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에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에 1 대 2로 지고 있던 8회말 1사 3루의 아슬아슬한 상황. 김재박은 방망이를 짧게 쥐고 번트를 가져다 댔다. 사실 야구 문외한들이 보기에 번트란 건 그리 폼나는 행위가 아니다. 게다가 그는 투수가 높이 외야로 던진 공을 맞추기 위해 다리 긴 양서류처럼 폴짝 뛰어오르고 말았으니, 팀을 승리로 이끈 깜찍한 포즈는 한국 야구사에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현재 LG야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김재박은 요즘도 “번트는 야구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장쾌한 홈런도 아니고, 시원한 안타도 아니고, 번트가 야구의 기본이라고?
더 나아가서, 박규태 감독은 <날아라 허동구>를 통해 “번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격”이라고 정의한다. 열한살짜리 허동구(최우혁)는 아이큐 60이 안 되는 학습 지진아. 동구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급우들의 컵에 물을 따라주는 일이다. 주전자만 보면 신이 절로 난다. 하지만 권위적인 학교는 특수학교로의 전학을 종용하고, 고민하던 아빠(정진영)는 해결책을 찾아낸다. 선수가 모자라서 해체위기에 놓인 야구부에 동구를 집어넣는 것이다. 이제 동구는 야구방망이로 공을 쳐내야만 한다. 공을 치지 못한다면 야구부에도 동구의 자리는 없다.
박규태 감독은 백치 같은 아이와 아비의 눈물을 쥐어짜며 관객을 속이려들지 않는다. 대신 그는 세상의 법칙에서 비껴선 아이가 야구라는 게임의 규칙을 터득하며 삶을 배우는 과정을 툭툭 끊어치는 번트처럼 보여준다. ‘번트의 미학’을 찬양하는 영화라고나 할까. 보기 드물게 담백한 영화 앞에서 감독이 궁금해졌다.
-아이가 있으신지.
=아직 몇 개월 되지 않은 아기다.
-개인적으로는 아이가 나오는 한국영화를 잘 못 견딘다. 그래서 <날아라 허동구>를 보기 전에도 걱정을 했는데, 기대와는 다른 영화여서 놀랐다. 아이 캐릭터가 위악적으로 보여지지 않는 한국영화는 오랜만이다. 일종의 장애아동 이야기지만 감정이 간결하다.
=촬영감독과 영화의 카메라워킹을 논의하면서 자주 언급했던 영화는 <아무도 모른다>였다. 다큐적이고 차갑고 섬뜩한 이야기지만 세상에서 그렇게 천진난만한 표정을 가진 애들을 이전 영화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았다. 의도적으로 눈물을 뽑아내면서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는 방식.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찍고 싶었다.
-대만 동화 <나는 백치다>를 영화화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
=제작사 소개로 보게 됐는데 캐릭터가 참 좋더라. 그래서 준비 중이던 <번트>라는 작품과 융합을 시켜본 거다. <번트>는 야구를 하고 싶어하는 소년이 번트로 우승한다는 소박한 이야기였고, <나는 백치다>는 발달장애를 겪는 아이의 이야기다. 접목하면 좋은 이야기가 나오리라 확신했다.
-준비 중이던 <번트>는 보통의 평범한 아이를 소재로 한 영화였나.
=막연하게 착한 아이가 주인공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캐릭터의 순수함을 관객에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고, 마침 <나는 백치다>가 튀어나온 거다. 실제 사례들을 접해보기 위해 단일 복지원이라는 특수학교에 2박3일로 자원봉사를 가기도 했다. 영화의 소재가 된 아이큐 60 이하의 학습지진아들도 있었지만 간질이나 자폐를 앓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자폐나 간질을 앓는 아이를 캐릭터하는 건 너무 쉬울 것 같았다. 그렇게 작위적인 것들을 거세하고 순수함의 결정체 같은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고 싶었다. 분노도, 화도, 증오도, 거울처럼 통과해버리는 아이 말이다.
-왜 하필 야구인가.
=동구 같은 아이는 집과 학교, 나아가서는 사회라는 장소의 규칙을 배워야만 한다. 그렇다면 야구라는 게임이 규칙을 가르쳐주는 첫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 야구에는 ‘홈’이라는 개념이 있지 않나. 그건 곧 ‘집’의 소중함과 연결될 수도 있다. 또 야구는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가면서 하는 게임이다. 인생이란 게 수비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거다. 때로는 공격도 해야 하는 거다. 동구에게 인생의 첫 번째 공격 행위가 바로 ‘번트’다. 그리고 번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격이다. 나를 디딤돌 삼아서 다음 타자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홈런보다 더욱 귀중한 행위다.
-하긴 다른 스포츠에서 번트에 빗댈 수 있는 행위를 찾을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날아라 허동구>는 ‘번트의 미학’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는 유독 성공한 사람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사회다. 번트를 성공시킨 사람에게는 스포트라이트가 돌아가지 않는다. 모두가 홈런만을 치고 싶어한다. 자신이 홈런을 못 치면 자식에게 홈런을 강요한다. 그것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다. 사실 희망은 홈런이 아니라 번트에 가까운 거다.
