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진중권의 이매진] 시간의 퍼즐
2007-07-06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기억의 조각으로 시간의 연속성 상상하는 <메멘토>의 레너드, 장면의 조각으로 사건의 연속성 읽어내는 영화관객의 유사성

“케오스의 시모니데스, 레오프레페스의 아들, 기억술의 발명자….” 17세기에 발견된 어느 고대의 석판에 적혀 있는 말이다. 기억술(mnemotechnik)은 문자문화 이전,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직 구술문화에 살던 시절의 테크닉이다.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석판에 적힌 대로 시인 시모니데스(BC 557~467)를 기억술의 창시자로 여겼다. 로마의 저자 키케로는 <웅변술에 관하여>에서 기억술 창시자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데살로니카의 귀족 스코파스가 베푼 주연에서 시모니데스는 주인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낭송했다. 거기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을 찬양하는 내용도 일부 담겨 있었다. 그러자 인색한 스코파스는 시인에게 찬가를 위해 주기로 했던 금액의 절반만 지불할 것이며, 나머지는 그 시의 절반을 바친 쌍둥이 신에게 받으라고 말했다. 잠시 뒤 시모니데스는 밖에 그와 얘기하고 싶어하는 두 사내가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주연장을 빠져나오나, 밖에서 아무도 보지 못한다.

그가 나간 사이 주연장의 천장이 무너져 내려 스코파스와 그의 손님들은 잔해에 파묻힌다. 사체가 얼마나 형편없이 망가졌는지 장사를 치르러 온 친지들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시모니데스는 희생자들이 탁자에 어떻게 둘러앉아 있었는지 기억해내, 친지들에게 그들이 찾는 사체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방문자,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 시모니데스를 빼냄으로써 자신들에게 바친 찬가의 분량에 값을 지불했던 것이다.”

므네모테크닉

주연에 참석했던 이들의 위치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시모니데스에게 시는 ‘말하는 그림’(pictura loquens)이고, 그림은 ‘말없는 시’(poema silens)였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으로 시를 쓰던 그에게 참석자의 이름과 영상을 연결시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게다. 실제로 기억해야 할 낱말들을 이미지의 연쇄로 바꾸어놓는 것은 고전적 기억술에서 즐겨 사용하던 방법. 이는 ‘마인드매핑’(mind mapping)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된다.

‘로키법’(loci: 장소)이라는 것이 있다. 암기해야 할 내용들을 쪽지에 적어 자신이 즐겨 다니는 곳곳에 붙여놓는 것이다. 산책을 하면서 쪽지 보기를 몇번 반복하면, 나중에는 머릿속의 가상의 공간을 거니는 것만으로 암기할 내용을 차례로 기억해내게 된다. 또 ‘기억의 궁전’이라는 것도 있다. 암기해야 할 내용을 건축 재료로 바꾸어 건물을 하나 짓고, 필요할 때마다 상상으로 건축을 불러내어 각 부분에 저장된 기억들을 차례로 읽어내는 것이다.

기억술을 겨루는 데에 종종 사용되는 것이 바로 원주율(π). 현재 세계 챔피언은 아키라 하라구치라는 일본인으로, 소수점 아래 10만 자리까지 외운다. 2006년 10월3일 오전 9시에 시작한 그의 암송은 다음날 새벽 1시 반에야 끝났다. 그의 방법은 숫자의 열을 기다란 내러티브로 바꿔놓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앞서 얘기한 ‘로키법’처럼 기억을 공간화, 시각화하는 방법과는 다르다. 하긴 수열의 무한한 진행을 유한한 공간의 표상 안에 담을 수는 없지 않은가.

휘발하는 의식

영화 <메멘토>의 기억술은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레너드의 것은 정상적 능력을 뛰어넘는 뜨거운 기억술이 아니라 정상적 능력을 회복하려는 차가운 기억술이다. 그의 팔뚝에는 “새미 잰키스를 기억하라”고 적혀 있다. 그가 조사를 맡은 새미라는 고객은 사고로 인한 ‘단기기억상실’(antegrade amnesia)로 조금 전 자신이 했던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레너드는 새미의 기억술은 “체계적이지 못했다”며, 지워진 기억을 복구하는 체계를 구축한다.

