 어떤 기대를 갖고 시작하셨습니까?
=홍자나 공주처럼 표현하긴 어려워요. 누구나 마음의 바닥에 갖고 있는 걸 좀더 강하게 가진 여자인데, 그렇다고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녀의 문제는 보편적이죠. 자기 집착이 강한데 그렇다고 자신을 잘 보호하는 편은 아니고요. 신애 역의 전도연씨는 강한 부분의 극단과 결이 여린 극단 사이의 폭이 매우 넓은 배우라고 예전부터 생각해왔어요. 그리고 성격이 신애처럼 좀 외골수예요. 고지식하죠. 예를 들어 신애는 하나님이나 인간이나 믿으면 확 믿고 아니면 아닌 사람이거든. 그 사이 중간지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자예요. 전도연씨가 오기 전에 신애의 캐릭터는 없었다는 것이 옳아요. 캐릭터 만들기는 목수가 의자를 만드는 것과 달라서 내 머릿속에 원형이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사람이 되는 거예요.

-감독님의 전작들은 남자와 여자가 결말에 이르러 감정을 확인하되, 물리적으로 같이 살아가지는 못하는 유보적 짝짓기 상태에서 끝나는 멜로드라마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초록물고기>에서는 막동이가 죽고, <박하사탕>에서는 관객이 영호와 순임의 비애스런 끝을 먼저 목격한 다음 과거의 사랑을 발견하죠. <오아시스>에서 종두는 수감된 채 공주와 편지로 재회하고요. <밀양>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웃음)

-이른바 해피엔딩인가요?
=아니. 난 해피엔딩을 믿지 않아요.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는 말 같아요. 엔딩이 어딨어? 나는 이야기는 끝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는 관객/독자에게 하나의 구조로 다가가지만, 현실은 아니죠. 이야기가 해피엔딩이라고 현실이 해피엔딩이 되는 건 아니라고. 영화가 수면에 일렁이는 잔물결만한 영향이라도 관객에게 미치려면, 영화를 본 관객이 “그래, 두 사람 행복하게 살게 됐네, 축하한다!” 툭툭 털어버리고 극장을 나서서 자기 나름대로 걸어가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나는, 그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내 영화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영화매체’라는 개념을 자주 쓰십니다. <오아시스>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하는 기능과 영화라는 판타지가 수행하는 역할을 등치로 놓고 고민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어떤 성격과 힘이 있는지, 삶에 어떻게 소용되는지에 관한 생각을 놓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매체로부터 영화로 오셨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영화하는 모든 사람들이 “영화를 한다는 게 뭐지?”라는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환경이에요.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고 그것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유명해지기 위해 영화를 하나? 어쩌면 그런 맥락에서는 운만 좋고 노력한다면 영화 만들기가 좋아진 상황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나는 영화가 거기까지인가? 꼭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있어요. 상품으로서 갖는 힘을 기준으로 영화를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질수록 무력감이 드는 것이죠.

-말을 바꾸어, 영화가 의미있기 때문에 영화를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이유를 불문하고 영화 만들기가 행복해서 영화를 하지만 거기 의미도 있다면 좋겠다고 소망하시는 건가요?
=두 경우는 분명히 다르죠. 하지만 따로 오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내가 영화를 한다는 것, 그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봐요. 행복은 어떤 영화를 하느냐에 달린 거죠.

-종교를 갖고 계십니까?
=그런 질문은 좀 그렇지 않아요? 난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할 때 종교란에 ‘무’(無)라고 쓸 때마다 마음에 걸렸어요. 종교가 없다고 선언하고 공식적으로 서명한다는 것이 이상하더라고. 종교라는 것이 그런 문제는 아닐 텐데.

-어려서 별명이 ‘저지래’였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고를 자주 저질렀나요? 6남매 가운데 자라셨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나 공간을 갖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친구들과 말썽을 일으킨 건 아니고, 누가 “얘, 숭늉 좀 떠와라” 하면 일어나면서 상 위의 물건을 우르르 엎는, 그런 애였죠. 나는 4남2녀 중 제일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어요. 집에 내 방도 없고, 내 가방만 있었죠. 가방이 있는 곳이 내 방이었어요. 내 옷도 없었지. 형들 옷을 물려받았는데 형제 중 몸집이 큰 편이라 항상 바지는 복숭아뼈가 나오고 소매는 껑충 올라가 있었어요.

