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The Lives of Others)은 뛰어날 정도로 고립된 제목과 딱 20세기적인 전제를 가진 영화이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첫 번째 영화는 베를린 장벽이 지정학적 세계에서 움직일 수 없는 중심으로 여겨졌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때는 1984년. 조지 오웰의 소설 속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모범적인 스탈린주의 경찰국가였던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세계에서 인구당 가장 많은 미행자, 도청 전화기, 도청된 방을 갖고 있었다. 독일 국가안전기구(Stasi: State Security Apparatus)는 1만명의 요원들과 적어도 그보다 두배가 넘는 ‘비공식’ 정보통을 보유했다. 협박은 어디에서나 만연했다. 비밀첩보원들은 상대를 몰래 조사하기 위해 반대편에 침투해 들어갔다. 농담이나 소문과 마찬가지로 낙서조차 조사를 받았다. 국가안전기구는 미래의 단서로 사용하기 위해 용의자의 몸 냄새까지 신중하게 수집했다. <타인의 삶>은 바로 이러한 시대에 당 지도부가 동독의 1600만 시민의 개인 정보 컴퓨터 파일을 만들려던 때를 다루고 있다(이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동독이 무너졌을 때 600만건의 서류만 존재했다).
서른세살의 작가이자 감독이 보여주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배신에 대한 감상적 환기는 사회적 존재라는 뚜렷한 형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철저한 감시의 눈 아래에서 살아가는, ‘반성하지 않는 삶’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무심결에 보여주는 영화 속 인물들은 그들의 파일에 의해 주형(鑄型)된 그림자에 불과하다(중략). <타인의 삶>과 더 꼼꼼하게 초점을 맞춘 <영혼의 분해>(Decomposition of Soul)- 이번주 필름포럼 개막식에서 선보인 벨기에 다큐멘터리- 는 자기 영속적인 편집증과 만연한 허구로 가득한 세계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타인의 삶>의 숨겨진 스타인 국가안전기구 요원인 비즐러(울리히 뮈헤)가 40시간 동안 심문당하고 있는 불운한 억류자에게 말하듯(이러한 장기간의 심문을 국가안전기구의 은어로 ‘분해’라고 부른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 또는 <영혼의 분해>에서 한 희생자가 설명하듯이 국가안전기구의 임무는 범죄자를 찾는다기보다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낄 만한”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두 영화 모두 동독 국가안전기구를 다룬 예술작품에 속한다. 통일 직후 동독의 가장 뛰어난 소설가였던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는 소설 <남아 있는 것>- 국가안전기구의 감시하에 있는 하루를 다룬 이야기- 을 출판했다(소설이 출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볼프 자신이 25년 전에 국가안전기구의 밀고자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독의 신디 셔먼인 코르넬리아 슐라임(Cornelia Schleime)은 그녀의 파일을 손에 넣고, 파일의 진실을 비꼬기 위해서 각색된 자화상들을 덧붙인다. 1992년 무렵 독일 정부는 쌍방향 국가안전기구 박물관을 만들었다. 외국인들도 박물관에 기증을 할 수 있었다. 영국 저널리스트인 티모시 가튼 에시는 자신에 관한 서류를 발견했고 그것에 관한 책을 썼다. 예술가인 제인 윌슨-루이스 윌슨 부부의 으스스한 구조주의 비디오 작품을 만들기 위해 허물어진 국가안전기구의 동베를린 총사령부에서 <국가안전기구 도시>(Statsi City)의 첫 숏을 찍었다.
