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구성된 피해의식, 부질없는 구원의 논리
2007-06-14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밀양>에 대한 만장일치 찬사에 이의를 제기한다

추방인가? 신애는 딸의 자리와 아내의 자리(나중에는 엄마의 자리에서도)에서 밀려나 밀양이라는 비밀의 햇볕 속으로 왔다. 그녀는 꼬리 잘린 과거를 지녔다. 영화는 출발한 곳을 보여주지 않고, 이렇게 신애가 도착한 곳에서 시작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강변하지만, 그녀는 과거의 풍문에서 떠나왔거나 혹은 쫓겨났다.

<밀양>의 신애는 흔한 검정 구두를 신는, 가르마를 타지 않는 부스스한 여자다. 이 여자가 고통을 겪는다. 고통은 그것이 극적으로 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 상(像)이 그려지지 않으며, 좀처럼 언어화될 수 없다. 이 낯설고 이질적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영화는 인물이 갖는 적의의 실체를 모호하게 흐려놓았다. 그렇다고 악의 불가지성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게 무관심하다.

아이의 우울증으로 은폐된 신애의 광기

신애라는 이방의 여자가 도착한 밀양이라는 도시는 풍문과 신앙의 공간이다. 미용실과 거리와 교회 등 곳곳의 시정에선 신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녀에 대한 풍문들이 유통된다. 밀양 사람들에게 그녀는 좀 이상한 여자, 불온한 여자, 이방의 여인이자 과부이다. 그녀가 토착민들에게 ‘이웃’의 자리에서라도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일종의 위장 전술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신애는 거짓말을 한다. 돈이 많은 듯, 그래서 땅을 사려는 듯. 그렇다고 그녀가 땅을 사려는 이유에 전적으로 진실이 결여되어 있는 건 아니다. 마치 밀양 외에 다른 어떤 곳도 없는 양, 신애에겐 여기가 종점이다, 그녀에겐 안주할 상징적 영토가 필요하다. 그런데 신애라는 여자가 위험한 까닭이 하나 더 있다. 영화의 초반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미친 여자다.

남편의 외도와 죽음 뒤 신애는 새로운 삶을 찾아, 이상하게도 망각하는 것이 더 편할 남편의 고향 밀양에 왔다. 그녀는 정상적인 애도를 마치지 못한 채, 일종의 ‘오인’의 상황에 빠져 있다. 이 오인은 의도적이거나 혹은 신념의 차원의 것으로. 즉 남편은 나와 아이를 배신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착오적 신념은 영화 후반부에서 신애의 광신과 연관될 것이다. 어쨌든 신애는 겉으로 멀쩡해 보인다. 자신에 관해 다소 과잉 방어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해도 적어도 비정상은 아닌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 문제는 오히려 아들 준에게 있다. 웬일일지 아이는 숫기없고 우울하다. 자기 속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원고에 쓰인 내용으로 웅변을 하는 아이. 마치 자신의 대사를 읊고 있는 듯이 삶을 연기하고 있는 신애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나는 여기서의 아이가 신애가 지닌 증상의 대리물이라 보았다.

남편의 외도와 죽음이라는 심리적 파열을 겪었음에도, 신애는 자신의 증상을 드러내지 않는다. 삶에 대한 의지가 너무도 강하다. 그녀는 애도를 생략하고 신념과 착각으로 이를 은폐한다. 그래서 증상은 아이의 우울증으로 나타난다(물론 신애의 증상이 얼핏 부상하기도 하는데, 영화의 도입부에 신애가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앙칼지게 소리쳤던 것을 기억해보자). 증상을 은폐하는 기호였던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서서히 신애의 광기가 가시화하기 시작한다.

오직 광인만이 하늘과 대화한다

개봉 뒤 <밀양>은 인간의 고통과 구원에 관한 ‘윤리적인’ 영화라고 상찬받아왔지만, 이 와중에 모호한 윤리적 판단들이 유보되었다. 가령 아이와 유괴에 관한 것이 그러한데, 서사를 위해 유괴라는 소재를 차용했을 때, 피학과 외설이 쉽게 수용되면서 관객의 감정 이입을 이끌어내는 장치로 전유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다. 다행히 <밀양>은 이 아슬아슬한 지점을 피해갔다. 범인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은 가상의 유괴범을 증오하는 것에서 차단되었으며, 아이의 훼손된 신체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설적 욕망이 작동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위험한 부분은 남아 있다. 바로 아이가 신애의 증상으로 물신화했다는 점이다.