-원작은 짧은 에피소드들의 모음이다. 뭘 취하고 뭘 버리려 했나.
=일단은 대만 동화라서 교육 현실 자체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지능이 낮은 아이와 자기 자식을 같이 공부시킬 수 없다고 항의하는 에피소드는 영화로 옮겨왔을 때 좀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물론 분명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지만 좀 뻔하고 식상하지 않나. 싫었다 그런 건. 다만 동구라는 아이의 캐릭터 그리고 달리지 못하는 친구를 위해 운동장을 대신 한 바퀴 더 뛰어주는 에피소드는 살렸다. 사실 그 에피소드 하나만으로도 영화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원작의 주인공은 이미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다. 영화의 무대는 초등학교로 낮아졌다. 연령을 높였다면 영화는 좀더 잔인했을지도 모르겠다.
=좀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흔히 한국영화들은 감정적으로 센 것에 대한 집착이 있고, 그런 것이 관객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날아라 허동구>는 홈런이 아니라 번트 영화니까. (웃음)
-그래서 강한 모서리를 좀 깎아내려고 한 것 같은 인상이 있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쉽지 않은 방법이다. 각을 세워서 가는 게 더 쉽다.
-작위적인 각이 없어서 좋더라.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한국영화들은 대부분 쓸데없는 각을 세워대서 견디기 힘들다.
=나로서는 아이들과 작업하는 게 힘들더라. (웃음) 물론 힘들 거라고 예상했었다. 뙤약볕 아래서 열살짜리 애들 데리고 찍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한두명도 아니고, 반에 가면 40명 있지, 운동장에 가면 20명 더 있지. (웃음)
-아역배우들은 어떻게 캐스팅했나.
=현재 활동하는 아역배우들은 거의 다 오디션을 봤다. 근데 동구 역의 우혁이는 오디션 때 뭔가 느낌이 달랐다. 사실 연기학원 출신 아역들은 학원에서 가르친 대로만 한다. 그래서 대본에 없는 걸 즉흥적으로 시켰을 때 갈피를 못 잡는다. 우혁이는 그런 상황에서 뭐든 하려고 하더라. 감정이입도 자연스럽다. 10살짜리 애가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 반응한다는 건, (웃음) 피가 다른 거다 피가. 다만 주변에서는 우혁이가 알려지지도 않은데다 예쁘지 않다고 걱정들을 했다. 오히려 나는 예쁘지 않아서 좋았다. 그래서 주변을 설득하고 협박해서 관철시켰다.
-그래도 아역배우들의 집중력이 성인 같을 순 없지 않나. 지속적으로 역할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걸 어떻게 하나.
=영화를 찍고 있다는 느낌을 아예 안 주려고 노력했다. 영화현장에 있는 게 아니라 즐거운 놀이를 하고 있다는 기분을 계속 불어넣었다.
-그래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될 때는 밉지 않나. 열살이면, 아주 미울 때다. (웃음)
=서운해도 할 수 없잖아. 나 정말 서운하거든? 너 나한테 왜 이래? 그래봐야 소용없지. 같이 소주를 한잔 하면서 마음을 풀 수도 없는 일이고. (웃음) 대신 아이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애 많이 썼다. 촬영 전날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일부러 <스타크래프트>에서 져주기도 하고. 아이들은 게임에서 이기면 아주 좋아한다. 다음날 촬영까지도 기분이 연결된다. (웃음)
-아이와 좀 관련이 깊긴 하다. 97년 최진실 주연의 <베이비 세일>의 각본을 쓰면서 충무로에 들어왔으니까.
=그전에는 이장호 감독의 <천재선언> 제작부로 일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전이었는데, 영화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던 터라 충무로에서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웃음) <천재선언>이 끝나고 나서는 영화사 ‘영화세상’에 들어갔다. 아이템 회의를 하다가 <제로썸 게임>이라는 코미디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사람들이 소질이 있으니 계속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만화 <반쪽이의 육아일기>를 토대로 <베이비 세일>의 시나리오를 썼고, 캐스팅도 투자도 의외로 잘돼서 작가로 데뷔하게 된 거다.
-97년 여름시장에서 가장 큰 한국영화 아니었나. 최진실이 가장 잘나가던 때이기도 하고.
=영화는 무지 깨졌다.
-뭐랑 붙었나?
=<콘에어>랑 <쥬라기 공원>. (좌중 허탈한 웃음) <날아라 허동구>는 <스파이더맨 3>와 맞붙는다. 걱정된다. (웃음)
-지금와서 돌아보면 어떤 아쉬움들이 있나.
=영화적인 깊이가 부족해서 패턴화된 시나리오가 나오고 말았던 거다. 많이 아쉽다. <베이비 세일>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힘들었다. 감독이 유학파여서 한국적인 시스템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흥행작을 원하던 제작사와 투자사의 요구도 너무 많았다. 다음에 준비하던 황규덕 감독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엎어지고 나서 김의석 감독의 <북경반점> 시나리오를 썼다. 당시 김의석 감독은 <홀리데이 인 서울>로 왕가위 아류라며 두들겨 맞은 직후라 굉장히 힘들어했다. 나도 <베이비 세일> 때문에 힘들었고. 둘이서 초심으로 돌아가서 진지하게 만들자고 해서 만들었는데, 남들이 보더니 문예영화냐 그러더라고. 초심으로 돌아갔는데 초심에서 끝난 거지. (웃음)
-<달마야 놀자>가 시나리오작가로서는 최초의 성공작이었다.
