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 시티>의 원작자이자 공동 감독인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각색한 <300>은, 자칫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일단 서구인이 아니라면, 페르시아 왕과 병사들을 잔인한 야만인으로 그린 것에 불쾌할 수 있다. <300>의 그리스 세계는 ‘이성과 정의의 유일한 희망’이지만, 페르시아는 타국을 침략하고 노예를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전제국가이다. 하지만 고대의 페르시아는 그리스 이상으로 이성적일뿐 아니라, 너그러운 국가였다. 또한 페르시아를 따지기 이전에, 스파르타가 과연 칭찬받을 만한 법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는가, 도 생각해야 한다. 스파르타는 노예에게 가장 가혹한 노동과 형벌을 가한 나라였다. 잭 스나이더 감독 역시 “영화는 스파르타인의 시각에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들의 문화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말한다. ‘작거나 약하거나 병색이 있거나 기형이면 버려’지고, ‘굳세고 강한 자만이 스파르타인으로 불’리는 스파르타의 사회체제는 명백한 군국주의이고,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국가였다.
다층적인 이야기가 필요없는 하드보일드함
하지만 페르시아에 대한 그릇된 시각은, <300>에서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와 대립이 아니라, 강력한 적에 맞서는 영웅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게 페르시아건 미케네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압도적으로 강하고, 많은 수의 적이면 된다. 잭 스나이더는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300>이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전달하고 싶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전쟁터에서의 아름다운 죽음을 최고의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스파르타인들은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300명의 스파르타인이 크세르크세스 왕의 100만 대군에 맞서 싸운 사건이 존재했기 때문에 단지 그 상황을 가지고 온 것뿐이다. 프랭크 밀러가 그 사건을 채택한 것은, 절대적으로 승리가 불가능한 싸움에, 기꺼이 도전하는 남자들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프랭크 밀러가 추구하는 하드보일드의 영웅이기 때문에.
영화 <300>을 놓고 이야기가 허술하다느니, 정치적 시각에 문제가 있다, 는 비판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에 원작부터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원작의 사건들은, 영화보다 더 간단하고 직선적이다.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300>은 300인의 죽음에 이르는 싸움만 보여준다.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전사인지, 그들을 살아가게 하는, 죽게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만 보여준다. 오히려 영화에 원작보다 더 복잡한 플롯이 추가되어 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추가된다. 스파르타에 남은 왕비의 투쟁, 부자가 함께 참전했다가 아들을 잃은 사령관의 슬픔도 세세하게 그려진다. 스펙터클을 위해서 페르시아의 거인병이나 코뿔소도 등장한다. 그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레오니다스 왕이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싸우는 동안, 스파르타를 배신하려는 정치꾼들의 음모에 맞서 싸우는 왕비의 이야기다. 단순한 원작 탓에 다른 에피소드를 만들어 넣은 것이지만, 사실 불필요하다. 왕비도 스파르타 여성으로서, 자비로움 대신 단호함과 폭력을 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정도다. <300>은 이야기가 더 단순해도 좋다. 애초에 프랭크 밀러가 <300>을 그린 이유도, 내가 <300>을 보는 이유도 하나뿐이다. 베를린영화제의 117분 버전이 지루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300>에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다.
프랭크 밀러의 것은 프랭크 밀러에게 돌리라
하지만 <300>을 걸작이라고 말하기에는 걸리는 것이 있다. 그래픽 노블 자체가, 그리고 영화로 각색되면서 <300>은 기묘하게 뒤틀린 운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드보일드의 전도사 혹은 선지자 프랭크 밀러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하드보일드를 사전에서 찾으면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헤밍웨이가 확립한 태도가 추리소설로 넘어가면,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우로 형상화된다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의 주인공들은 ‘현존 사회질서에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은, 냉소적이고 비정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이 세계가 얼마나 거대한 위선 혹은 환상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결코 그 세계를 무너뜨리거나 깨트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은 이미 절망했고, 그 절망감을 안은 채 무심하고 강하게 살아가기를 결심한 인물이다. 정글 이상으로 잔혹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비정함과 폭력밖에 없는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이 말하듯, 이 세계 전체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엉망진창의 ‘차이나타운’인 것이다.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남편의 뒷조사나 동생의 실종 등 사소한 사건들을 맡아 뛰어다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세계의 거대한 모순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무표정한 얼굴로 외면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인 존재가 바로 하드보일드의 ‘센 척하는’ 탐정들이다.
