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따뜻한 소극(笑劇) <하나>
2007-04-18
글 : 김민경
우익적 시대착오에 반대하는 따뜻한 소극(笑劇). 의도는 분명하지만 치명타를 날리진 못한다.

사무라이의 지상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그것도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아름답게 죽어야 한다. 잠깐 피었다 우수수 져버리는 벚꽃은 오랫동안 사무라이의 죽음의 미학을 상징해온 꽃이다. ‘꽃보다도 더’라는 원제의 <하나>(はなよりもなほ)는 벚꽃에 덧씌워진 이런 죽음의 미의식에 의문을 던진다. 사무라이의 존재의의가 없어진 역사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 유쾌한 사극 <하나>는 벚꽃의 미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현대 일본에 여전히 도사린 미시마 유키오적 비장미를 전복하려 한다.

에도막부 말기, 지방 검술사범의 아들 소자 에몬(오카다 준이치)은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에도에 상경한다. 달동네에서 근근이 연명하며 원수를 찾아다닌 지도 벌써 3년째. 하지만 어쩐지 그는 복수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 이웃은 “자네처럼 심약한 사람은 복수가 어울리지 않아”라고 충고하고, 소자 자신도 복수보다 아름다운 과부 오사에(미야자와 리에)와 그 아들에게 더 마음이 쏠린다. 동네 아이들에게 글과 주산을 가르치며 평화로운 삶을 살던 어느 날, 원수 카나자와(아사노 다다노부)의 소재가 밝혀지자 더이상 복수를 미룰 수 없게 된 소자는 번민에 빠진다. 피바람을 피하고 싶지만 집안의 명령을 저버릴 수 없는 그는 달동네 이웃들과 함께 복수를 대신할 모종의 작전을 꾸민다.

일본사회의 집단 트라우마가 된 옴진리교 사건(<디스턴스>), 부모에게 유기된 네 어린이의 생존 실화(<아무도 모른다>) 등 현대 일본사회가 공유한 사회적 기억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처음 도전한 시대극 <하나>로 포스트 9·11 시대의 은유를 말한다. 사무라이들이 증오와 복수의 근거로 내세운 ‘무사도’나 ‘의리’ 개념은, 오늘날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워진 ‘애국’, ‘정의’, ‘대테러전쟁’의 허울을 연상시킨다. 주민들이 복수는 구시대의 것이라 믿다가도 몰락 무사들의 가미카제식 복수 사건에 환호를 보내는 대목은 낡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소비하는 최근의 우경화 현상을 직접적으로 빗댄다. 전작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경쾌한 터치의 소극이 사랑스런 기운을 발산하지만, 암담한 현실 속에서 생의 희망을 설득하는 연출의 묘는 전작 <아무도 모른다>에 비해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감독의 의도는 극 속에 자연스레 묻어나기보다 설명적인 대사에 의존하는 인상이다. 매력적인 조연이 펼치는 달동네의 인생군상도 흥미롭지만 이야기에 응집력을 더하지 못한 채 아깝게 흩어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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