아이가 상상적 매개물이라면, 아마도 그녀의 증상은 영화의 시작 이전에 시작된 것이다. 즉 신애의 광기가 유괴범에 대한 용서라는 미명으로 위장된 ‘사적 복수’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시작된 것이라는 말이다. 고통의 결과 미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신애는 미친 여자다. 이는 영화의 첫 시퀀스가 아들 준이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시작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후에 이 시선은 신애의 시선으로 바뀐다. 오로지 광인만이 하늘을 인식하고, 하늘과 대화한다. 그녀의 광기가 아이로 대체되어 잠재되었던 것일 뿐, 처음부터 그녀는 멜랑콜리악(melancholiac), 즉 우울증 환자였다. 여기서 아이라는 대상은 신애의 억압된 심리 상태의 징후이자, 동시에 물신으로 기능한다.

감독은 이 영화가 하늘에서 시작해서 땅에서 끝나는 영화라고 한다. 여기서 하늘이란 무엇일까. 신애와 하늘의 숏 리버스 숏을 통해, 카메라는 사실상 하늘이 초월적이고 억압적으로 편재하는 햇볕의 근원임을 보여주며, 신애가 이에 분노하는 것을 구성해낸다. 이 초월적인 힘은 고대 비극에서처럼 윤리적 의무를 부여하면서 주인공을 분열증으로 몰아가는 힘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애가 겪는 비극이 운명을 거스르는 그녀의 하마르티아(hamartia) 때문인 것도 아니다.

남편의 배신과 죽음, 그리고 오로지 아이밖에 없던 그녀에게 또 닥친 아이의 상실. 이러한 일련의 파탄이 근거없이 일어날 리 없다는 신념은 하늘이라는 초월적 존재자를 원한의 ‘근거’로 구성해낸다. 극심한 고통에 원인이 없을 리 없다, 그렇다면 삶은 말이 안 되니까. ‘하늘, 네가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너그러운 햇볕을 쏟아내고 있다니, 참을 수 없어’라는 듯이 신애는 하늘을 흘겨본다. 자신의 피학적 경험을 희생으로 전치시키고, 하늘을 그 희생과 고통의 원인으로 만든다.

영화 속에 영원히 고립된 여자

신애는 원래 미친 여자며, 처음부터 하늘과 대치적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강조컨대, 하늘은 신애가 구성한 상상적 허구다. 이창동 감독은 처음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읽었을 때, 그것을 광주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씨네21>, 602호). 정치적으로 화해하자는 공론화 작업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한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이 ‘누구’에 대한 억압적 인식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하늘이다. 그래서 기독교라는 소재는 부수적이다.

작용자로서의 역사 혹은 어떠한 힘이 있다는 인식, 그것이 인간들을 피해자로 만들며 또 너그럽게 인간보다 먼저 용서하고 망각시킨다는 인식. 바꿔 말하자면, 하늘은 신애를 피해자로 돌린 감독이 만들어낸 허구적 실체다.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하늘의 숏이 불쾌한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역사, 진리, 정치 혹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초월적 질서가 인간을 내려다본다. 그 시선하에서 인간은 피해자가, 고통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오아시스>에서도 역시 종두와 공주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 역시 피해자들로 소환된 것이다). 초월적 타자에게 희생당했다는 의식이 구성된 것이라면, 이 영화가 말하는 구원의 논리도 부질없어진다. 시크릿 선샤인은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신애는 공감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그녀는 그렇게 영화 속에 고립되었다.

어쨌든 신애는 다시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자른다. 밀양에서 신애는 아마도 완전한 이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적당한 호의와 적당한 적의 속에서 완전히 그 사회에 흡수되지 못하는 약간 미친 이방 여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신애(信愛), 믿음과 사랑, 그러나 소망없는 여자. 모든 이방인들은 광인들이다. 그들은 법과 도시와 질서 밖에 있으며, 토착민들의 균질적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불안정한 존재자다. 다만 종찬은 매우 이질적 토착민이다. 심심타파적 일상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생일날 혼자 두루치기를 먹는, 마흔이 다 되도록 엄마의 잔소리 전화를 받는, 늘 신애를 졸졸 따라다니는 이 쓸쓸한 남자 역시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내게만 그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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