=당시 <씨네21>에 시나리오작가 구한다는 광고가 있더라고. 그걸 보고 영화사 ‘씨네월드’로 갔다. 경력있는 작가가 왔다면서 너무 좋아하더라. 나 말고는 모두 작가 지망생들만 왔다던가. (웃음) 당시 사장이었던 이준익 감독이 칠판에 써 있는 제목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황산벌’ 등등 여러 가지 제목이 있기에 그중 ‘달마야 놀자’를 골랐다. 다들 또 너무 좋아하는 거지. 그 제목 고른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웃음)
-그럴 만도 하지 않나. 다른 근사한 제목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달마야 놀자’….
=나는 그 제목을 보는 순간 너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수오 마사유키의 <쉘 위 댄스> 같은 영화가 그려지기도 했고, 또 절이라는 공간 자체가 코미디 무대로서는 아주 새로울 것 같았다. 2주 걸려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는데, 테이블에 올려진 시나리오를 이준익 감독에게 스윽 밀면서 말했다. “백만짜립니다. (웃음)” 이준익 감독이 그러더라. (성대묘사를 하며) 아, 백만이 될지 십만이 될지 읽어봐야 알지! (좌중 폭소) 내가 시나리오를 그렇게 제출한 이유가 다 있다. 일단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옛날 사진을 보면 구로사와 아키라와 항상 일했던 일본인 작가가 다다미방에 무릎꿇고 앉아 있다가 비단에 싸인 시나리오를 스윽 밀면, 구로사와 아키라가 고개를 숙이고 그걸 딱 받는다. 그거 흉내낸 거였다. (웃음) 다행히 대박이 났다.
-감독님의 시나리오에는 여러 가지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특별히 튀는 캐릭터가 있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쉽게 발견되는 캐릭터들을 영화적으로 만드는 게 좋더라. 내 친구 중에는 트림하면서 말하는 애가 있다. 돈도 안 되는 재주지. 하지만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 재주는 있다. 그런 걸 관찰하는 게 재미있다.
-<날아라 허동구>는 ‘세상 누구에게나 재주는 있다’의 함축판이다. 메가폰을 잡겠다고 결정한 건 언제인가.
=연출에 대한 꿈은 항상 있었다. 집안이 넉넉지 않아서 연출부 생활을 못 견디겠더라. 당시 현장 막내로 들어가서 한 작품 하면 50만원 받았다. 학비도 직접 벌어야 했는데 그렇게 살 순 없었다. 그래서 시나리오작가를 하기 시작했고, <달마야 놀자> 때는 거의 매일매일 현장에 붙어 있었다.
-영화의 로케이션이 대단히 좋다. 한국영화에서 전주는 이미 인기있는 로케이션 장소지만, 어째 쇠락한 중소도시나 서울 변두리의 이미지로 특징없이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전주는 소박한 영화를 위한 훌륭한 무대다. 특히 동구 부자가 사는 한옥집은 이야기를 보조하는 거의 완벽한 장소다. 세트인가.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진짜 가정집이다. 촬영감독이랑 둘이서 기웃거리다가 찾은 곳이다. 더 놀랐던 것은 실제로 자폐아동을 키우는 집이었다는 거다. 이러저러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더니 부모님이 흔쾌히 집을 빌려주셨다. 그래서 5일 동안 가족 여행을 보내드리고, 그 기간 동안 집장면을 찍었다. 정말 세트 같지 않나? 미술팀 날로 먹은 거지. (웃음)
-영화의 키포인트가 되는 공간을 찾은데다 그곳의 주인이 자폐아동을 키우는 부모였다는 우연이란….
=운이지. (웃음)
-<날아라 허동구>는 동구가 번트를 성공시킨 뒤 홈에 세이프하면서 팀을 승리로 이끈다. 하지만 시나리오에서 동구는 결국 아웃당한다.
=사실 동구에게 중요한 건 승리도 실패도 아니고 그저 그라운드를 한 바퀴 완주하는 거다. 하지만 아이들이 영화를 본다면 동구의 아웃을 실패로 받아들일 것 같았다. 그리고 굳이 엔딩을 비관습적으로 틀어주는 것이 꼭 영화의 가치를 높이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차원적인 관점에서는 평이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다만 경기에 이어지는 에필로그는 없었더라면 더 간결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동구 부자가 결국엔 시골마을 같은 변두리 동네에 안착한 것으로 끝이 나는데, 그냥 경기가 끝나면서 닫아버리면 좋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동구가 번트를 성공시킨 이후로 희망과 자신감을 가졌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었다. 아빠와 아들이 전혀 다른 공간에서 새 출발하는 이야기로 끝내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음이 약한가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