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벗어야 할 때 벗는 그녀가 아름답다
2007-06-22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해피엔드>와 <황진이>의 결정적 차이, 여배우의 진짜 귀티는 무엇인가
<해피엔드>

나와는 상관없는 시상식에 흥분했던 적이 두번 있다. 한번은 마틴 스코시즈가 <에비에이터>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을 때고 다른 한번은 이번 칸영화제에서 전도연의 수상 소식이었다. 이유는 달랐다. 전자의 경우 <에비에이터>는 별로였지만 노친네가 하도 물 먹는 게 안쓰러워서 이번에는 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상식을 지켜봤다. 이런 꼬라지를 본 옆의 선배는 “스코시즈가 평생 아카데미상 못 받아도 니 인생보다는 천배 나으니까 니 인생이나 챙겨”라고 일갈했다.

새벽에 잠까지 설치면서 전도연의 수상 소식을 확인했을 때 내 기분은 촌스럽지만 ‘정의는 승리한다’류의 만족감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전도연은 지난 10년간 가장 중요한 단 한명의 여배우이기 때문이다. 이번 수상이 그렇게나 흐뭇했던 걸 보면 그런 그녀가 톱클래스라고 불리는 다른 여배우들과 두루뭉술하게 엮이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 같다. 전도연의 수상 소식을 듣고 떠오른 게 <해피엔드>의 주진모와 정사장면이었다. ‘역시 저질이야’라고 하실 분 있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리고 전도연이 ‘잘’ 벗었고 그녀가 잘 벗은 게 좋은 배우가 되는 데 한몫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배우의 노출=불굴의 연기투혼이라는 쌍팔년도적 관점을 내세울 생각은 없다. 몇년 전 ‘톱클래스’의 한 여배우가 엄한 영화에 엄하게 벗고 나왔을 때는 달려가 옷을 챙겨주고 싶을 정도였다. 전도연은 연기를 하면서 벗어야 될 때 벗었을 뿐이다.

‘벗어야 될 때’라는 말은 사실 모호하다. 언제가 벗어야 할 때인가. 포르노나 에로영화도 아닌데 벗어야 할 타이밍이라도 있는가. 그것은 훔쳐보기를 자극하는 육체의 전시와 어떻게 다른가.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잖아! 그럼에도 총 들고 나타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무법자와 서로 노려보다가 시체들이 널브러진 장면으로 바로 넘어가면 그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나는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이 만든 <친절한 금자씨>나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도 뭔가 건너뛴 듯한 찜찜함을 느꼈다. 그 찜찜함 속에서 특급 여배우들의 ‘보장자산’ 관리하는 환청이 들렸다. 역시 나는 미학보다 이재에 밝은 인간이다.

<황진이>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 <황진이>는 예인 황진이가 아니라 남자들을 치마폭 안에 가둠으로써 세상을 발밑에 두었던 여성 황진이를 그렸다, 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가야금 잘 타고 시 잘 짓는 황진이가 아니라 여성성을 자신의 무기로 거침없이 남자들과 맞장떴던 황진이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색의 잘 빠진 슈트 같은 황진이의 한복에는 자신감과 섹시함이 흐르고, 심지어 어느 포스터는 어깨와 등을 노출한 황진이를 보여주면서 그 관능성을 최대한으로 부풀렸다.

그런데 영화는 이 포스터가 사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단아하다’. 특히 ‘요신’(베드신) 에 이르면 끌어앉는다-(때로 입맞춤)-눕는다-날이 밝는다 식의 고전적이고 교과서적인 생략기법이 반복된다. 황진이를 잡는 앵글은 어떤가. 딱 겨드랑이선에서 1mm의 오차도 없이 잘리는 화면을 보면 60~70년대 국가기관의 과학적이고도 엄정한 검열을 거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경직돼 있다.

게다가 정말 의아했던 건 ‘방사에 임하는 황진이의 자세’였다. 놈이와 함께 보내는 밤이야 ‘첫경험’이라서 대략슬픔일 수 있겠다 쳐도 청교방에 들어가 몇년 동안 뭇 남자들을 발밑에 두었던 그녀가 김희열과 거래성 동침을 하면서 순결을 빼앗긴 소녀의 표정을 짓는다는 건 이상하다. 순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기생이라니 너무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이 영화에서 당대 최고의 기녀 황진이의 노출장면이 없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여기에도 나 같은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아티스틱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순전히 상상의 나래지만 전도연이 황진이로 출연했다면 어땠을까. 배우가 달라진다고 시나리오가 완전 개작되겠냐만은(그러기도 하잖아)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러브신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싶다(저질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런 장면이 영화를 풍요롭게 했을 것 같다.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이 엄청난 건 아닐 수도 있다. 특히 ‘월드스타’ 운운하는 싼티나는 칭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번 수상이 온갖 우아떠는 전자제품 광고와 아파트, 화장품 광고에 출연해 자신의 ‘럭셔리함’을 과시하는 여배우들 앞에서 여배우의 진짜 ‘귀티’가 무엇인지 보여준 것 같아서 속시원하다. 전도연씨,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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