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굿 셰퍼드> 에드워드 윌슨 요원의 CIA 특강
2007-04-12
글 : 신민경 (자유기고가)

CIA가 어느 항공사 이름이 아니란 건, 어린애들도 다 안다. CIA 요원들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백악관에 비밀정보를 갖다 바친다는 것도, 어림잡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할리우드에서는 CIA가 클로즈업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냉전시대의 핵이었고, 암살사건의 그림자였으며, 아주 가끔 폼나는 스파이였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10여년간 준비해왔다는 <굿 셰퍼드>는 의미가 깊은 영화다. CIA 40년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회에 한번 짚어볼까 한다. <굿 셰퍼드>에 나타난 CIA 창설에서부터 영화 속 CIA의 직업세계에 대해. 다음은 <굿 셰퍼드>의 베테랑 요원,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이 전하는 CIA 가상 오리엔테이션이다.

제군들, 안녕하신가.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여러분을 보니 모든 게 엊그제 일 같군. 처음엔 이 특강을 제의받고 많이 망설였다네. 구시대 사람인 내가 2000년대를 살아가는 제군들에게 무슨 충고를 해줄 수 있을지 막막했지. 솔직히 지금도 CIA는 국민들 사이에서 비호감이지 않나. <리크루트>의 제임스 클레이튼 요원(콜린 파렐)은 이렇게 말하더군. “CIA는 시민이 가장 위급할 때 잠만 자는 늙은 백인”이라고. 그동안 CIA가 대통령 직속하에 정보를 남용하고, 지나치게 비밀공작을 했다는 것은 시인해야 할 부분이야. 하지만 CIA가 밉다고 CIA 요원까지 미워하기엔,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지. 많은 CIA 요원들이 소리소문 없이 희생당한 걸 보면, CIA가 얼마나 무서운 조직인지 짐작이 가지 않나?

[1강] CIA 초기사

참고자료: <굿 셰퍼드> | 2006, 감독 로버트 드 니로, 출연 맷 데이먼·안젤리나 졸리·윌리엄 허트

앞으로 주어진 시간 동안, 나는 여러분의 환상을 깨부수는 이야기만 할 생각이다. CIA 요원의 삶은 명예나 부와는 거리가 멀어. 가느다란 신념만이 생사를 오가는 작전에서 여러분을 지켜줄 것이야. 강의를 듣고 도저히 이 3D 직종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주저없이 포기의사를 밝혀주기 바라네. 이런, 서론이 길었군. 오늘 강의는 여러분도 다 아는 것이겠지만, CIA 탄생으로 시작할까 하네. 아마도 내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룰 텐데, 내가 살아온 세월이 곧 CIA의 초기 역사나 마찬가지거든.

<굿 셰퍼드>

어린 시절, 아버지는 권총자살로 돌아가셨어. 꼬마였던 나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 다만 아버지가 늘 반복하시던 말씀은 기억이 난다. “신뢰란 상대방이 안전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절대 거짓말하지 마라.” 그 망할 신뢰, 거짓말이란 단어는 이후에도 내 삶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던 강박이었어. 만일 내가 예일대 시절 ‘스컬스 앤드 본스’(Skulls and Bones)란 비밀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아마도 문학도로 지내다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 동아리에서 미국에 대한 가치와 믿음을 키워갔고, 빌 설리번 장군(로버트 드 니로, OSS 수장이었던 도노반을 모델로 한 캐릭터)을 만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란 정보기관에 들어갔지. OSS는 CIA의 전신이었던, 문제의 그 기관이야.

OSS는 소련의 위협이 커지고 정보기관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설립된 기관이야. 1개 대대보다 1명의 정보원이 더 중요하다는 시대적 판단도 작용했어. 그리고 5년 뒤인 1947년,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기관 CIA가 생겨났지. 요원으로 활동할 당시, 나의 가장 큰 임무는 반카스트로군의 피그스만 침공 실패 원인이었던, 내부 스파이를 색출하는 것이었어. 매일 증거물인 테이프와 사진을 들여다보고, 용의자를 고문했지. 그 와중에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네. 아아, 하지만 그걸 내 입으로 이야기하기 괴로우니 자세한 건 <굿 셰퍼드>를 참고로 하게나.

