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_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순정이라는 말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vs 김혜리_ “애니메이션인데도 ’연기’가 좋았어요”
이번주만 같다면 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시간이 딸리는 소녀 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시간이 딸리는 소녀님(이하 딸리는)의 말: (-.-) (_*_)(-.-)(_*_) (*_*) 데구르르 콰당!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주만 같다면 님(이하 같다면)의 말: 오늘, 사상 최강의 작명이십니다. 그려…. ^^
딸리는: (멍든 데를 만지며)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자마자 떠오른 닉네임이에요. 그런데 눈물 콧물 훔치며 보는 통에 생각은 많이 못하고 봤네요. -_-
같다면: 앗, 울기까지? 어떤 장면이었나요?
딸리는: 주인공 마코토가 친구 치아키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내다가, 그가 곁에서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꼭 갓난아기처럼 무방비하게 흐느끼잖아요. 많은 사람들처럼 저도 첫사랑이 왔다 갔다는 사실을, 내내 자각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끝났을 때야 비로소 알았거든요. 어떻게 내가 가졌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실감이 그토록 클 수 있었는지 지금 돌이켜봐도 놀라워요.
같다면: 오늘 토크는 각각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상담하는 자세로 해야 할 듯. ^^
딸리는: 첫사랑은 , 연애 없는 실연이랄까, 그런 식으로 경험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요? 뭐가 뭔지 모르는 사이에 슥 몸을 뚫고 지나가는 거예요.
같다면: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도 생각나네요. 줄리아 로버츠가 빤히 곁에 두고도 남자를 잃게 된 순간에야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잖아요.
딸리는: 그런 경우 연애의 추억 없이 대뜸 이별만 던져지니까 “이것은 내게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라는 비애가 가장 깊이 오래 남을 거예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슬픔은 거기에 있어요. 무심한 빈 교실, 복도의 사물들을 보여주는 숏에도 그런 감정이 배어나요.
같다면: 이 작품의 인서트 컷들은 정말 예술이죠. 오랜만에 완전히 몰입되는 애니메이션을 만났어요.
딸리는: 주인공 마코토의 이모가 조카에게 말하잖아요? 네 또래 여자애들은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게 가끔 있는 일이란다, 하고. 이 말이 이상한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 저도 유년기에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중학생 무렵부터 가속이 붙어서 그 다음부터는 걷잡을 수 없어졌어요. 그래서 어린 날에는 ‘전력질주’하면 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이 왠지 미덥더군요.
같다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20대는 시속 20km, 50대는 시속 50km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모가 타임리프(time leap)의 가능성을 긍정하면서 그 예로, 일요일 오후에 침대에서 뒹굴다보면 어느새 밤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 예를 드는 것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딸리는: 노래도 있잖아요.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라고. ^^
같다면: 사실 순정이라는 말은 좀 경멸적으로 쓰일 때가 많은데 이 영화는 순정이라는 말이 딱(!)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애니메이션으로서 표현력도 대단했어요. 물기를 제대로 먹은 그림들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예를 들어 마코토와 치아키, 고스케가 골목 어귀에서 헤어질 때 원경은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깔고 싶을 정도더라고요.
딸리는: 도시를 이루는 회색 톤이 풍부했죠. 나뭇잎 그림자가 그 위에 수를 놓고. +_+
같다면: 그리고 아마 하늘을 가장 아름답게 그려낸 애니메이션일 겁니다. 예전엔 <붉은 돼지>의 하늘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딸리는: 앗, 지금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귀가 이만해졌겠다. ^^;
같다면: 이 영화의 하늘은 흡사 조근조근 말을 건네는 것 같잖아요. 비행장면도 없는데 그 정도라니 대단합니다.
딸리는: 그 하늘과 햇빛, 바람이 학교 실내로 슬쩍 들어와 있는 정경들도 좋았어요. 실제로 그 시절에는 생활에서 변하는 것이 없어서 그랬는지 계절, 바람, 햇볕이 기우는 각도에 훨씬 민감하잖아요. 방과 후나 일요일, 아이들이 가고 없는 학교에서 색다른 감정을 느낀 적 없으세요?