‘하지만 본심을 들여다보자면 이들은 여전히 감상주의자이며, 곤경에 빠진 여인이나 강자에 시달리는 약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인물’이기도 하다(<즐거운 살인-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그들이 쿨한 척하는 것은, 절망과 무력감 때문이다. 그들이 누군가를 도와서, 그들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것들을 돌려주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면, 그들은 넘어가고 만다. 그들은 이미 패배했고, 이미 껍질만 남은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소한 명예를 위해서라면,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씬 시티>의 마브는, 하룻밤 사랑을 나눈 여인이 살해당하자, 씬 시티의 지배자에게 감히 도전한다. 전통적인 하드보일드 혹은 필름 누아르였다면 아마 끝까지 가지 못한 채 좌초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월적인 영웅을 원하는 그래픽 노블에서는 다르다. 마브는 씬 시티의 지배자를, 마브가 단 한번 사랑했던 그녀를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그 남자를, 가장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그것이야말로 하드보일드의 영웅이 택할 진정한 명예다.
<씬 시티>의 로버트 로드리게즈나 <300>의 잭 스나이더나, 프랭크 밀러의 원작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변형시키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프랭크 밀러의 세계를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었을 뿐이다. 로드리게즈는 그 열망이 지나쳐 프랭크 밀러를 공동 감독으로 앉히면서까지 예우를 했고, 스나이더 역시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면 그 모든 영상이 결국은 프랭크 밀러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영화를 만들었다. 로드리게즈와 스나이더는 기꺼이 작가 대신 장인의 길을 택했고, <씬 시티>와 <300>은 온전히 스크린에 재현된 프랭크 밀러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드보일드적 영웅과 파시스트적 스파르타인의 균열
하지만 그들의 근본은 약간 다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맹우인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철저하게 유희정신으로 뭉쳐 있는 감독이다. 로드리게즈는 프랭크 밀러의 <씬 시티>에서 하드보일드의 테마파크를 발견한다. 배신과 음모, 폭력과 섹스, 굴욕과 두려움 등 <씬 시티>는 남자들의 폭력과 사랑의 판타지를 스타일리시하게 그려낸다. 로드리게즈는 어떤 두려움도 없이, 남자들의 음울한 판타지를 맹렬하게 전개한다. 과거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그랬듯이, 거침없이 폭력과 성의 향연을 분출하는 것이다. <씬 시티>를 감히 걸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프랭크 밀러의 세계에 일부 존재했던 풍자와 유희를 전면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소름끼치고 어두우면서도, 영화로 만들어진 <씬 시티>는 유쾌하고 멋지다.
<300>은 <씬 시티>의 세계와는 다르다. 스파르타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다정함은 곧 약함’임을 아는 하드보일드의 전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성과 정의의 유일한 희망’을 지키겠다면서, 기꺼이 죽음을 바치는 집단주의적인 영웅이다. 죽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지만, 300명의 스파르타인에게는 대의란 것이 존재한다. 대의를 위해 싸우는 하드보일드의 영웅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드보일드의 영웅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가치일 뿐이다. 마브가 씬 시티의 지배자에게 복수하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권력이나 자본은 일체 신경 쓰지 않는다. 프랭크 밀러는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정치적 발언을 감행하며 ‘전면전’에 뛰어들지만, 진정한 하드보일드의 영웅에게 어울리는 것은 ‘고독한 개인’이다. 배트맨이 자신의 행동이 개인적인 복수인지 정의를 위한 싸움인지 고민하는 이유는, 사실 그것이 개인적인 복수에 기초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드보일드의 영웅은, 세상을 믿지 않는다. 미래가 좋아질 것이란 희망을 믿지 않는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과감히, 자신이 믿는 유일한 것, 개인의 가치를 위해서만 싸우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단지 우정을 위해서.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하드보일드의 표본 같은 존재이지만, 그들에게는 집단이, 국가가 존재했다. 그들은 하나의 가치를 위해서 싸우는, 파시스트였던 것이다. 프랭크 밀러가 <300>을 아주 심플하게 묘사한 것은, 그들의 내면을 파고들어갈수록 균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싸우는 하드보일드의 영웅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300>은 논리나 이해가 아니라, 정서의 영화가 된다. 하드보일드의 세계를 우리는,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이고, 눈으로 보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심층이 아니라, 표면의 재현이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하드보일드의 세계. <300>은 결코 걸작이 아니지만, 단지 그 재현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아니 그 이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