-감독님의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성격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내가 어디서 타협을 안 하는데? (웃음) 글쎄, 이런 건 있는 것 같아요. 내게 있어 강렬한 원체험은 내가 나고 자란 대구에서의 생활이 아니라, 방학이면 할머니집에 가서 머물던 안동의 솔바람 소리, 개울 소리예요. 다르게 말하면 어릴 때 가장 높은 수준의 미학을 체험한 거죠.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이 나의 미학적 기준을 내 능력과 상관없이 굉장히 높게 만들어버렸어요. 그 때문에 내가 더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는지도 몰라요. 또 하나는 안동 지역의 관습 같은 것이 있어요. 우리집은 매번 끼니를 때우는 일이 시련일 만큼 가난했는데도 자존심에 관한 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의(義)니, 도(道)니 하는 가치는 어린아이니까 몰랐지만 집안 어른이 오면 3촌 이내는 방 밖에서 절을 해야 하고 그보다 먼 어른은 방 안에 들어가 절을 한다든가 하는 관습이 있었죠. 사는 데에 허겁지겁했으니 선비답게 금전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에요. 다만 현실과 관계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무엇,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내게 입력이 된 거죠. 내일 아이들이 가져갈 공납금이 없는데 옆집에서 돈을 빌려 제사상을 차린다고요. 그때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를 어떻게 따지겠어요? 관객 많이 드는 영화를 만드는 것과 남들과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드는 것 사이에 가치의 경중이 뭐가 있어요? 그런데도 내 안에서는 어느덧 후자가 중요해져버린 것이죠.

-유년기의 특이한 일화로 김수용 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 출연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인연이었나요?
=알고 보면 허무하게 간단한 거예요.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이윤복이라는 소년의 일기를 김수용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잖아요? 그 이윤복이 우리 반이었어요. (좌중 웃음) 그래서 제작진이 학교로 찾아와 영화를 찍은 것이죠. 세상 모든 일이 대단한 뭐가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네컷을 찍었어요. 그때야 영화를 잘 몰랐지만 “아, 내가 이렇게 잡히는구나” 의식을 했어요. 모니터도 없고 뷰파인더를 본 것도 아닌데 찍는 순간 느꼈고 내 나름대로 열심히 연기했어요. 한컷은 조회대에서 윤복이- 김정훈 이전 최고의 아역스타였던 배우 김천만이 연기했는데- 가 동생을 찾으러 가출했다가 돌아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전교생 앞에서 약속하는 장면이었어요. 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아이 중 하나였는데, 김천만이 눈물을 흘리기에 난 그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고민했죠. 신을 벗어들고 운동장을 달리라는 장면에서는 “아, 이건 발만 찍는구나” 깨닫고 열심히 달렸어요. 또 하나는 아역배우 전영선이 윤복이에게 도시락을 하나 더 싸와서 건네주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그 뒷자리에 앉은 학생으로 나왔어요. 그 장면에서는… 별 생각을 안 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실제 그애들의 관계를 아는데 거짓말 같았거든. 걔가 저런 아이가 아닌데 하면서. (좌중 웃음) 내가 다닌 명덕초등학교 한쪽에는 병설 공민학교가 있었는데 또 전태일이 그 학교 출신이었어요. 시기는 달라도 역사적인 인물들과 같이 있었던 거지.