같다면: 롱숏들도 공간의 여백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빈자리를 절묘하게 담아내더라고요.
딸리는: 애니메이션인데도 연기력을 얘기하고 싶어져요. 마코토와 치아키가 팔다리를 움직이는 방식, 앉아 있는 자세, 이런 것들을 보면서 불현듯 ‘연기를 참 잘하는구나’ 싶더라니까요. ^_^
같다면: 거의 그렇게 말해도 될 정도죠. ^^ 인물이든 공간이든 세밀하게 사전 스케치된 흔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종반부에 마코토가 치아키를 찾아서 마구 달리는 장면이에요.
딸리는 : 프레임 밖으로 처졌다가, 다시 카메라를 따라잡고 자기 힘으로 추월하는 장면! ^0^
같다면 : 맞아요. 원래는 카메라 속도보다 늦었던 마코토가 그렇게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는 거죠. 전 그 장면에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오른쪽으로 프레임 아웃되었다가 따라잡은 뒤 결국 왼쪽으로 프레임 아웃되는 묘사는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딸리는: 그때 마코토는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횟수를 다 써버린 상태죠?
같다면: 그러니 순전히 자기만의 힘으로 시간을 따라잡아야 하는 셈이죠.
딸리는: 저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마코토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모에게 눈길이 갔어요.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이모는 실사판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인공이 어른이 된 모습이라고 가정했대요. 아직 옛날의 소년을 기다리는 소녀가 어른이 되어 조카에게 타임 리프의 능력이 나타나는 걸 지켜보는 거죠. '마녀 가문‘의 이야기죠. ^^
같다면: 속편을 잇는 방법으로 참 깜찍하기도 하시지. ^_^
딸리는: 젊은 모습 그대로 빙하에 갇힌 약혼자의 시신이 흘러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살았다는 어느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만화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모의 사연은 그 로맨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어요.
같다면: “돌아가야 했는데, 벌써 여름이 됐네. 너희랑 노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라는 말이, 전 이 영화에서 가장 쓸쓸한 대사였어요.
딸리는: 치아키에게 고백을 받은 마코토가 어쩔 줄 몰라 그 사태를 없었던 일로 무마하려고 여러 번 타임 리프를 하잖아요? 그때 “고백을 함으로써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잖니”라고 이모가 충고하는데 공감했어요. 고백을 하고 나서야 고백한 사람도 받은 사람도 비로소 사랑의 감정을 접수하는 예가 있죠. 감정이 언어를 입으면서 물질성을 얻는다고 할까, 한번 던져진 말은 그리로 생각과 감정의 물길을 터주잖아요. 그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좋아하는 걸까,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의 강도를 점수 매기고 거기 비추어 상대의 반응에 실망도 하고 기뻐도 하고.
같다면: 언어가 감정을 끌어내는 경우는 아주 많죠. 고백은 일종의 주술 같은 거예요. 언어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 어떤 감정을 담은 말을 하게 되면, 그 감정이 생기는 일이 있죠. 그런데, 어찌 보면 성장이란 결국 시간을 뛰어넘는 것 아닌가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그런 부분을 영화적으로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었습니다. 오늘 다룰 영화가 5편인데, 이러다간 타임 리프를 해야 할 지경이네요. ^^;
이동진_ “<스틸 라이프>는 진짜 악! 소리나게 훌륭하더군요. 미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옳은 영화 같아요. 지아장커는 완벽한 실천적 예술인인 듯.”
김혜리_ “인물들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 가운데에 끼어 수몰되거나 갱도에 매몰될 위협을 끝없이 받고 있죠.”
딸리는: 지아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는 2천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도시를 댐 공사로 2년 만에 지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중국의 현실이 배경이죠.
같다면: 마술적 리얼리즘이랄까. ^^
딸리는: 이쯤 되면 <스틸 라이프>에서도 미래의 호숫가에 사는 소년이 호수 속 마을의 소녀를 만나러 과거로 온다는 이야기가 가능할지도…(<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취해서 인사불성.*.*).
