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브라운관을 통해 보는 영화보다는 극장에 가서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를 좋아한다. 비단 영화 자체만이 아니라 그 영화를 보았던 그날의 분위기, 함께한 사람,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의 묘한 감흥…. 그 모든 것이 기억에 남아 훗날 그 영화를 떠올릴 때 자연스레 연상되는 추억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배우가 되고 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무엇입니까?”란 질문을 종종 받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라…. 좋게 얘기하자면 둥글둥글하고 나쁘게 얘기하자면 우유부단한 성격 탓일까? “…글쎄요…. 한 가지를 꼽기에는 좋은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라고 얼버무리곤 한다.
그런 내게 마음 깊은 곳에서 지워지는 않는 소중한 영화가 바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인 것 같다. 지금도 메인 테마만 들으면 저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회한 같은 것에 가슴이 메인다. 아직 인생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던 어린 나이에도 그 우수어린 멜로디가 말해주는 삶의 고통, 잡을 수 없는 아름다움, 가슴 저미는 이별 같은 것들을 막연히 느끼곤 했다.
한때 모 탤런트의 매니저를 했다는 우리 동네 괴짜 비디오가게 아저씨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서울에 가서 탤런트를 해보지 않겠냐는 달콤한 유혹을 하곤 했는데 그때 그 비디오가게 아저씨가 꼭 한번 보라며 추천해주었던 영화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였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배우의 열망에 불타오르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결과적으로는 아저씨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안방에서 숨죽이며 보았던 이 영화의 첫 추억은 가슴 시린 음악과 어린 배우들, 로버트 드 니로의 뛰어난 연기와 잊을 수 없는 눈빛,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뉴욕의 거리였다.
그때 처음으로 배우의 눈빛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는지, 영화에서 음악이 얼마나 감정을 움직이는지를 절절하게 느꼈다. 영화의 배경이 된 뉴욕은 무의식에서 동경의 도시로 남아 결국 뉴욕이라는 낯선 도시로의 여행으로 나를 이끌었고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를 갔을 땐 영화 속 어린 누들스 일행이 거리를 활보하던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운 좋게 배우의 길로 들어선 어느 날… 문득 잊고 있었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조용한 내 방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3시간3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처음에는 ‘과연 이 영화가 내가 봤던 그 영화 맞아?’라는 자책의 마음을 가졌지만 영화가 끝난 뒤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래, 18살 아이의 가슴에 담기에는 너무 벅찬 내용이었구나’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누들스’라는 한 남자 아니, 한 사람이 인생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꿈, 우정, 사랑, 배신, 욕망, 용서….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한 그릇 안에 담고 있으면서도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섞어가며 긴장감을 잃지 않는 편집. 영화적인 완성도와 더불어 인생을 들여다보는 대단한 통찰이 녹아 있는 감독의 시선. 다른 관점이 나올 수 있는 이 영화의 엔딩….
나이가 들수록, 생을 많이 알게 될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는 영화구나…. 내 필모에도 이런 영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나도 이런 깊이있는 감정들을 담아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해주었다.
지금도 가끔 이런저런 이유로 연기에 집중이 안 될 때나 개인적인 일로 힘들 때 누들스의 품에 안겨 “나, 넘어졌어~”라고 말하며 죽어간 막내 도미니크의 눈빛과 대사를 떠올린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도미니크는 죽는 그 힘든 순간을 겨우 넘어진 거라고밖에 표현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가 삶이 힘들다고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꼭 추천하고 싶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린 넘어진 것뿐이며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말과 함께…. 더불어 내가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