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유스케의 소설 <검은집>을 미리 접한 이라면, 영화 <검은집>의 예고편에 흐르는 배우 유선이 의아스럽지 않았을까. 소설의 사치코는 처음부터 불길하고 음산하다. 불쾌한 기운이 단정적으로 감도는 사치코에 비해 유선의 신이화는 기습적으로 아름답다. 연민을 부르는 창백한 미가 보험사정원 전준오(황정민)의 마음을 (더불어 관객의 시선까지) 살짝 흔든다. 자살한 어린 아들의 뼛가루를 뿌리는 그녀의 가라앉은 손을 붙잡아주고 싶을 만큼.
그 손은 사치코처럼 ‘괴력’을 뿌리는, 피를 부르는 재앙이다. 귀신없는 호러의 공포가 그 연약한 손과 핏기없는 얼굴에서 흘러나온다.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로서의 인간, 그녀야말로 <검은집>의 숨은 주인공이다. 하여 표정과 분위기의 낙차 큰 대비의 효과를 만들어낸 배우 유선에 대해 말한다는 건 스포일러 없이 불가능하다.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스포일러를 피하려다보니 대화의 맥이 자꾸 끊긴다. 개봉 직후를 핑계 삼아 구애없이 이야기하는 걸로 정리된다. <검은집> 같은 반전이 인터뷰 도중 일어난 셈이랄까.
2003년 <4인용 식탁>, 2005년 <가발>, 2007년 <검은집>으로 마치 정해놓은 듯 2년 간격으로 호러와 인연을 맺어온 유선을 기억한다면, 상투적이고도 직접적인 이 질문이 절로 튀어나온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검은집>의 유선이 이전의 유선과 확연히 달라 보인 건, 짐작대로, 이유가 있었다.
“머릿속에 그렸던 연기가 막상 하면서 잘 안 되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졌었어요. 그런데 어떤 선배가 그러는 거예요. ‘너는 너무 잘하려고 애써서 그래. 너무 잘하려고 하지마. 골프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면 공이 멀리 못 나가잖아. 힘 빼고 공에 집중해야 멀리, 멋있게 날아가잖아. 잘해야겠다는 강박을 버리고 스스로를 놔버려. 설사 연기 좀 못했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곧 지나가고 잊혀지거든.’”
1년 전이었다. 그때까지의 그녀는 너무 예민하고 꼼꼼해서 연기에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 다 챙기고 준비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주변 상황이 흩뜨러지면 그게 사람이든 뭐든 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잘하려는 강박, 그게 암초였다. “하고 싶은 걸 누리면서 왜 불평이 많지? 일할 수 있는 이 행복에 더 집중하고 더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깨달음처럼 왔어요.”
‘마인드’를 바꿨고, <검은집>의 신이화 캐릭터는 그 연장이었다. “<검은집>에선 잘 보이기 위해, 특히 무섭게 보이기 위해 너무 애쓰며 다가가지 말자는 게 첫 번째 생각이고 목표였어요. 노트에 명심해야 할 것을 쓰고 정리하면서 되새겼죠. 뭔가 하려고 하지 말고, 강해보이려고 하지 말자….”
이 방식은 마음이 없는 인간 ‘사이코패스’에 대한 공부에서 나온 결론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를 자유롭게 놓으려는 치열함이었다. 갈등은 컸다. “촬영장에서 모니터 보면서 너무 평범하고 밋밋한 것 같아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렇게 뭔가 하지 않아도 되나 싶어서.”
결과적으로, 하지 않으려는 거리두기가 신이화라는 서늘한 인물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의 ‘계산’은 곳곳에 깔려 있다. 가령 강신일의 아내 역인데 초등학교 동창인 그와 나이차가 너무 커보여 걱정되지 않았나, 하는 따위의 그저그런 물음. “우려는 전혀 없었어요. ‘여보’ 하고 불러가며 사는, 일상 속의 부부가 아니라 상황 속에서 각자 독립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거니까요. 만약 생활하는 신 속의 인물이었다면 보는 관객이나 연기하는 우리나 아주 어색했을 테지만요.”
또 사이코패스의 마지막 장면을 대하는 태도가 원작과 미묘하게 달라진 것에 대해서도. “감독, 배우 사이에 토론이 많았어요. 신이화의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여전히 사람다운 마음이 없어 차가움을 반박하듯 유지하는 것과 아주 약간은 인간의 연민에 대해 느끼게 해주는 것 사이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사이코패스에 대한 더 깊은 공부, 그리고 무서운 인간을 다루지만 그 존재에 대한 영화의 태도가 토론의 결론을 내주었다고 했다. 배우 유선은 그 과정을 아주 길게,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4인용 식탁> 때 그는 “첫 장편이라 가볍게 인사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검은집>에선 “정식으로 영화계에 인사하고 소개하는 느낌”이라고 한다. 4년의 시차를 늦었다는 느낌의 거리낌없이 그저 인사한다고 표현하는 그의 단단함이 혹은 여유가 시원하고 또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