-조선희 소설가와 대담에서 “10대 초반부터 스스로 작가라고 여겼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요?
=글을 잘 썼다는 뜻이 아니고, 작가가 별게 아니라는 맥락에서 한 말이에요. 이사를 자주 다니다보니 동네 친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나를 드러낼 수 있는 통로가 혼자 앉아 이면지에다가 말도 안 되는 걸 끼적거리는 일이었다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문예반에서 활동했어요. 뭐, 거의 프로처럼 생활했지. (웃음) 학교 문예반이 있고 그중 대표 한두명이 대구 연합 문예서클을 하고. 당시 그애들은 이미 시인, 작가처럼 말하고 행세했어요. 만날 모여서 시, 소설 이야기하고 백일장 여기저기 다니며, 무슨 투어하듯이. (좌중 폭소)

-대학로에서 연극인들과 교유하던 시절 별명이 ‘없어도 황제’라고 하던데, 무슨 뜻입니까?
=교류 많이 안 했어요. 그 별명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연극은 내 생활에서 늘 옆에 있었어요. 열 살 차이 형님이 20대 초부터 연극을 했으니까요. 고교 졸업 뒤에는 자연스럽게 포스터도 붙였고 손이 달리다보니 출연도 하고 연출도 했죠. 대학교 때는 학교에서 연극을 했고요. 사실 문학청년이었던 셈인데 묘하게도 연극이 문학보다 재미있었어요. 글쓰기는 언제나 재능에 절망하고 한줄 한줄이 고통스러운데 연극은 쉽게 도취됐어요. 스스로 겁날 만큼 매력적이었죠. 그랬는데도 집안에서 형제끼리 연극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내 마음속에 선을 그었죠.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 신도시에 내 집을 장만한 인물의 소회가 표현돼 있는데 처음 집을 마련했을 때 소감이 기억나세요?
=방 둘에 연탄 부엌이 딸린 과천의 13평 아파트였죠. 신도시를 짓고 있을 때였는데 50만원에 입주권, 이른바 딱지를 샀어요. 시골 학교 선생하면서 부은 곗돈을 1번으로 미리 타고 아내가 모은 돈을 합쳐서 샀죠. 그 뒤로 22만원 월급 가운데 곗돈을 붓고 나면 5만원이 생활비로 남았어요. 아이 우유가 떨어질 때도 많았죠. 뒷날 박흥식 감독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과천에서 찍는데 현장에 오라 해서 찾아가다보니 바로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상가더라고요.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으셨던 걸로 압니다. 단편소설 <불과 먼지>에 어렴풋이 묘사가 돼 있기도 합니다. 여쭙기 조심스럽지만, 그 일이 창작자로서의 길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나요?
=작가로서는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영향을 끼치게 되죠. 그런 경험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거의 모든 면에서 달라져요. 가슴에 묻는다는 건 그냥 수사가 아니라서 가슴의 통증이 1년 남짓 계속됐어요. 가끔 사람들이 위로를 하면 그 말도 듣기 싫거니와 그 사람이 굉장히 미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수술로 아이를 잃은 학부형이 와서 “선생님, 우리가 어쩌다가 한배를 탔네요” 하더라고. 그 말은 완전한 공감이 됐어요. 굳이 말하면 그 배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타는 배겠죠. 그 소설을 썼을 때는 뭔가 남겨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흔적이 없다는 게 제일 견디기 어려웠거든. 사람의 죽음에는 남이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죽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5·18의 죽음이 그렇죠. 하지만 어떤 죽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놀랍지 않아요? 나는 놀라웠어요. 인간의 삶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기도와 찬송, 간구의 목소리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리적으로 그 소리를 꺼려하면서도 구원을 바라는 마음에 대한 공감이 느껴집니다.
=세상엔 그 고통을 아는 자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고통이 있어요. 즉, 인간의 논리로는 위로받지 못하는 부분이 인간의 삶에 있다는 거죠. 어떤 삶은 인간의 논리로 기억도 되고 기념도 되고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 싸우기도 하죠. 그러나 어떤 삶은 인간의 논리로 전혀 기억되지 않고 사라져버려요. 따라서 초월적인 것을 인간이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것도 결국은 다시 인간의 언어로 만들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요컨대 인간의 문제인 거죠. 내 영화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행복은 학습되는 거예요

