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기구한 여성에 대한 <씨받이>(1986)의 전도된 버전이 <두번째 사랑>(2007)으로 돌아온 것일까? 두 영화에서 씨받이 옥녀(강수연)와 정자 기증자 지하(하정우)의 모습은 명쾌한 성역할의 전복을 보여준다. 영화가 각각 대상화하고 주체화하는 것은 그래도 여성이다. 옥희가 결국은 엄마로도 여자로도 버림받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를 감안할 때 서글픈 현실주의였다. 반면 파란 눈의 소피(베라 파미가)가 결국 열정과 관능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과 아이와 몸을 지켜냈다는 것은 인종과 시대와 성별을 초월해서 윤리적 울림을 자아낸다.
성씨 없는 여자, 국적 없는 남자
<씨받이> 씨받이란 집안의 혈통을 이을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여자다. 씨받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성씨 없는(즉 아버지 없는) 여자들만 모여 산다. 성이 없다는 점에서 씨받이들은 존재하지만 제도 밖에 있는 여자들. 대를 잇게 해준다는 한정된 조건하에서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불안한 지위의 여성 옥녀, 아들이냐 딸이냐에 따라 그녀의 운명은 모 아니면 도다. 농경사회에 걸맞게 아들을 얻게 해주는 대가는 논 다섯 마지기.
<두번째 사랑> 절에 가서 백일기도하면 괜히 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듯, ‘씨내리’란 야사 속에서 그 은근한 존재가 종종 부상했었다. 미국사회에서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지하. 가진 건 정자밖에 없는 그의 지위는 위생을 관리하는 병원의 제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따라서 그의 생존과 정체성 역시 불안하다. 백인사회의 동양 남자라는 무성(無性)적 존재감까지 염두에 둔다면 그 존재감은 더욱더 희미하다. 소피는 매번 300달러, 임신하면 3만달러를 준다는 은밀한 제의를 하니, 이것도 남녀차별인 셈?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곳
<씨받이> 바야흐로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우대받던 시대, 5대 종부에게 손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풍수쟁이 앞세워 찾아간 곳은 바로 옥문골. 자연과 인간사가 아날로지를 이루던 시대에 살던 이 풍성한 씨밭에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러나 모두 제도 밖의 비존재자인 여성들이다.
<두번째 사랑> 힘 약한 정자를 가진 남편의 아이를 너무나도 갖고 싶었던 소피. 유사와 상사의 세계가 아니라 너무도 자연과학적인 세계에서 그녀가 찾아간 곳은 임신과 출산마저 ‘관리’와 ‘처리’의 대상으로 만드는 불임클리닉이다. 여기엔 수많은 난자와 정자들이 대기 중이다, 단 아직 꽁꽁 얼어 있을 테지만.
입맞춤과 눈맞춤
<씨받이> 차마 키스라고 말하기 민망하니 북한식으로 입술박치기가 적당하겠다. 그때에도 이런 사랑법이 존재했을까 싶게 사랑하는 두 남녀는 입을 맞춘다. 감정개입 없던 교합이 정상위로만 진행되었던 반면, 감정과 욕망이 개입되면서부터 그들의 사랑 방식은 구체적이고 다양해진다. 조선 남녀의 입맞춤이 카라멜 마키아토처럼 감미로워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랑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진심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임에는 분명하다.
<두번째 사랑> 처음엔 서로의 눈을 마주치치 않았다. 소피의 투명하고도 차가운 푸른 눈과 ‘비즈니스적으로’ 지하의 검은 눈을 회피했다. 역시 임신만을 위한 이들의 계약적 섹스는 정상위로만 이루어졌다. 하지만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열정이 폭발하자, 그들의 사랑의 형식은 다양해지고 열정의 밀도가 짙어진다. 눈은 욕망을 드러내는 창이며, 눈빛의 마주침을 통해 연인의 관능을 읽어내는 배려의 독심술이 시작되는 법.
가련한 이 남자
<씨받이> 가진 건 뭐 두쪽밖에 없는 듯한, 명문가 5대 종손 신상규(이구순). 아내 아끼는 법 하나만은 알았지만, 옥녀에게 맛이 간 뒤 이마저 부실한 남편이 된다. 그나마 옥녀가 아이를 낳을 때 옆을 지켜주었으니 진보한 남잔지는 모르나, 그에겐 어떠한 판단이나 의견도 없다. 철저히 규방 안에서만 구실하는 조선시대 전형적 남자. 그는 어머니(는 상징적 가부장인데)와 숙부의 의견에 충실히 따르는 의지없는 자동인형 같은 존재.
<두번째 사랑> 소피의 매력적인 남편 앤드류(데이비드 맥기니스)를 무력하게 만든 것은 아마도 백인 상류층 사회에 들어가기까지의 경쟁적인 과정들이었을 것이다. 남의 집 유리창을 한번도 깬 적이 없는 이 모범생, 아내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이 남자, 밉다기보다는 불쌍하다. 남자들은 자신의 욕망보다 타자들의 욕망에 충실한 법을 배웠고, 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미덕인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