어찌 됐든 CIA에 머물면서 나는 가족을 잃었고, 영혼이 망가져갔으며, 심지어 나와 하룻밤을 보낸 여자마저 제거돼야 했지.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당시 CIA는 냉전시대의 사생아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냉전시대가 끝나자 CIA의 필요성이 논란의 대상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나는 CIA가 하나님과 동기동창인 시기를 살았어. 신념과 허상 사이에서 매번 몸부림쳐야 했지.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제군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라네. 테러의 위협 때문에 업무량이 부쩍 늘었겠지만 말야.

[2강] 활동영역

참고자료: ① <썸 오브 올 피어스> | 2002, 감독 필 알덴 로빈슨, 출연 벤 애플렉·모건 프리먼 ② <스파이 게임> | 2002, 감독 토니 스콧, 출연 로버트 레드퍼드·브래드 피트 ③ <시리아나> | 2005, 감독 스티브 개건, 출연 조지 클루니·맷 데이먼

<시리아나>

제군들 중 혹시라도 CIA 하면, 007부터 떠오르는 이가 있나?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짐 싸서 나가주게. CIA 요원에게는 제임스 본드처럼 느끼하게 작업이나 할 여유가 없다. 게다가 모든 CIA 요원이 타지에서 첩보작전을 하는 것도 아니지. 몸으로 부딪히며 특수공작을 펼치는 요원도 있겠지만, 본부에서 데이터 분류 작업을 하는 것도 모두 CIA가 하는 일이라네. 쉽게 말하면 CIA도 내근직과 외근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 말이지. CIA가 하는 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24시간도 부족할 테니 자세한 건 제군들께 제시한 자료들을 참조해주길 바란다. 특히 소설가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 4종 세트’(<붉은 10월>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명령> <썸 오브 올 피어스>)는 강추일세. 그 중 <썸 오브 올 피어스>의 신참내기 잭 라이언(맷 데이먼)은 CIA 정책연구원으로, 핵폭탄으로 인해 3차대전이 야기될 위기를 막아냈지. 또 <스파이 게임>의 톰 비숍 요원(브래드 피트)은 중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다 죽을 뻔했고, <시리아나>의 밥 반즈 요원(조지 클루니)은 은퇴 직전 중동 산유국 왕자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맡았어. 아직 여러분은 이런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지 못하겠지만, 훗날을 위해 이것만은 명심해두게. 절대 잡히지 말게. 잡히면 한대 얻어맞고 끝나는 게 아니거든. 만약 제군들이 적에게 잡히면, CIA도 속된 말로 ‘생깔’ 것이야. 그런 각오쯤은 돼 있겠지?

[3강] CIA 요원 실무교육

참고자료: <리크루트> | 2003, 감독 로저 도널드슨, 출연 알 파치노·콜린 파렐

<리크루트>

40살 미만의 미국 시민권 보유자,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여야 하며 학점 우수자와 아랍어, 중국어, 한국어, 러시아, 터키어 등 외국어 능통자 우대…. 그 밖에도 CIA요원이 갖추고 있어야 할 요건은 엄청나지. 임무를 위해 언제든지 가족과 떨어져 이사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서는 심장에 굳은살이 박힐 필요가 있어. 앞으로 제군들도 이론교육을 마치고, 강도 높은 실무교육에 들어갈 것이다. 그 전에 실무교육이 어떤 것인지 대강이라도 알고 싶다면 <리크루트>를 참고하도록. 이 영화는 CIA 실무교육의 수학정석이며, 성문종합영어라네. 물론 교육내용은 시시각각 달라질 것이야. 잠시 <리크루트>에 나와 있는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지. 각종 언어교육은 기본이고(졸음 방지를 위해 교육생들의 의자에는 1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감아놓곤 하지), 변장술, 정보탐색, 방어기술, 맨손 제압, 심야의 헬리콥터 낙하기술, 육상, 수중폭파, 미행술 등 엄청난 양의 교육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성을 유혹하는 방법도 포함되지. 스파이 활동을 하려면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가 최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션이나 스타일 감각이 제로여선 안 된다. 정보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작업에 들어갈 준비가 돼 있어야 해. 그래, 거기 자네. 그런 긴장감 없는 패션은 곤란하다고.