-일정한 지점을 넘긴 나이에 어떤 분야의 신참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감독님은 꼭 10년 단위로 그렇게 하셨더군요. 1983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하셨고 1993년부터 영화계에 발을 들였고 2003년에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셨어요. 두려움이 발목을 잡은 적은 없었나요?
=2013년에는 뭐가 되려나? (웃음) 2003년에도 많이 괴로웠고 1993년에도 두려움이 있었죠. 영화계에 들어설 때는 소설도 이미 벽에 부딪힌 상태였어요. 그러니 모험이라기보다 도망친 것일지도 모르죠. 내 자신에게 벌을 준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 기합 준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살 수 없다, 막노동이라도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내 몸이 사치스러워져 있었어요. 영화는, 막일에 가까우면서도 약간의 문화적 사치감을 누릴 수 있는 기합 같은 거였죠. 하지만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들었고 연극에 대한 매혹도 간직하고 있었으니 물 흐르듯 운명적이었던 것 같아요.

-감독님의 소설과 영화는 그리 동떨어진 세계로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서 감독님의 영화를 다시 소설로 쓰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소설이어야만 하는 이야기, 영화여야만 하는 이야기의 구분이 머릿속에 있습니까?
=영화를 소설로 다시 쓸 마음은 절대 없어요. <초록물고기>는 좀 다르지만, <박하사탕>은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것부터 문자적 구조가 아니지요. <오아시스>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인데, 소통은 체험이거든요. 그 체험의 방식은 영화를 통해서만 가능해요. 육체적으로 남다른 한공주의 모습이 가장 소통하기 힘든 것인데 그것을 눈앞에 들이대는 건 영화로만 가능하죠. 연극도 할 순 있겠지만, 난 연극이 굉장히 관념적이고 언어의 성격이 강한 매체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근대적 형식이죠. 하지만 영화는 근대적 형식이 아니에요. 연극의 관객은 생각을 멈추지 않아요. 눈앞의 광경을 보며 관념놀이를 한다고. 그러나 영화관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아요. 그냥 느낄 뿐, 어떤 관념도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느끼죠.

-제가 감독님의 소설과 영화 사이에 문턱을 못 느끼는 이유는, 소설과 영화를 관통하는 일종의 ‘공범 의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범의식이 아니고 공범의식이요. 내가 저질렀다기보다 불의를 한몫 거들었다는 죄책감인데요. 관객이 <박하사탕>처럼 주인공과 함께 공범의식을 느낄 때도 있고 <오아시스>처럼 주인공들의 수난에 대해 공범의식을 느낄 때도 있고.
=나와 함께 작가생활을 한 80년대 작가라는 사람들의 공통점이죠. 내가 걸어온 길이 10년 주기라고 말했지만, 우리 문단도 세대론이 있잖아요? 6·25세대, 4·19세대, 유신세대, 80년 세대가 모두 공교롭게도 그 세대 출발점에서 일어난 사건의 영향을 받았거든요. 유신시대에는 나 역시 자유로운 감수성에 어쩌면 주책맞을 만큼 의존하는 기질이었어요. 시내버스 뒷자리에서 흔들리면서도 글을 썼다고. 창밖을 내다보며 한줄 쓴 글이 환기시키는 감수성에 스스로 도취되고 행복감을 느꼈죠. 그러다가 광주와 같은 비극을 만나고 내가 쓰는 글과 나를 둘러싼 현실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괴로워진 것이죠. 자유로운 상상력은 금기가 돼버리고, 그렇다고 내 안에서 문학을 현실에 적극적으로 복무하게 만들지도 못하니까 기껏해야 공범의식이 된 것이죠. <밀양>은 그런 공범의식과는 거리가 있을 거예요. 덜 정치적이랄까.

-여담이지만 단편소설 <눈 오는 날>을 보니, 군인이 면회 온 다른 병사의 애인과 말을 주고받는 장면은 <박하사탕>에서 순임이 영호를 면회 오던 날과 비슷하더군요.
=그건 내 체험이에요. 군대 시절 내가 위병 서다가 면회 온 아가씨와 나눈 대화죠. “서울이 다 아가씨 집인교?”, “아, 좋은 데서 왔네!” 이런 말들. 기본이죠. 군대 온 기분 나게 그런 말도 좀 해줘야지. (웃음) 그때 내가 말을 해놓고 재미있어서 바로 메모를 해놓았었지.