같다면: 지아장커가 보르헤스를 만났을 때? ^.~ 이번주는 좋은 영화들이 너무 많아요. <스틸 라이프>, 정말 대단하더군요. 지아장커가 뛰어난 감독이라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지만, 이번 영화는 진짜 악! 소리나게 훌륭하더군요. 허우샤오시엔이 마흔두살에 <비정성시>를 만들었는데 지아장커는 서른일곱살에 <스틸 라이프>를 만들었네요. <스틸 라이프>는 미학적으로도 옳고 정치적으로도 옳은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지아장커는 완벽한 실천적 예술인인 듯.
딸리는: <스틸 라이프>는 배에서 떠들고 노름하고 물을 쳐다보는 인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긴 수평이동 숏으로 시작을 하죠. 전 그 카메라의 움직임 속에 동일 인물이 두번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습니다. 그만큼 추상성이 있었어요. 이 영화는 삼협 댐이 건설될 이 지역으로, 오래전 자기를 떠난 아내와 자식을 찾아오는 남자와 돈 벌러간 뒤 2년간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아오는 여자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도입부에서 이미지가 보여주는 수평적인 흐름은, 중첩도 교차도 아닌 방식으로 합쳐져 흘러가는 극중 두 남녀의 이야기와도 잘 어울렸어요.
같다면: 지아장커가 <플랫폼>에서 단 한 장면만 이동 카메라를 썼던 것에 비교하면 많은 변화죠. 저는 <스틸 라이프>가 두 가지 이야기를 한데 엮지 않은 것도 좋아요. 이런 병렬식 구조의 이야기에선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뒤에 가서 엮는 게 무슨 예술영화의 유행 같잖아요. 하다못해 두 사람을 스쳐가게라도 하는데 그것이 없어서 참 좋았어요.
딸리는: 반면 별도의 에피소드 두개를 묶은 옴니버스 형식과 이 구조는 어떻게 다를까요? 지아장커 감독은 두개의 이야기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금을 긋고 싶지 않았겠죠, 아마도.
같다면: 자막에 따르면 이 영화는 ‘담배’,‘술’,‘차’,‘사탕’의 4개 챕터를 갖고 있어요. 하지만 인물을 따라가며 구조를 보면 사실상 3개 챕터죠. 그런데 왜 4개 챕터로 자막을 넣었을까요? 그건 네 가지 기호품이면 삶이 족하다고 여기는 중국인의 생각 때문일 거예요. 그것이, 이 영화의 희망이란 건데 위안이 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해요.
딸리는: 듣고 보니 어째 호빗들의 인생관과도 비슷한걸요? ^_^
같다면: <밀양>이나 <스틸 라이프>나 그 속의 희망을 보고 있자면 뿌듯해지는 게 아니라 스산해요.
딸리는: 이 영화에는 철거 중인 건물과 폐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사실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거의 자연처럼 보이죠.
같다면: 지아장커의 영화만큼 공간과 이야기가 절묘하게 얽히는 작품들도 드물죠. 로케이션의 영화라고 불러도 될 거예요.
딸리는: 철거된 건물을 배경으로 삼은 덕분에 발생한 절묘하게 회화적인 구도도 있더군요. 둥그렇게 부서진 건물 벽으로 도시 전경이 보이는 곳에서 남편과 아내가 이야기하는 장면이 예죠. 얼마 전 건물을 부분적으로 썰어내 공간을 재해석하는 작가의 전시회를 보았는데, 이 장면은 갤러리에 바로 옮겨도 어울리겠더군요.
같다면: 프레임 속의 프레임들이 저절로 만들어지죠. 말씀하신 장면은 미학적으로 유난히 꼼꼼하게 연출된 신이라고 생각해요. 토끼 모양의 사탕을 16년 만에 만난 부부가 나눠 먹는 상황하며, 쭈그리고 앉은 자세하며, 근경의 폐건물과 원경의 도시하며, 잠시 정적 뒤 원경의 건물이 내려앉는 장면하며….
