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 속 타임머신 이야기야 흔하디 흔해서 더이상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한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인데도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타임리프’는 일단 단어가 달라서 뭔가 신선해 보이고(완전 조삼모사!) 시간을 건너뛰는 행위와 파장이 매우 구체적이라서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타임리프’를 할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갈까?
제일 먼저 든 생각. 3년 전 전세 계약하던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 “전셋값이나 집값이나 별 차이도 없는데 대출 받아서 살까”라는 제안을 묵살했던 그때로 돌아가 집을 샀어야 했다. 그럼 지금 몇 억원은 벌었을 텐데!! 두 번째로 든 생각. 대학 원서 쓸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의대에 가라는 엄마의 애절한 부탁(지금보다 의대 가기 몇 십배 쉬웠던 시절이었다)을 무시했던 그때로 돌아가 의대에 갔어야 했다. 그럼 지금 몇 억원은 벌었을 텐데!! 아깝다, 아까워!!
아~ 이렇게 나는 진정 인생의 ‘타임리프’를 한 것이다. 한때는 나도 응원연습이 끝나고 우르르 아이들이 빠져나간 해질녘의 운동장을 바라보며 아련한 슬픔을 느꼈던 섬세한 소녀였는데 말이다.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나는 여주인공 마코토처럼 씩씩하고 순수한 소녀가 아니긴 했다. 만약 타임리프가 있었다면 나는 그 나이에도 복권을 사러 갔을 거 같긴 하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박하사탕>이 생각났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자 하는 부질없는, 하지만 안타까운 꿈이 아주 작았던, 하지만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는 삶의 한순간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정서가 있다. 영화의 처음- 그러니까 영화적 시간에서는 마지막- 에 영호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쳤던 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서 복권을 사거나 공부를 열심히 해 판검사가 되겠다는 의미가 아니가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즉 공장 동료들과 야유회를 가서 순임과 수줍은 눈연애질을 했던 그 순간으로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아니었나. 이 마직막 장면- 그러니까 가장 젊었던 시절- 에서 개울가 돌바닥에 누운 영호는 눈물을 흘린다. 이 찰나가 덧없이 지나갈 것이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예감하는 달콤하고도 쓴 눈물이었다.
이 영화는 젊은 영호가 흘린 눈물처럼 훼손되지 않은 시간에 대한 애절함과 그것이 이미 사라져버린 순간에 대한 쓸쓸한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길게 그림자가 지는 조용한 오후의 교실이나 영화 <엘리펀트>를 떠오르게 하는 아이들의 수다, 해질녁의 하굣길 골목 같은 아스라한 풍경들이야말로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마코토는 여러 번의 타임리프를 통해 후회되거나 피해가고 싶은 순간들을 되돌렸으나 결국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되돌려봤자 뜻대로 안 된다- 는 깨달음을 얻는다. 결국 정지시키고 싶었던 순간들은 마음속에서만 인화지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에게 더 슬픈 건 나이가 들면서 이 모든 것- 정지시키고 싶었던 순간들, 지금 붙잡고 싶은 시간들- 조차 희미해진다는 거다. 그리움은 흐릿해지고(“모든 게 가물가물하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미지근해지며(“그래서 뭐 어쩌라구”), 소망이나 기대는 싱거워진다(“밥이나 굶지 않고 살아야 할 텐데”). 그러니까 타임리프 하면 달콤하면서도 저릿했던 유년의 한순간이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럽게 집을 살걸!, 의대를 갈걸! 이라는 생각부터 총알처럼 튀어나오는 거다. 이렇게 무미건조해진 상상력에 경악하면서 앞자리에 앉은 같은 팀의 김 기자에게 ‘타임리프’를 한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보니 수많은 여성들에게 파묻혀 연애질로 인생을 탕진하던 대학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모야~).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나이 든다는 게 더 한심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추신: 듀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자전거 안전운행의 중요성을 절감했다지만 나는 보는 내내 마코토가 뇌진탕에 걸리지 않을까, 목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기적이야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위험하고도 고통스러운 시도를 통해서 타임리프를 해야 한다면 나는 애저녁에 포기할란다. 역시 내가 너무 늙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