[4강] 주의사항

참고자료: ①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 2002·2004, 감독 더그 라이먼·폴 그린그래스, 출연 맷 데이먼·프란카 포텐테 ② <미션 임파서블> | 1996, 감독 브라이언 드 팔머, 출연 톰 크루즈·존 보이트

<미션 임파서블>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정보다. 수많은 요원들이 진실을 좇다가 음모에 희생된 경우가 아주 많지. CIA는 워낙 거대해서 내부에서 속는 일도 비일비재해. 아무도 모른 채 제거되는 경우도 있지. 참, 이건 민감한 사안이니 오프 더 레코드로 진행하겠네. 잠시 녹음기를 꺼두게나. CIA가 가장 선호하는 요원이 뭔 줄 아나? 귀는 밝고 입은 무거운 자야. 거기다가 기억상실증까지 잘 걸린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런 점에서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의 제이슨 본 요원(맷 데이먼)은 아주 훌륭한 요건을 갖추고 있어. 게다가 제임스 본드처럼 툭하면 기물파손하는 일도 없으니! 그러나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본이 기억을 되찾으면서 문제가 생기지. 그는 부패와 살인죄를 뒤집어쓴 채 CIA와 아프리카 정치인들에게 동시에 쫓겨. 그의 박복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지. 러시아 하원위원 암살누명까지 쓰고 죽어라 쫓겨다녔다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해도, CIA란 거대한 조직과 싸우는 건 무모한 짓이야. CIA의 경우는 아니지만 IMF(Impossible Mission Force, CIA 소속의 가상 정보기관으로 봐도 무방할 듯)의 이단 헌트 요원도 내부 리더에게 배신당한 케이스지. 그의 보스 짐 펠프스(존 보이트)는 조직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부패한 자였어. 그러니 중요한 건, 어느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사실이야. 마누라도, 자식도, 조직도 믿어선 안 돼. 제군들 자신의 직관만 믿어야 함을 명심하도록.

[5강] 사생활 관리법

참고자료: ① <컨페션> | 2002, 감독 조지 클루니, 출연 샘 록웰·드루 배리모어 ② <위험한 사돈> | 2003, 감독 앤드루 플레밍, 출연 마이클 더글러스·앨버트 브룩스

<컨페션>

이런 3D 직업을 가지면서 인간답게 사는 게 가능하다 보는가? 박봉에 시달리며 충성해봤자, 죽으면 CIA본부 명예의 벽에 새겨지는 게 다라고. 그러니 기왕 CIA 요원이 되기로 결심했다면, 각자의 사생활을 최대한 현명하게 꾸려가는 게 중요하네. CIA 봉급이 쥐꼬리만하다는 건 이미 말했지? 아무리 보험과 연금혜택이 있다고 해도, 애들 교육까지 시키려면 턱없이 부족하지. 그래서 나는 제군들에게 <컨페션>의 척 배리스(샘 록웰)처럼 투 잡 인생을 권유하네. 그는 CIA 비밀요원인 동시에 인기 쇼 호스트로 살았지. 돈도 벌고, 나름 스펙터클하기도 하고. 어때? 괜찮지 않나? 다음으로 예를 들 자료는 <위험한 사돈>이야. 나는 한번도 내 직업이 CIA 요원이라고 떳떳하게 밝힌 적이 없어. 때론 부동산 중개인으로, 때론 청소기 세일즈맨으로 둔갑해야 하는 게 CIA 요원이라네. <위험한 사돈>의 스티브(마이클 더글러스)도 복사기 장수로 둔갑한 CIA 비밀요원이었지. 마지막에 신분을 발설하긴 했지만, 그는 소심한 사돈까지 끌어들여 임무를 완수하지. 그의 호쾌한 프로정신은 분명 높이 살 만하네. 이렇게 CIA 요원의 삶은 험난하지만,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건 없어. 나도 당시엔 괴로웠지만 어느새 은퇴하고 강의까지 하고 있지 않나. 자, 그럼 오늘의 특강은 이걸로 끝내고, 자세한 내용은 내가 최근에 낸 책 <도청이 가장 쉬웠어요>를 참고하도록. 지금 강의실 밖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꼭 한권씩 사가도록. 꼭이야~ 꼬옥!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