-감독님 작품들이 지닌 또 하나의 공통점은 불운한 사람들에 관한 관심입니다. 불행과 불운은 좀 다를 텐데요.
=다르죠. 행복감은 학습되는 거예요. 나는 행복에 대해 학습이 안 돼 있어요. 한국인이 대개 행복을 학습 못하고 살아가죠. 여론조사를 하면 OECD 국가 중 불행지수가 제일 높잖아요. 서양인들은 밥 먹고 나서도 “Are you happy?”를 물을 만큼 행복이란 말을 친숙하게 쓰지만 우리에게 행복은 내가 쉽게 손잡을 수 없는 무엇이지요.

스크린쿼터의 핵심은 다양성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박하사탕>을 만들 무렵에는 배우를 “내 첫사랑이자 아내이자 분신”이라고 표현하셨어요. 실제로 상냥한 말씀은 좀체 안 하시지만. (웃음)
=좀 웃기는 분류지만 나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그 인물이 누구냐,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영화의 성격과 형식, 태도를 결정한다고 보죠. 새로운 영화를 생각할 때도 이야기보다 인물부터 떠올려요. 그런데 내가 촬영장에서 만나는 배우는 반은 연기자고 절반 혹은 그 이상은 극중 인물이에요. 그러니까 작업 중에 만난 배우는 그 배우 자체가 아닌 것이죠. <밀양>의 송강호는 <우아한 세계>나 <괴물>의 송강호와 다르고, <밀양> 현장의 전도연은 반 이상 신애가 되어 ‘신애적인’ 태도를 보여요.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도 하고 대결하기도 하죠.

-<오아시스> DVD 코멘터리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감독님이 해설을 하시다가 종두와 공주가 만나는 초반 어느 장면에서 갑자기 사라지시더니 두분의 스탭이 코멘터리를 이어가시더군요. 감독이 코멘터리 도중 행방불명되는 DVD는 처음이었습니다.
=코멘터리가 그런 것인 줄 모르고 갔다가 깜짝 놀랐고 도저히 못하겠어서 나왔어요.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를 두고 숨은 의미나 뭔가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는 건 결국 미화 아닌가. 그렇다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가령 내가 <반지의 제왕>을 찍었다면 코멘터리를 할 만하겠죠. 저 장면은 어떻게 만든 CG고, 돈은 얼마 들었다는 등 그런 건 관객이 듣고 싶어하지. 하지만 종두가 사당동 네거리에 내렸는데 그때 영하 몇도였다거나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때로는 차마 말하기 힘겨운 장면도 있고. 코멘터리란 참 이상한 관습이에요.

-예전에 누가 촬영현장 모니터 보면서 “이 장면 관객 얼마짜리다” 칭찬하면, 철렁해서 거꾸로 “이건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고 하셨죠. 지금까지 감독님이 세상에 내놓은 소설과 영화가 아주 많은 상을 탔잖아요. 훈장도 받으셨고요. 상을 그만큼 많이 받으니 오히려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정말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내가 부르짖고 이루고자 노력하는 정직함이 어디까지인가라는 반성을 하게 되죠. 어려서 백일장을 나가다보면 어떻게 쓰면 상을 주는지 알아차렸거든요. 그처럼 내가 생각하는 정직함에 이미 타인의 시선이 들어 있지 않은가 하는 석연치 않음이 있죠.

-공직에 계시는 동안, 난생처음 경험하는 관계와 처음 가보는 장소, 처음 겪는 시간이 있었을 텐데요. 바쁘게 일하면서도 불현듯 이것은 후일 시나리오의 소재가 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스쳐간 적 없었습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밖에서 생각하듯 공직자 사회가 별난 사람이 모인 별다른 세계는 아니에요. 나는 그곳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럴 줄 알았고, 그렇게 관철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 자신에게 속지 않도록 경계했어요. 사실 <한반도> 때 강우석 감독에게 “내가 (대사를) 손을 좀 볼까?” 하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어요. (좌중 웃음) 실제 그런 식으로 대화를 하지 않거든. 그런데 강우석 감독은 그러면 재미없다는 거야. 그것도 이해가 갔어요. 어차피 그런 종류의 리얼리티를 요하는 영화가 아닌데 이상해질 수 있죠. <그때 그사람들>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다를 게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한 영화지만 묘사하는 방식이 현실적이진 않잖아요? 현실과 똑같이 그리는 것만이 적합한 방법은 아닌 것이죠.