딸리는:아내를, 그리고 남편을 찾아가는 두명의 주인공에겐 회복하고 싶은 과거나 개척해야 할 미래는 있는데 현재는 희박한 것처럼 보여요. 현재는 과거와 미래 가운데에 끼어 수몰되거나 광산 갱도에 매몰될 위협을 끝없이 받고 있죠.
같다면: 이 영화에는 역설적인 장면도 많아요. 바람난 남편을 찾아온 여자를 돕는 남편 친구의 일은 서한시대 유물 발굴이잖아요. 2천년 역사는 수장하면서 한쪽에선 관광자원이 되는 다른 역사를 발굴하다니 아이러니죠.
딸리는: 비단 중국의 문제만은 아니겠지요.
같다면: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도 정확히 겹치죠. 중국 정부가 지아장커의 영화를 그토록 성가셔할 만도 해요. 저는 이 영화가 관객 입장에서 지아장커의 영화 중 가장 명확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상징과 은유가 전에 없이 강력해요.
딸리는: 영화 속에서 로켓이 발사될 때는 제 눈을 의심했죠. -..- 지아장커 감독 영화 중에 가장 안 졸린다는 평판도 들리던데. +_+
같다면: <세계>가 제일 안 졸리지 않나요? 로맨스도 있으니…. ^^
딸리는: 이 주제로 우리가 토론까지 하면 지아장커 감독님이 언짢아하시진 않을는지요? “아닙니다. 이 영화가 제일 덜 졸려요.” “그래도 그 영화가 역시 더 졸렸어요 .” 이런 식의 티격태격은 좀…. ^^;;
같다면: 하하, 지아장커도 자기 영화가 졸리다고 말한 적 있어요. 그래도 허우샤오시엔의 <해상화>보다는 안 졸리다고 하면서요. ^_^
딸리는: <스틸 라이프>(Still Life)라. 제목이 참 과감하고 멋져요! ‘트리플 익스트림 다이내믹 라이프’라고 지어도 불안한 판국에….
같다면: 어떻게 제목을 짓든 지아장커 감독 영화는 흥행에 별 차이없을 듯. ^^ 그럼 로켓이 나오니까 <Steel Life>라고 지어 액션SF를 만들고 범죄물 <Steal Life>도 만들어 삼부작은 어떨까요? ^_^ <Steel Life>에는 <세계>의 모노레일을 만드는 청년들이 등장해도 되겠네.
딸리는:-.- 그럼 <Steal Life>에는 <소무>의 소매치기 주인공이 컴백하고요? 다음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의 코미디 <오! 마이 보스!>입니다. “이건 젠체하는 예술영화가 결코 아닙니다”라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그게 오히려 경고처럼 긴장시키더군요. -..-
같다면: 저는 그 내레이션이 변명이나 비아냥 혹은 조롱 같은 거라고 느꼈어요. 달을 가리키면서 손가락을 보라고 주문하는 심술 같은 거랄까요. 폰 트리에는 뛰어난 감독이지만 가끔 과유불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딸리는: 폰 트리에의 그런 면을 100% 좋아하긴 쉽지 않아요. 늘 관객을 포함한, 그리고 자기 영화의 인물을 포함한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요.
같다면: 그의 영화는 대부분 공동체에 대한 혐오나 좌절을 담고 있잖아요? 또 <오! 마이 보스!>는 형식적으로 상당히 강한 어법을 구사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그냥 코미디’로 즐기라니!
딸리는: 줄거리를 상기하자면 <오! 마이 보스!>는 직원 불만의 표적이 되기 싫어 미국에 진짜 사장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평직원 노릇을 해온 덴마크의 한 사장이, 회사 매각에 즈음해 한 배우에게 사장 노릇을 부탁하며 생기는 소동입니다. 그런데 이 배우는 사장 역할을 심각한 예술적 도전으로 받아들이죠. 휴우, <오! 마이 보스!>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조작하는 이야기예요. 경영, 예술, 연애, 동료 관계 모두를 ‘조작’의 관점에서 해석하죠.
