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배우들이 있다. 주인공이 아니라도 빛나는 배우들이 있다.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내보여주는 것 같은 빛나는 배우들이 있다. 조은지도 그런 빛나는 배우 중 한명이다. <눈물>(2001)을 시작으로 배우 생활 7년째. “터닝 포인트라고 불러도 좋을”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개봉 때 인터뷰를 못했던 것이 맘에 걸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촬영을 앞두고 핸드볼 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에게 자리를 청했다.
-감기 걸렸나봐요?
=네, 감기예요. 요즘에 걸렸습니다.
-(짧은 다리 꼬고 수첩을 뒤적이는데)
=얼마 전 <필로우맨>을 봤어요. 그 연극이 갑자기 생각나네. 약간 취조 분위기라서.
-(다리 풀고 겸손하게)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개봉 무렵에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정말요? 들은 적이 없는데. 누가 내 앞길을 막는 거야?
-핸드볼 연습 때문에 시간 내기가 어렵다고 들었어요.
=아, 3월 중순부터 시작했어요. 그때는 월·수·금에 했는데, 이제는 월·수·목·금에 해요. 웨이트 훈련하고 기초체력 단련하고 볼운동하고. 순서대로. 그리고 영화 속 장면 연습하고.
-공 막는 게 힘들지 않아요?
=공 맞는 게 힘들죠.
-멍도 드나요?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이제는 좀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막을 때마다. 아프지만 막았구나!
-핸드볼 골키퍼는 벌서는 자세로 손들고 있잖아요. 폼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난 멋있던데.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경기 뛰셨던 오영란 골키퍼를 뵌 적이 있어요. 그분이 저보고 볼은 너무 빨라서 보이지 않는다며 골키퍼는 폼이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웃음)
-골키퍼는 외롭지 않아요?
=처음엔 몹시 외로웠어요. 지금은 전직 골키퍼 선수와 함께 연습하지만. 전에는 다들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나는 맞기만 하고. 다들 두명씩 짝지어서 패스 연습하는데 전 혼자서 골대만 붙잡고 있어야 하고.
-지금은 공이 손에 잡혀요?
=모르셨구나. 왁스 발라요. 손에. 공이 착착 붙게끔. 그렇지만 충분히 훈련도 해야 한답니다.
-처음부터 골키퍼 수희가 맘에 들었나요.
=지난해 말에 심재명 대표님한테서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수희라는 인물이 덩치가 좀 있는 인물인데다 32살 노처녀거든요. 혹시 잘못 말씀하신 것 아닌가. 심지어 전화했어요. 수희 맞냐고. 근데 맞다고.
-살을 좀 찌웠나봐요.
=제 자신을 사육했죠. 꾸역꾸역 먹이고 또 먹이고. 근육 키우는 분말 먹고. 타먹는 거 있잖아요. 그거 뭐라고 하더라. 닭가슴살도. 하하. 나이는 32살 그대로 가요.
-연습 끝나고 회식하면 다같이 마셔야 하고. 분위기가 군대 같다는 말도 있던데요.
=그런 거는 없는데. 문(소리) 선배님을 비롯해서 다들 작품을 위해 자기 것을 버릴 줄 아는 진짜 선수들이에요. 핸드볼에선 골키퍼가 패스 못하고 수비 못하면 소리지르고 그래야 하잖아요. 캐릭터 좀 잡아보겠다고 연습할 때 멋대로 행동하겠습니다, 하고 양해를 구했는데 더 까불라고 하시니. 그래서 맘껏 지르죠. “아! 똑바로 해!”
-아직 서른이 안 됐는데 매번 30대 연기를 하는군요.
=무슨 말씀.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 처음이었는데. 영화 중간에 박광정 선배님이 저보고 “우리 나이에도 새 이빨이 나나요?” 그러잖아요. 찍으면서 되게 어색하긴 했죠. 흐흐.
-지금까지 맡아온 역할들을 보면 청승맞고, 엉뚱하고, 좀 튀고….
=통합적으로 부르자면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에요.
-작품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뭔가요.
