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천년학>은 사랑을 소리로 승화시키는 이야기다."
2007-04-03
글·사진 : 강병진
3일 서울극장에서 열린 <천년학> 기자간담회 현장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4일 오후 2시, 서울극장에서 공개됐다. 시사가 끝난 후 마련된 기자간담회에서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는 소리의 감흥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면, <천년학>은 소리 자체를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에 끌어들이려 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고, 동호 역을 맡은 조재현은 "<천년학>이 한 편의 동양화라면, 나와 오정해씨는 그림 속에 담긴 꽃"이라며 "그림에 잘 묻어날 수 있는 꽃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들 외에도 정일성 촬영감독, 오정해, 양방언 음악감독이 함께한 기자간담회의 대화를 여기에 옮긴다.

- 한미FTA타결로 스크린쿼터가 현행유보로 결정났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임권택 | 스크린쿼터란 보호막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감독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투자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크린쿼터 때문에 한국영화의 수요가 유지될 수 있었고, 그래서 나도 남들은 흥미없어 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스크린쿼터가 반으로 줄어들게 된 이상, 극장은 외국영화의 주도로 나아갈 것 같다. 한국영화는 그들이 영화를 흥행시키고 난 틈새의 시간에 공급 될 것이다.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도 빠져나갈 것 같다. 어떻게든 쿼터가 되살아나야 하지만, 어제의 결정으로 더이상 살아날 수 없게 됐다. 지금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영화를 잘 만드는 일 뿐인 것 같다.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

- 100번째 영화라는 의미외에도 감독 개인적으로 가진 <천년학>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임권택 | 나는 100번째 영화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가볍게 넘기려 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너무 큰 의미를 두더라. 나에겐 사실 98번째든, 99번째든 100번째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101번 째로 건너뛸 수가 없기 때문에, 100번째 영화가 무사히 건너뛰기를 바랬을 뿐이다. 또 내가 거쳐온 세월이 가득 담기는 영화가 되기를 바랬다. 한국사람들의 풍류에 대한 멋과 소리에 대한 멋을 심어넣고, 그것이 커다란 한국화로 보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다행히 무사히 끝내서 해외영화제나 국내 관객이나, 후배들에게 영화를 보여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다.

- 임권택 감독의 100번 째 영화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럽지 않았나.
조재현 | 감독님의 100번째 영화라는 게 부담이 안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쪽으로 해석하곤 했다. 한번은 감독님께 "97,98, 99번째 영화보다는 100번째 영화의 주인공이 좋지 않을까요? 교과서에도 이름이 오를 지도 모르고..."라며 농담한 적도 있다.(웃음) 무엇보다 나는 <천년학>을 시나리오보다도 임권택 감독님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에 관해서 후회는 없다. 여러분이 쓰게 될 기사도 중요하지만, 나는 감독님이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다.

오정해 | 송화를 다시 연기해야하는 것이나,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하는 것,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에 4번이나 출연하게 된 것, 그리고 감독님의 100번 째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 모두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숙제는 송화라는 인물을 충실히 연기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서편제> 처럼 송화의 소리의 절창이었다면 인간문화재 선생님의 소리를 빌어야 했겠지만, 여기서는 송화가 가진 사랑의 감정이 담겨야 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써 해외영화제의 수상을 떠나, 판소리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기쁘게 받아들였다.

- 판소리가 주된 테마인 <천년학>의 음악을 맡으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양방언 | 색다른 경험이었다. 나는 국악전공자도 아니기 때문에 국악으로 전체적인 음악을 구성하는 게 어려웠다. 현장에 찾아가서 감독님과 대화하고, 배우들과 술도 마시면서 방향을 찾아갔다. 또 임권택 감독님의 100번째 영화인 만큼 완성도를 갖추기 위해 런던에도 가서 작업했다. 그곳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했다. 어떤 단원은 작업이 끝난 후에도 영화에 대해서 물어보더라.

- <천년학>은 인물들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오정해 | 영화가 묘사하는 사랑은 요즘의 사랑과는 매우 다르다.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붙잡을 수도 있지만 붙잡지 않는다.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감독님은 사랑이란 따뜻하고 온화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송화가 맹인이기 때문에 시선처리를 할 때 힘든 점이 있었다. 또 소리를 할때마다 그때 그때 다른 감정을 담아야 하는 점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조재현 | 영화를 보면 꼭 만나서 교류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떨어져 있을 때의 모습을 보면, 동호의 모습에서 송화가 보이고, 송화에게서 동호가 보이기도 한다. 또한 송화가 소리를 할 때는 그 속에 동호에 대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런 것도 사랑이 아닌 가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눈 것이 정말 잘한 일 같다. 나는 지금 17년 째 연기를 하고 있지만, 감독님은 50년동안 영화를 만드신 분이다. 하지만 어떤 때 보면 감독님 보다도 내가 더 매너리즘에 빠져있구나 싶더라. 감독님은 지금까지도 계속 틀을 깨고 오신 것 같다.

-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판소리는 어떻게 구상했는지.
임권택 | 소리판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조명창이 부르는 <적벽가>같은 판소리는 옛날 부터 기량이 뛰어난 소리꾼에게 요구되던 것이다. 또 영화 속에서 조명창이 송화의 소리를 비판하는 것도 소리판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 최근 작품들을 보면 음악쪽에서 많은 변화를 주려는 것 같다. <춘향전>부터 계속 다른 음악가들과 작업해 오고 있다.
임권택 | <천년학>을 만들면서 중점을 둔 부분 중 하나는 <서편제>의 아류작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거듭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만약 김수철이 <서편제> 때 잘했다고 해서, 또 가져다 쓰면 알게 모르게 그런 인식을 주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천년학>에서는 판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너무 과도하게 보이면 문제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누구와 작업을 해야할 까 고민하던 차에 양방언의 공연을 보게 됐다. 한국악기와 서양악기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점이 좋았다. 재일교포라고 해서 내심 음악에 왜색의 느낌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한국사람다운 음악을 하고 있더라.

- <서편제>처럼 <천년학>도 ‘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독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이란 무엇인가.
임권택 | 한이라는 정서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든 것 같다. <서편제>에서는 한을 딛고 넘어서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천년학>에서는 그 정도로 한을 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사랑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그 뒤에 판소리를 승화시키려 했다. 말하자면 <천년학>은 한을 뛰어넘어서 사랑을 소리로 승화시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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