같다면: 전 그것을 예술 창작에 대한 은유로서의 이야기라고 봐요. 사실 영화의 내용은 별로 관심이 가지 않더라고요. 스토리만 보면 빌리 와일더의 풍자코미디 같은데 감독의 형식적 자의식이 너무 크다보니 그쪽에 치우쳐 보게 되더군요. 컴퓨터프로그래밍을 통해 무작위로 촬영한 프레임을 선택하고 장면을 구성한다는 오토마비전이라는 것도, 그림을 그릴 때 드리핑 기법을 쓴 잭슨 폴록 같은 시도라고 봐요.
딸리는: 우연성을 도입했다는 거군요.
같다면: 딩동댕! 저는 폰 트리에가 어떤 방식으로 창작적 에너지를 얻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형식적 제약을 스스로에게 가함으로써 거기서 에너지를 얻어내는 스타일이죠. 자신에게 어려운 운이 던져지기를 기다리는 한시의 고수처럼. 최초의 영화로 돌아간다는 <백치들>이나,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전적인 핸드헬드 촬영이나 <도그빌>의 연극적 미니멀리즘 공간 등의 제약이 전부 그렇죠.
딸리는: 규칙을 부여해야 유희가 성립한다, 이군요. <오! 마이 보스!>는 소품이라 해도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꼭두각시 조종자’로서 감독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하는 영화죠. 그러다보니 설교나 견해의 주입은 없어도 관객이 강요받고 있다는 기분은 들어요. 직원의 애정도 원하고 권력과 돈도 챙기고 싶어하는 극중 사장의 행태는 예술가와 비슷하기도 해요. 예술가는 작품 속에서 실제 자기 손에 피나 얼룩을 묻히지 않고 현실에서 못할 일들을 벌이잖아요. 타인과 가상의 타인-캐릭터를 이용해서요. 그러면서 동시에 현실 생활에서는 사랑과 인기를 얻고 건전한, 혹은 존경받는 시민으로 살아가니까요. ^_^ 그나저나, 무작위로 앵글을 잡는 이 오토마비전이라는 기술은 어떤 목적으로 발명된 걸까요? 인간의 힘으로 통제 불능한 세계를 은유하려고?
같다면: 미학적 유희의 목적.
딸리는: 모르긴 해도 편집실에서 몹시 싫어할 듯. “라스, 한번만 더 이걸로 찍어오면 죽어!” 이러면서. -..-
같다면: 폰 트리에가 오토마비전으로 앞으로 2편 이상 찍지 않는다에 200원 겁니다. 지난번보다 더블로!
딸리는: 판돈이 너무 커져서 전 안 걸래요. ^^; 이제 이누도 잇신 감독의 <황색눈물> 순서입니다. 보자마자 좋다고 말씀하셨죠?
같다면: 전 루저들의 이야기에 끌리나봐요. 딱 이 정도가 제가 동의할 수 있는 따뜻함인 것 같습니다.
딸리는: 그런데 이누도 잇신 감독은 왜 이 예술가 지망생들의 이야기를 도쿄올림픽과 신칸센 개통 1년전으로 굳이 돌아가서 했을까요? 당대의 훌륭한 청춘영화도 이미 있는데 말이죠.
같다면: 일본인들의 과거에 바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가난하지만 꿈 많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 같은 게 이 영화에 짙은데, 그게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삶과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궤적 모두에 겹친다고 보는 것 같아요.
딸리는: <팩토리 걸>도 그랬지만 이 영화도 황금색 필터가 씌워진 ‘굿 올드 데이’의 느낌이 있었어요. 일상은 구질구질하고, <황색눈물>은 심지어 굶주리기까지 하지만 젊은이들이 아지트 하나에 몰려들어 윤택한 미래 따위 염두에도 두지 않은 채 마음에 족한 뭔가를 만들 때까지 마냥 꿈꾸는 일이 가능했던 시대, 그렇게 해서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
같다면: 분명히 미화된 과거지요. 확실히 그리 깊은 시선은 아니지만 사랑스러운 시선이라는 생각은 들죠. 일본 아이돌 그룹 아라시 멤버들이 주연인데 그리 훌륭한 연기는 아니지만 다들 영화에 귀엽게 어울렸어요. 저는 이누도 잇신 감독 영화에서, 에피소드를 나열하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한껏 힘을 줘 삶의 한 단계를 마감하는 순간을 관조하는 장면들이 좋아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츠네오가 조제를 떠나던 길에 거리 한복판에서 무릎을 꺾고 우는 장면도 그랬고요. <황색눈물>에서는 주인공이 더부살이 친구들에게 술 취해 나가달라고 말하려던 찰나에, 역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이 위독한 어머니 소식을 전하며 짐을 챙겨주는 장면이 그랬어요. 그리고 2년 뒤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 네 사람의 이야기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데 그것이 과거의 한때와 이별하는 순간을 영화적 의식으로 멋지게 표현했어요.