전원이 나가면 사라지는 RAM처럼 레너드의 의식은 휘발한다. 그리하여 그는 기억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면 곧바로 폴라로이드로 사진을 찍어 문장을 적어넣기로 한다. 이것으로 정상인의 단기기억을 대신하는 셈이다. 휘발을 막는 일종의 플래시 메모리라 할까? 한편, 오래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몸에 문신으로 새겨넣기로 한다. 이로써 단기기억은 장기기억의 장소로 옮겨진다. 하드디스크에 문서를 저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휘발성 의식은 개인사를 폐허로 만든다. 세계는 무너져 내려 몸에 새겨진 문신들, 폴라로이드 사진들, 그 밑에 씌어진 문장들의 파편으로 흩어진다. 유적을 복원하는 고고학자처럼 그는 이 파편들을 가지고 제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구성한 것을 어떻게 사실로 확신하느냐는 것. 숫자 하나로 수열의 공식이 바뀌듯이, 요소 하나만 바뀌어도 기억의 서사는 바뀐다. 모자이크 같은 그의 기억은 타인에게 이용당할 위험에 노출된다.

피크노렙시

레너드의 파편적인 기억은 어린아이의 의식을 닮았다. 아이들은 종종 식탁에서 물 잔을 엎는다. 기억이 뭉텅뭉텅 잘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파편적 의식에는, 누군가 물 잔을 갖다놓은 사태가 없던 물 잔이 새로 생겨난 사건처럼 여겨질 게다. 부모에게 야단을 맞으면서 아이들은 점차 단절된 의식의 바깥에서 세계는 연속되고 있음을 배우게 된다. 영화의 끝장면에서 레너드는 혼잣말을 한다. “눈을 감고 있어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폴 비릴리오는 영화체험을 아이들의 피크노렙시에 비유한다. 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극과 달리, 영화 속의 상황은 단절된 숏들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영화의 관객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레너드다. 그 역시 레너드처럼 스크린 위의 단절된 파편들로 서사를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습을 통해 기억의 단절에서 의식의 연속성에 도달하듯이, 단절된 파편으로 서사의 연속을 재구성하는 관객의 능력도 실은 오랜 영화실험의 역사 속에서 학습된 것이다.

대중성을 좇는 영화는 대개 숏과 숏의 단절을 감추는 연속편집(continuity editing)을 사용한다. 서사를 좇아가는 관객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다. 이런 영화는 관객에게 많은 요구를 하지 않는다. 반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처럼 일부러 숏과 숏을 충돌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런 영화는 관객을 참여시키려고 불연속편집(discontinuity editing)으로 단절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적극적 추리와 구성을 하는 가운데 지각을 발달시키고 정신을 단련시키게 된다.

퍼즐 맞추기

대중은 보수적이어서, 익숙한 지각방식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중만큼 보수적인 할리우드는 영화언어의 최소한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관객에게 긴장을 요구하기보다는 오락을 제공하는 게 상업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메멘토>는 다르다. 이 영화는 관객의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관객은 기억의 편린 속에서 방향을 잃은 레너드처럼 추리와 구성으로 어지러운 파편들을 하나로 이어 서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메멘토>를 본 이들은 누구나 영화를 되돌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렇게 해보라. 몇몇 비평가들의 혹평처럼 “내러티브는 아무 흥미도 끌지” 못하고, “영화 자체가 레너드의 일시적 기억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각신(scene)의 첫 장면은 이어지는 신의 끝장면과 겹치거나 맞붙는다. 이를 이으면, 뜻밖에도 단절없이 이어지는 완벽한 선형적 구조가 나타난다. <메멘토>는 파편들의 모자이크가 아니다. 실은 요소들의 위치만 바뀐 온전한 그림, 즉 퍼즐이다. 놀라운 것은 이 점이다.

그뿐인가? 영화 안에도 실은 두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컬러화면의 시간은 뒤로, 흑백화면의 시간은 앞으로 흐른다. 어지럽게 흩어진 조각들을 꿰맞추어 서사의 퍼즐을 완성하는 데에는 당연히 정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흑백의 시간대는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로 합류한다. 따라서 <메멘토>를 거꾸로 보려면, 먼저 앞에서 뒤로 흑백화면만 따라가다가, 두 시간대의 합류점에서 컬러화면을 따라 뒤에서 앞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역행캐논

흔히 비평가들이 놓치는 것은, 언뜻 혼란스럽게 보여도 <메멘토>가 철저하게 합리적인 음악적 구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컬러와 흑백의 두 성부를 동시 진행시킨다는 점에서 <메멘토>는 대위법을 닮았다. 앞에서 끝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은, 이른바 역행캐논(crab canon)의 기법이다. 서사의 끝에서 서사를 시작하는 <메멘토>. 이는 역행캐논의 창시자 기욤 드 마쇼의 곡을 연상시킨다. <나의 끝은 나의 시작이다>(Ma fin est mon commencement). <메멘토>를 대신하여 말하는 듯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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