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완소 김검, 두번째 사랑에 빠지다
2007-06-15
글 : 강병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히트> <두번째 사랑>의 하정우

‘완소 김검’의 얼굴에는 어느새 수염이 자라 있었다. “면도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놔둬봤다”며 무심히 말하는 표정에서 여러 작품의 하정우가 겹쳐졌다. 후임병이자 친구인 승영의 사연을 외면하던 태정의 표정(<용서받지 못한 자>), 얼굴을 바꾸고 나타난 애인을 바라보던 지우의 매몰찬 표정(<시간>), 그리고 작전상 차수경에게 차갑게 굴던 재윤의 표정까지(<히트>, TV). 돌이켜보면 하정우란 배우의 얼굴은 웃음과 눈물을 지울 때 가장 도드라져 보이곤 했다. 미국으로 날아가 촬영한 <두번째 사랑>에서도 그는 딜레마에 빠진 남자가 지을 수 있는 애처로운 무표정을 보여준다. 차이나타운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한국인 지하는 여자친구를 미국에 데려오기 위해 돈 되는 일을 찾아다니는 남자다. 어느 날 그 앞에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미국 여자 소피가 나타나 거부해야 하지만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해온다. 돈을 줄 테니 아이를 가질 능력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임신시켜달라는 것. 소피와 잠자리를 하면서도 여자친구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지하의 표정은 어쩔 수 없이 딜레마의 고리를 밟은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는 듯 보였다. “지하는 책임감이 강한 남자다. 자존심을 버리고 몸을 파는 것이지만, 그로서는 자존심을 버림으로써 여자친구를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하도 어쩔 수 없이 지독한 사랑에 빠지면서 다양한 표정을 띠게 된다. 담요의 보풀을 뜯으며 소피를 기다릴 때, 그녀의 임신 소식에 축하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소피의 귀에 그녀는 알아듣지 못할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그의 무심한 표정은 조금씩 색깔을 달리한다. 소피를 그리워하는 지하의 표정을 보고자 홍대 뒷골목에 하정우를 불러 세웠다. 골목을 지나치는 여고생들은 “완소 김검!”을 외쳤고, 하정우는 화답없이 감정에 몰입했다. 그의 무심한 표정이 다시 피어올랐다.

-김진아 감독은 <용서받지 못한 자>의 태정을 보고 캐스팅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캐스팅 제의가 많이 들어오긴 했겠지만 미국에 가서 할리우드 여배우와 영어로 연기해야 한다는 게 부담도 많이 되었을 텐데.
=당연히 부담됐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도전해보고 싶던 것이었고, 영어로 연기하는 것도 많은 부족함을 느끼긴 하지만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연기란 건 이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없다. 부담스럽기보다는 용기를 내서 도전하고픈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김진아 감독과는 어떻게 작업했나.
=미국으로 가기 전 두달 동안 전화통화를 많이 했다. 꼭 펜팔하는 느낌이었다. “정우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감독님은 뭐 좋아하세요?” “정우씨는 취미가 뭐예요?” “감독님은 무슨 운동 좋아하세요?” 이러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보통 두달이 남았으면 다른 감독들은 빨리 배우가 그려내려는 캐릭터가 어떤 것인지,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텐데 그런 것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차근차근 알려고 하시더라. 나는 <구미호 가족>이나 <시간>의 스틸사진과 평소 찍은 스냅사진을 보내고 감독님은 또 그걸 보면서 옷은 이런 옷이 좋겠고, 피부 톤은 어떠하면 좋겠고, 살은 좀 빼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등의 의견을 보내왔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감독님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감이 쌓인 듯하다.

-김진아 감독이 말하길 시끄러운 현장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더라.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 있었느냐고 묻던데.
=한국인이 나밖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오히려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매우 심심하고 고독했다. 한국에서처럼 상대배우와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기도 어려웠고. 소피(베라 파미가)를 만나는 건 시나리오와 촬영장에서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걸 철저히 이용하려 했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더 상상하고 내뱉으려 했고, 그래서 촬영장에서 만나면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베라 파미가는 당신의 연기에 매우 감복했다던데, 따로 만나기는 힘들었나.
=남자친구가 항상 같이 다닌다. 현장에도 자주 놀러 오고. (웃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미안함이나 질투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결정적인 이유겠지. (웃음)

-나우필름 이준동 대표 말로는 베라 파미가가 “난 그저 하정우의 옆에 있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더라.
=고단수인 거다. 자신을 낮추면서 오히려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는 멋진 배우지 않은가. (웃음)

-생각해보면 백인 여성과 비백인 남성의 베드신이 등장하는 흔치 않은 작품이다.
=이제 찾아올 때가 된 것 아닐까 싶다. 요즘 뉴욕 맨해튼에서도 백인 여성과 아시아 남성 커플이 하나의 트렌드라더라. 영화도 백인 투톱 영화에서 백인과 흑인, 흑인과 동양인으로 점점 옮겨오지 않았나. 세계적으로 아시아 인구가 늘면서 이제는 미국인들도 그런 상황을 거북하지 않게 보는 것 같다. 혹시나 지금은 무리처럼 보여도 나중에는 더욱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실제로 그런 제의를 받으면 어떨까? 돈을 받고 섹스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글쎄, 나는 비위가 약해서 그러진 못할 것 같다.