딸리는: 소설을 쓰겠다 결심한 사람은 이미 소설가처럼 행동하고 화가를 꿈꾸기 시작하면 이미 화가처럼 세상을 보잖아요. <황색눈물>의 주인공들도 그런 상태죠. 그러나 내 몸 안에 뭔가 꿈틀거린다는 것을 알 뿐, 그게 대단한 건지, 끌어낼 수나 있을지 확신이 없죠. 그런 청년들이 좁은 방에 모여 만들어내는 약간 답답하고 지기 싫은 공기가 잘 포착된 영화예요. 특히 이누도 잇신 감독은 자취에 대해 좀 아시는 듯. ^^
같다면: 자취뿐 아니라 마감도 좀 아시는 듯. 만화를 그리는데 옆에서 잡지사 기자들이 부채질해주며 계속 독촉하잖아요.
딸리는: 무슨 분만장면 같았죠? 기절한 척하니까 옆에서 “죽는 척은 선생님의 장기입니다!” 고발하고. ^0^
같다면: 저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단어 중 하나가 마감이에요. --; 악마의 ‘마’ 자 써서.
딸리는: 그래요. 곶감이 아니라 마감. 저는 이 대사가 기억나요.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면 안 팔리고 팔리는 걸 하면 하고픈 걸 할 자유가 없어.” 이건 어느 시점에선가 모든 사람이 부딪히는 문제겠죠. 또 창의적인 일을 동경하면서도 재능이 없는 게 눈에 보여 어디쯤에서 그만두어야 할까 시점을 고민하는 고통에 공감이 갔어요.
같다면: 어른들도 마찬가지죠. 마음이 아프면서도 좋은 장면이었습니다.
김혜리_ <오션스> 시리즈의 최대 매력은 슬슬 하는데 척척 맞는다는 거죠. 배우도 열연하지 않고 감독의 터치도 가볍지만 재능은 충분히 과시한다, 라고나 할까요?
이동진_ 이번에는 범죄 준비가 워낙 복잡해 따라가기도 바빠요. 세련되고 여유롭다는 점에서 007과 유사한데, 제임스 본드와 달리 오션 일당은 별로 얄밉지가 않아요.
딸리는: 마지막 화제는 <오션스 13>입니다. 제가 놓친 영화네요. 우선, 13편이 아니라 3편이 맞고요. ^^
같다면: <넘버23>이 <넘버3>의 20번째 속편이 아닌 것처럼요. ^.~
딸리는: 1, 2편은 모두 멤버들을 규합하는 장면이 도입부잖아요. 3편은 어떤가요?
같다면: <오션스 13>은 달라요. 13이 서양의 불길한 숫자라서인지 좀 우울하게 시작하죠. 뭐, 그렇다고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의 형장 수준은 아니지만. ^^ 멤버 중 한명이 카지노 재벌인 알 파치노의 술수에 휘말려 쓰러지고 의식을 잃는데 거기 분노한 오션 일당이 하나로 뭉쳐 복수하는 이야기죠.
딸리는: 헉, “우리가 무슨 조직이냐?”며 콩가루 정신을 자랑하던 그들 아니던가요? 그러니까 이번엔 패거리의 작전에 감정이 개입되는군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오 멋져”라고 묘기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응원이 섞인 좀더 친밀한 관람이 되겠네요.
