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수난의 장면은 길지 않아 네 복음서 속에서 기껏해야 두어개 장(章), 서너쪽 분량일 뿐이다. 그나마도 모두 AD 60년 이후에 기록된 것들. 물론 추종자들에게는 분명 잊지 못할 체험이었겠지만, 복음서가 쓰였을 때쯤에 예수의 수난은 이미 30여년 전의 희미한 기억일 뿐이었다. 그나마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텍스트로 된 기억. 그리하여 글자를 모르는 민중을 위해 중세 장인들은 ‘읽는’ 텍스트를 ‘보는’ 이미지로 번역해야 했다.
중세의 영화
레싱의 구분에 따르면 공간예술은 장면을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시간예술은 서사를 시간적으로 전개한다. 영화는 사진에 움직임을 주어 그것을 시공간의 예술로 만든다. 하지만 아직 그림이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어땠을까? 성서 텍스트를 이미지로 번역하려 할 때 중세의 장인들은 매체의 차이에서 오는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중세에도 나름대로는 그림에 움직임을 주는 방법이 있었다.
15세기의 목판화를 보자. ‘피에타’ 주변으로 네모 칸들이 보인다. 상단 중앙의 네모 칸에 예수의 초상이 보인다. 십자가를 진 예수 얼굴의 땀을 닦아주었다는 ‘베로니카의 수건’이다. 하단 중앙의 네모 칸에서 가롯유다가 예수에게 입맞춤하며 그를 잡으러 온 이들에게 누가 예수인지 알려준다. 바로 왼쪽으로 예수의 양팔과 다리를 십자가에 달았던 세개의 못, 반대편으로는 예수의 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로마 병정들이 던졌다는 주사위가 눈에 들어온다.
유다가 예수를 팔고 받은 은전 30냥. 베드로가 예수를 세번 부인하자 울었다는 새벽닭. 예수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든 채찍. 네모 칸에는 그밖에도 수많은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피에타상 좌우로는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단 막대기가 보인다. 한마디로 이 한장의 목판화에 예수 수난의 전 장면이 집약되어 있다. 이것이 공간예술인 판화에 시간 축을 따라 흐르는 내러티브를 담아내는 방법이었다.
차가운 이미지, 뜨거운 상상력
목판화의 네모 칸은 오늘날의 ‘만화’를 연상시킨다. 중세인의 머릿속에서 네모 칸 속의 그림들은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였다. 목판화의 그래픽은 해상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중세인의 머릿속에서 저 그림들은 오늘날의 ‘실사영화’처럼 사진의 생생함을 가지고 살아 움직였다. 우리와 달리 중세인은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리하여 부재하는 움직임과 모자라는 해상도를 상상력으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목판화 속의 네모 칸은 모두 스물여섯 개. 이를 초당 24프레임이 돌아가는 영화로 환산하면, 고작 1초를 조금 넘는 알량한 분량이다. 하지만 중세인들은 우리보다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래서 이 초(超)저해상의 단편적 영상 몇개로 그들은 예수 수난의 사건 전체를 생생하게 떠올릴 능력을 갖고 있었다. 중세인들이 이미지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웠다면, 현대인들은 거꾸로 상상력의 빈틈을 이미지로 채우는 걸까?
가령 같은 제재를 다룬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자. 이 영화는 뜨겁다. 고해상의 이미지에는 공간적 빈틈이 없고, 초당 24장의 프레임은 이미지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지운다. 맥루언의 말대로 정보의 밀도(해상도)가 높으면 관객의 참여도(상상력)는 떨어지는 법. 이미지가 뜨거우면 상상력은 식는다. 중세의 목판화는 차갑다. 관객에게 앙상한 뼈대의 빈틈과 간극을 스스로 채우라고 요구한다. 이미지가 차가울 때 상상력은 뜨겁다.