-문화관광부 장관에 취임하기 전에 오랫동안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정책위원장으로서 스크린쿼터 사수 문제에 관해 누구보다 깊이 생각하고 정책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다 장관이 되어 이 문제를 밀고 당기는 입장에 계셨고 재임 막바지에는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 추락시 원상회복한다는 조건을 붙여 쿼터일수 92일안을 내놓으셨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영화계에 오간 말 중에는 ‘배신’ 같은 단어도 있었는데, 마지막 방안을 내놓은 심경과 판단을 들을 수 있을까요?
=내가 정부에 들어가 스크린쿼터를 지키기 위해 나름 노력을 했지만, 정부 내부에서 앞으로 어떤 결과가 올 거라는 것도 예측할 수 있잖아요. 정보도 있고 정책의 방향을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내 인식과 영화인들의 인식이 달랐어요. 영화인들은 지켜야 할 원칙이 있었고 투쟁해서 지킬 수 있는 문제라고 본 반면, 나는 다가올 예측 가능한 결과를 나름대로 대비해야만 했죠. 92일안은, 순전히 내가 온갖 조건을 종합하고 우리 영화계가 궁극적으로 지켜야 할 것을 고려해서 제출한 방책이었지 결코 타협의 산물이 아니었어요. 판단이었지 흥정이 아니었다고. 한국영화 최대 위기를 두고 영화인들은 한국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절대 일수가 화두라고 보았고 나는 다양성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스크린쿼터의 위기를 다양성을 확보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본 거죠.

-문인 출신이신 <망종>의 장률 감독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시죠? 만남의 우여곡절이 궁금합니다.
=그것도 들으면 허망할 텐데. 10여년 전 우리 형제들이 중국에 가서 식당을 차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중국 문화예술인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만나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죠. 그 무렵 중국에는 고급 호텔 식당과 열악한 대중음식점만 있었지 한국의 대학로나 신촌, 예를 들어 학림다방 같은 분위기의 공간이 없었거든요. 그런 낭만적인 생각으로 형제끼리 돈을 모으고 땅도 빌렸어요. 이름도 지었죠. ‘노지방’이라고 오래된 곳이란 뜻이었는데 그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장률 감독이에요. 그 밖의 실제적 문제를 많이 도와줬죠. 그런데 알고 보니 작가였고 친분을 이어갔죠. 그 식당은 결국 중국 공무원들의 부정부패에 휘말려서 사기를 당하는 것으로 끝났죠. 그리고는 시간이 흘러 장률 감독이 첫 단편 <열한살>의 네거필름을 들고 한국에 왔어요. 황당하기도 했지만(웃음) 현상과 녹음을 주선했고 그 과정에서 영진위에 있던 최두영씨가 장률 감독의 제작자로 인연을 맺었어요. 장률 감독의 영화는, 내 영화보다 금기에 가까이 있어요. 아마 그가 서 있는 조건 때문이겠지요.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오신 90년대 초반에 “진담을 하면 어색해지는 시대”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점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소통을 향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계시지만, 앞서 말씀하셨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만들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환경에서 지쳐가고 있다거나 회의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자각은 없으신지요?
=많이 느낍니다. 영화를 앞으로 다시 할 수 있을까, 장사 끝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죠. (웃음)

-한번쯤 본인의 묘비명에 대해 상상해보셨나요?
=아니. 묘를 쓰지 않을 거예요. 화장하게 되지 않을까? 납골당은 말고, 강이나 바다에 뿌리는 것이 불법인가요? 하늘에서 날리는 것도? 황사에 얼마나 많은 중금속이 실려오는데…, 다 태우고 난 사람의 뼈가 더 깨끗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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