같다면: 공범자로서의 쾌감은 이 시리즈를 보는 근본적 재미죠. 전편들과 차이는 상대를 망가뜨리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이고요. “우리가 남이가”가 3편의 정서랍니다. ^^ <오션스13>을 보며 한국영화 위기와 맞물려 올해 할리우드 여름영화들이 정말 장난이 아니란 생각을 했어요. 감독도 별로 힘주지 않고 연출한 것 같고 배우들도 설렁설렁 우정을 다지듯(^^) 연기한 것 같은데 그게 영화의 세련되고 가벼운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요.
딸리는: <오션스> 시리즈의 최대 매력은 ‘슬슬’한다는 점이죠. 슬슬 하는데 척척 맞는 것. 배우도 열연하지 않고 감독의 터치도 가볍지만 재능은 충분히 과시한다, 라고나 할까요?
같다면: 소더버그는 갈수록 작가로서보다 장르영화의 장인으로서의 역량이 돋보이는 듯. 배우의 화음은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가 좋은데 의상으로도 대비를 이뤄요. 맷 데이먼은 독립적으로 코미디 상당부분을 떠맡죠. ^^ 반면 알 파치노는 그리 인상적이진 못해요. 다만 초호화 캐스팅인 오션 일당을 한 사람의 악역이 상대해야 하는데, 배우의 경력으로 보면 사실 그 역에 알 파치노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없죠.
딸리는: 확실히 <오션스 트웰브>의 뱅상 카셀은 그 점에서 많이 달렸어요. <오션스> 시리즈는 일종의 핀볼 게임을 설계하는 마인드와 기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오션스 트웰브>의 절도수법은 반칙이 있어서 맥이 풀렸더랬죠.
같다면: 이번에는 범죄 준비 자체가 워낙 복잡해 따라가기도 바빠요. 세련되고 여유롭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는 007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제임스 본드와 달리 오션 일당은 별로 얄밉지가 않아요.
딸리는: 작전이 끝나고 모여서 시원한 술 한잔하는 시리즈 특유의 유쾌한 뒤풀이 장면이 지적하신 점을 잘 드러내지 않나요?
같다면: <오션스 13>이 시리즈 완결이라고 공언됐는데 라스베이거스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를 펼치고 끝낸 게 전 잘한 선택이라고 봐요.
딸리는: <오션스> 시리즈를 보면 한국에서도 매너와 스타일이 관객에게 각인된 스타들을 모아, 각 배우들의 매력과 재능을 제대로 간파한 총명한 각본가가 시나리오를 쓴 장르영화를 가동하면 그 아니 멋질쏘냐 하는 망상을 버릴 수가 없답니다.
같다면: 이 정도 규모는 아니지만,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사실 그런 기획이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주연급 배우들의 수가 적어서 한 영화가 독점하긴 어려울 거예요.
딸리는: 올해는 비교적 작품 수가 적고 짜릿한 프로젝트에 대한 갈증이 있다보니 다시 그 망상을 떠올렸나봐요. 위기니까 드림팀이 구제하라, 그런 취지는 물론 아니고요. 이제는 관객에게 성격과 연기양식이 인지된 배우들이 생겼으니 철저히 그들로부터 출발하는 기획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진 않을 거 같아요.
같다면: 그렇죠. 배우들의 이미지와 캐릭터를 잘 살려 쓰면 상대적으로 영화를 찍기도 쉬울 테고 관객 입장에서는 충무로의 선물을 받는 기분도 들겠죠?
딸리는: 물론 이런 기획은 제작비 문제도 크니, 절묘한 시나리오와 상호 신뢰, 배우끼리 교감과 한번 즐겨보자는 신바람 같은 게 필수적이겠죠. ^^
같다면: 유지인씨 나왔던 80년대 <미리마리우리두리> 같은 기획의 영화를 초호화 캐스팅으로 하는 거겠네요. 가만, 그럼 제목도 아예 ‘드림 프로젝트’로 하고 정선 카지노 터는 남녀 7인조 도둑 이야기로? ^^ 근데, 그러고보니 정선은 내 고향이네…. 안 되야….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