현상학적 구체화
텍스트에는 빈틈이 많아 영화의 감독들은 늘 현상학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똑같은 소설을 읽어도 저마다 장면을 다르게 상상하듯이, 똑같은 대본으로 감독들은 저마다 다른 영화를 만든다. 시나리오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것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구체화’에 해당한다. 이제까지 예수의 생애를 제재로 수많은 영화들의 존재는 복음서라는 동일한 텍스트를 감독들이 저마다 다르게 구체화해왔음을 시사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시각적 구체화의 가장 뜨거운 예다.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작품의 시간대는 예수 처형 직전의 24시간으로 한정된다. 이로써 이미지의 밀도가 극도로 높아진다. 여기서 예수는 아람어로 말하고, 빌라도는 라틴어를 구사한다. 당시의 유대 상황을 되도록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의도다. 이 영화적 자연주의가 관객에게 성서의 추상적 문자열을 생생한 시각적 현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하지만 복음서의 기록만으로 두 시간의 서사를 채울 수는 없는 일. 그 간극은 다른 문헌들로 이어진다. 그 하나가 안네 카테리네 에머리히(1774∼1824)의 환상을 기록한 <그리스도의 비통한 수난>. 이 독일 수녀의 환상은 유감스럽게도 당시 독일에 퍼져 있던 반유대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빌라도를 철학자로, 유대인을 악마로 묘사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에머리히의 차용은 반유대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그저 ‘현상학적 구체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시각적 재현에서 촉각적 쇼크로
성서의 기록은 싱거울 정도로 간략하다. “예수는 채찍질하고”(마태, 마가), “때려서 놓으리라”(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요한). 이 추상적인 언어가 멜 깁슨의 영화에서는 참혹할 정도의 구체성을 얻는다. 카메라는 로마병정의 채찍이 예수의 등에 닿는 순간을 클로즈업하고, 채찍 끝에 달린 고리에 예수의 살이 찢겨나가는 모습을 그대로 노출한다. 여기서 현상학적 구체화는 폭력적 수준에 도달한다.
그리스인들은 잔혹한 장면은 무대에 직접 올리지 않고 대사로 처리하곤 했다. 그렇게 폭력을 절제했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phobia)를 비극의 효과로 꼽았다. ‘채찍질하더라’ 같은 추상적 표현에서조차 전율을 느꼈던 중세인들이 이 영화를 봤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쇼크를 받아 임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중세예술 속의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도 죽음을 죽인 승리자로서 신적 위엄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 말에는 달랐다. 그때 예수는 종종 만신창이로 묘사되곤 했다. 이를 ‘페스트의 책형’이라 한다. 가령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의 망가진 예수의 몸은 웬만한 잔혹함에 익숙한 우리 눈에도 충격적이다. 멜 깁슨은 이 중세말의 도상적 전통을 이어간다.
시각적 뜨거움은 곧 신체에 가하는 촉각적 쇼크로 화한다. 못이 손바닥을 뚫고, 몸을 매단 상태에서 십자가를 앞뒤로 뒤집어 튕기고, 옆구리로 창이 들어가 물과 피를 흘리고, 새가 날아와 도둑의 눈알을 파먹고, 자살한 유다의 옆에서 짐승의 고기가 썩어가고. 이 극단적 자연주의는 예수의 등으로 지나간 채찍처럼 관객의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 왜 이렇게 잔혹해야 했을까?
스티그마타?
‘그리스도 수난’의 모티브가 기독교 도상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십자군전쟁 당시. 한마디로 그것은 예수의 희생을 내세워 이교도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정치적 선동이었다. ‘수난’의 모티브는 17, 18세기에 대대적으로 부활한다. 교회의 벽을 잔혹한 순교장면으로 장식했던 바로크 예술은 신교도에 대항하는 가톨릭 반동 종교개혁의 시각적 선동이었다. 이 영화 역시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충실히 따른다.
예수의 몸에 잔혹한 채찍질을 가하는 감독의 사디즘은 실은 종교적 마조히즘의 뒤집힌 형태가 아닐까? 지금도 가톨릭 신도들은 예수의 고난을 배우려고 무릎으로 자갈밭을 기며 수난의 14처를 돌고, 일부 가톨릭 국가의 광신도들은 부활절마다 직접 십자가에 못박히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곤 한다. 멜 깁슨은 영화로 그 일을 하는 셈이다. 자신을 고통받는 예수와 동일시하고픈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생긴 걸까?
어쨌든 중세말부터 예수의 고난을 깊이 명상하다가 정말로 신체에 고통을 느끼는 이들이 나타난다. 심리적으로 전이된 이 통증은 때로 신체상의 변화를 동반하기도 했다. 즉 발과 손바닥에 예수의 것과 똑같은 못 자국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성흔(stigmata)이라고 한다. 영화로 제 몸에 성흔을 남기는 멜 깁슨은 현대의 성 프란체스코다. 그뿐일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관객의 신체에 충격을 주어 예수의 고통을 전하고, 관객의 영혼에 상처를 주어 성흔을 남기려 한다. 이렇게 영화 매체의 촉각성을 종교적 메시지의 전달에 사용하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 여기서 영화의 인덱스적 효과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관객의 몸에 새기는 현상학적 장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