=마음이 움직이냐 안 움직이냐.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전 소속사에서 되게 반대했어요. 근데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밀고 간 거죠. 나중엔 내가 아줌마여야 하나 그랬지만. 2년 전에는 제가 25살이었거든요. 근데 그런 생각하기 전에 마음이 이미 기울었는데요, 뭘.
-머리보다는 가슴, 가슴보다는 몸이 먼저 나가는 편인가 보죠.
=몸은 느려요. 대신 마음에 타∼악 오는 시나리오가 있어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를 봤다면 다들 한영애의 <누구 없소>를 부르는 장면을 말할 거에요. 일단 궁금한 건 노래를 원래 잘해요? 이유없이 잘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게요. 하하하. 촬영 전날 밤에 1시간 동안 연습한 게 효과가 있었나. 노래를 잘하진 못하는데 부르는 걸 좋아해요. 왜 특출나게 노래를 잘하는 가수도 좋지만 기교 안 부리고 톤 좋은 트인 목소리 있잖아요. 그게 아주 좋아요.
-술 마시고 찍은 장면인가요? 몹시 절절해서.
=음주는 잘 못해요. 대신 가무는 잘해요. 음주하지 않아도 음주한 것처럼 가무해요. 그런 달란트가 저한테 있답니다. 너무 잘 노니까 다들 취한 줄 알아요.
-(옆에서 장비 치우던 사진기자) 술 안 마시고 잘 놀면 (마약) 수사 들어온다던데?
=예? (10초쯤 지나서) 아, 하하하, 감기약은 꾸준히 복용하고 있죠.
-감독님이 그 장면에서 주문한 건 어떤 거였어요? 하여튼 그 장면 보면 20대 감성이 아니에요.
=왜 그러세요! 전 지극히 평범한 아이예요. 감정에 좀 충실하긴 하죠. 가끔 제가 어떤 부분에서 열정적인 데가 있어요. 그래서 가능했을 거예요. 10대 중에서도 그런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 소옥이 처음 등장하는 신에서 많이 놀랐어요. 인물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노출이라니. 예상치 못했던 등장방식이잖아요. 처음에 시나리오 봤을 때 어땠어요?
=귀엽던데. 우선 소옥이의 중식에 대한 마음이 표현되는 장면이잖아요. 원하는 걸 내보이고 사랑받으려고 애교 부리고 노력하는데도 중식이 외도하게 되면서 상처받고. 뒷이야기, 뒷감정을 생각할 때 적절한 설정이라고 봤어요. 어떤 한 남자를 갖고 싶어하는 소유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결국 상처받는 인물을 독특하게 보여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소옥은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인물 같아서 좋던데요. 남자들이 엔딩에서 쪽팔리면서도 옥신각신하는 건 자신을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소옥에서 빠져나와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소옥 안에는 상처가 많죠. 주위에서 저보고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가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들 하세요. 상처를 내보이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무난하게 한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내가 왜 말끝을 흐리지. 쩜쩜쩜, 괄호 열고 웃음이라고 써주세요. (웃음)
-터닝 포인트에 서서 데뷔작을 돌아보면 어때요.
=그때는 특별한 꿈도 없던 아이였어요. 임상수 감독님이 가만 서 있는 제 다리를 움직이게 해주신 거고. 넌 천재야 그러시면서. 왜 아역배우들 엄마가 다독이듯이. 나중에 <그때 그사람들> 때 뵈었는데 아무래도 넌 천재가 아닌 것 같다고 해서 충격받았지만.
-요즘도 시나리오 써요?
=써놓은 거 세 작품 돼요. 쓰다 만 건 6, 7편 되고. 시나리오 보면 여백이 많잖아요. 거기에 낙서하다가 한번 써볼까 해서 한 건데. 제 자신의 이야기를 미화해서 꾸미는 게 재밌더라고요. 뭐 나중에 연출하겠다, 주인공 하겠다는 건 아니고. 글쓰면 마음이 편해져요. 컴퓨터와 의자 사이에 나를 밀어넣으면 안정되죠. 또 뭔가 표현하면 속시원하잖아요. 연기를 계속하려는 것도 그 때문일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