-배우의 성장이란 측면에서 봤을 때는 <용서받지 못한 자> <시간> 등의 작품은 당신에게도 많은 걸 남겨주었을 듯싶다. <두번째 사랑>을 하면서 배우 하정우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리액션이 아닐까.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자주 보지도 못하는 배우와 연기했지 않은가. 누구 말대로 연기의 전부는 리액션인 것이고 그래서 호흡이 중요한 것이다. <두번째 사랑>은 특히나 소통이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대배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눈과 귀와 코와 피부로 느껴야 했다. 하나의 캐릭터가 완성되는 과정에서도 리액션의 중요성은 큰 것 같다.

-지금까지 출연한 필모그래피를 보면 대중적인 인기도 얻으면서 여러 가지 작품에서 연기를 보여주려는 욕심이 먼저 보인다.
=어떤 캐릭터를 만난다는 건 운명적인 것이다. 작품을 선택하는 내 기준은 일단 내가 누울 자리인지 보는 것이다. 과연 내가 표현해낼 수 있는 캐릭터인지 파악하는 게 나에겐 중요하다. 예를 들어, 만약 오락프로그램에서 눈물연기를 보여달라고 하면 때려죽여도 못할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고쳐야 할 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웃음)

-그러고보니 오락프로그램에서 자주 보지 못한 것 같다.
=<구미호 가족> 때 <야심만만>에도 출연했었는데. (웃음) 글쎄, 내가 서야 할 자리가 아닌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을 써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고. 코미디를 매우 좋아하는데, 내가 만약 다른 곳에서 나의 희극적인 모습을 써버리면 나중에는 설득력이 별로 없을 것 같다.

-<히트>의 김재윤 검사는 어떻게 만들었나. 귀여운 면도 있으면서 강하게 밀고 가는 분위기가 ‘완소 김검’에 이르게 했다.
=감정에 솔직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떻게 하면 차수경을 웃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 같다. 특별히 멋지게 보여야 한다는 의식은 없었다. 김재윤은 천진난만하면서 솔직한 친구다. 냉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존심을 구겨도 구긴 게 아닌 것으로 느낄 남자로 봤다.

-드라마를 보신 아버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던가.
=아버지는 뭐 크게 말씀하신 건 없었다.

-평소 작품 선택이나 조언을 받는 일은 없나.
=그런 건 없다. 그저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시는 것 외에는 큰 말씀이 없으시다. 작품 선택에 대해서도 별 말씀을 안 하신다. 그런 건 매니지먼트 회사와 상의한다. (웃음)

-가족, 친척들이 모두 배우고 모델이라더라.
=그래서 특별히 배우라고 해서 대우받은 건 없다. (웃음) 그냥 동생이고, 조카이고, 사촌형제일 뿐이지.

-재벌 2세나 실장님 캐릭터 제의도 많이 들어왔을 것 같은데.
=<히트>를 하기 전에는 정말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도 없었고, 뭔가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댄디한 모습을 브라운관에서 쉽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

-어렸을 때 그렸던 배우는 어떤 모습이었나.
=초등학생 때는 그냥 영화배우를 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다 커가면서 연극을 하게 됐고, 또 그러면서 어떤 연기가 좋다, 어떤 영화가 좋다는 게 구체화됐다. 아무래도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 나의 장점이 뭔지 단점이 뭔지 지금도 찾고 있다.

-그래도 연극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배우로서 내 자신을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배우가 자기 몸이 어떻고, 실루엣은 어떻게 나타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아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세심한 반응 하나하나를 아는 건 군인이 무기제원을 아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가지고 몇 개월씩 공부하고 연구하던 과정이 그런 토대를 마련해준 것 같다.

-다음 작품은 윤종빈 감독의 <비스티 보이즈>라고 들었다. 호스트를 연기하는 건가.
=호스트 마담 역할이다. 지난해 여름부터 윤종빈 감독과 준비하고 있다. 실제 전직 마담도 만나봤고, 서양 귀족에 가까운 행동양식을 공부하고 있다. 그들은 여자를 대하는 매너나 주도, 차를 마실 때의 예절 같은 게 굉장히 멋있는 남자들이다. 일단 최고의 선수니까. 그런 면들을 드러낼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다.

-<용서받지 못한자>는 지금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찍을 때는 너무 힘들었다. 과연 이게 극장에 걸릴 수 있을까. 혹은 우리가 맞게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고민들이 많았다. 그래도 그때는 너무 행복했다. 그런 고민들이 좋은 결실을 만들었겠지. 무엇보다 윤종빈 감독이나 나나 사회에서 당당히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준 작품 아닌가. 그래서 <비스티 보이즈>에 대한 기대도 크다.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빨리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없다. 예전에는 빨리 결혼해서 안정을 찾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어졌다. 오히려 뭔가 더 해보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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