비밀경찰을 통해 휴머니즘 앞세운 <타인의 삶>
자칭 “여당의 창과 검”이었던 국가안전기구는 “사회주의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즉, 사회주의 지식계급을 단속하기 위해 존재했던 셈이다. 국가안전기구가 만든 가장 두툼한 파일은 작가와 배우 그리고 예술가에 대한 것이었다. 변태적인 관점에서 감시란 오락의 또 다른 형태였다. <타인의 삶>에서 암시되듯 끊임없는 감시 아래 사는 삶은 연극이 된다.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춘 희생자는 극작가 게오르그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흐)이다. 국가안전기구 요원인 비즐러는 드라이만에게 “체제 전복적이지 않으면서도 서방에서 읽히는 유일한 작가”라는 냉소적일 정도로 우월한 판단을 내린다. 드라이만은 정확히 (카프카의) 조세프 K는 아니다. 드라이만은 훨씬 더 추상적이다. 잘생겼고, 카리스마가 있고, 비현실적일 정도로 순진하며, 그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의혹도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준군사적인 임무에서 꼼꼼한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마흔 번째 생일 파티를 도청하기 위해 드라이만과 주도적인 그의 애인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가 사는 아파트에 도청장치를 설치한다. 생일 파티는 술에 취한 불만족자들의 잔치였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국가안전기구의 밀고자라고 비난한다. 의도적으로 설정된 텅 빈 위층의 다락방에서 무표정한 비즐러는 그것을 꼼꼼하게 듣고 있다. 한층 아래에서 전체적으로 벌어지는 행동들을 추적하면서. 드라이만은 예술가이고 비즐러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비즐러는 이상주의에 있어서 드라이만과 동일한 면모를 보인다. 비즐러는 스탈린주의의 충성스러운 신도이고, 그의 임무가 사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진정으로 동요하는 인물이다. 탐욕스러운 문화부 장관은 크리스타에 관한 계략을 갖고 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이 계략을 알아차리도록 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시작점이 된다. 곧이어 국가안전기구의 이 철두철미한 요원이 시집을 빌리기 위해 몰래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이러한 선한 의도 때문에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애정 전선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비즐러는 그들의 수호 천사가 된다. <타인의 삶>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빔 벤더스가 자유롭게 떠다니는 상징물로 설정한 분열된 베를린에 유물론적 주석을 덧붙인다. 브루노 간츠가 분한 감정이입을 하는 천사와 비슷하게, 비즐러는 인간처럼 되길 갈망한다. 그는 드라이만이 그의 멘터의 죽음을 애도하며 피아노를 치는 것을 듣고 눈물 흘린다. 그리고 이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비즐러는 일반인 사이에서 쉼을 얻기 위해 허름한 술집으로 향한다. 갑자기 흐트러진 상태로 크리스타가 나타나자, 비즐러는 주체하지 못하고 팬으로서 그녀에게 접근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당신의 관객입니다.”
연기는 계속된다. 드라이만은 동독의 과도하게 높은 자살률을 폭로하는 수필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것을 가장하기 위해 드라이만과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친구들은 독일민주공화국 건국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연극을 쓰고 있는 척한다. 좀더 연극적으로 눈길을 끌기 위해, 그들은 드라이만의 아파트가 그가 상상하는 만큼이나 깨끗한지(반체제적인 의도가 없는지) 살피기 위한 거짓 사건을 꾸민다. 그들이 하고 있는 얘기를 듣고 있을 천사의 존재는 전혀 의심하지 못한 채 말이다.
<타인의 삶>은 매혹적인 스릴러물이지만 만족스럽게 인물을 살리지 못한 드라마이다. 국가안전기구 요원이 더 인간적이 될수록, 허물어진 휴머니즘이 지속적으로 영화의 비극적 기대감을 저버린다. 자신이 만든 예술가들보다 더 감독은 모든 것이 제대로 되도록 애쓴다.
국가안전기구의 시설을 탐구한 <영혼의 분해>
더 강인한, 그리고 시적이기까지 한 다큐멘터리, <영혼의 분해>에는 뭐라고 딱히 말할 드라마는 없다. 이 영화의 제재는 존재의 상태이다. <타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니나 투상과 마시모 이아네타의 다큐멘터리는 ‘분해’로 시작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열은 끝나지 않는다. 엄청나게 불을 밝힌 취조실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희생자의 시점에서 본 국가안전기구의 시설을 다룬다. 총체적 비인간화의 과정과 섬뜩한 친밀함을 묘사한다. “모든 것이 당신이 상상한 그대로다”(혹은 카프카가 그렇게 쓴 것처럼).
방법 면에서 매우 간소하지만 <영혼의 분해>는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그리드 폴은 아들의 치료를 위해 서베를린으로 아들을 데리고 왔지만, 베를린 장벽이 올라가자 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위조된 문서를 가지고 서독에 가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그녀의 더 심각한 죄목은 도망자일지도 모를 세 사람을 숨겨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트무트 리히터- 서방으로 도망해서 인권운동가가 된 동독인- 는 여동생을 몰래 데리고 나가려다가 걸려서 투옥된다.
<영혼의 분해>는 주석 붙은 <국가안전기구 도시>이다. 희생자들이 수면 부족과 물리적 배고픔에 대해 소상하게 밝힐 때 카메라는 빈 방을 응시하고 황폐해진 복도를 배회한다. 일어났던 모든 일은 갑작스레 일어나는 끊임없는 기다림의 상태가 수면 부족과 배고픔으로 표현된다. 재소자들은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이 고발자였다는 사실과 간수들도 통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바깥세계에서 밀고와 통제가 얼마나 만연한지를 깨달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 역시 충격으로 다가온다. <영혼의 분해>는 의도적으로 한정된 영화이다. 그러나 <타인의 삶>과 달리 그것은 어떤 결말도 제공하지 않는다.
번역/ 하인혜 | 2007.2.6 <빌리지 보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