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암중모색의 쾌감 <디센트>
2007-07-04
글 : 김혜리
미리 정보를 구하지 말 것. 무작정 어둠 속으로 따라갈 것. 실컷 비명 지를 것

범용한 스릴러와 호러영화는 관련 정보를 미리 알고 본다 해도 재미가 크게 훼손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스포일러조차 큰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영화 스스로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센트>는 네발로 기며 어둠을 더듬는 영화다. 암중모색의 쾌감을 제대로 연출한 이 영화의 어둠은 진짜다. 그 속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모를수록 <디센트>는 짜릿하다. <디센트>의 한글 제목을 붙인 사람은, 원제의 의미 ‘하강’과 ‘전락’ 중 하나만 고르기 난처했을 것이다. 영화 속 여섯 여자들은 지하 동굴을 탐험하는 느린 하향운동을 하고 거기서 고립된 채 맞이한 재앙을 통해 동물적인 상태로 굴러 떨어진다. 인물을 동굴에 들여보내기까지 닐 마셜 감독은 적당한 시간을 들여 심리적 복선을 깔고 많은 캐릭터를 최소한 스케치한다. 여자친구들과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겨온 세라(쇼나 맥도널드)는 래프팅 여행 중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1년 뒤. 세라의 기운도 북돋울 겸 그룹의 리더 주노(내털리 멘도자)는 동굴 탐험을 제안한다. 언니처럼 세라를 돌보는 베스(알렉스 레이드)와 대담한 홀리(노라-제인 눈), 의학도 샘 그리고 레베카가 애팔래치아산맥의 오두막에 모인다. 그러나 미지의 위험에 끌리는 주노의 버릇은 이들을 예상 밖의 곤경에 밀어넣는다. 전인미답의 동굴 입구는 매몰되고 출구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산 사람을 뜯어먹는 생물들(crawlers)이 습격한다. 피가 늪을 이루는 동안 이기심과 의혹도 돋아난다.

<디센트>의 여섯 여자는 말만 여왕이지 품위는 약에 쓰려도 없던 기존 ‘호러 퀸’들이 일으킨 체증을 날려버린다. 이들이 지닌 것은 동그란 눈과 카랑카랑한 목청이 아니라 강건한 이두박근과 지구력이다. 호러의 단골인 미숙하고 연약한- 나쁜 장소만 찾아 들어가 숨는- 10대들과 달리 경험과 판단력을 가진 성숙한 여성들이 합리적으로 재앙에 대처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통쾌한 경험이다. 그러나 <디센트>는 캐릭터마다 트라우마를 부여하고 모험을 통해 그것을 해소하는 여성 앙상블 영화의 집단 성장 내러티브를 취하지 않는다. 자매애로 질투를 극복한다는 공식도 등진다. 요컨대 <디센트>의 여자들은 기본적인 의리와 긍지를 지키려고 애쓰지만 초인적 고결함까지 보이지는 않는다. 동굴 저쪽에서 혼자 떨어진 친구가 고함을 치면 “괴물들이 저 애한테 몰릴 거야”라고 안도하다가, 금세 “아까 네 목소리 들었어”라고 반색하는 것이 이 영화의 인물이다.

동굴로 하강하기 직전 주노는 일행에게 방향감각 상실, 탈수, 환각, 공황 등의 증세를 경고하는데 이는 관객을 위한 안내이기도 하다. 닐 마셜 감독의 시나리오는 가족을 잃은 여성의 심리적 공황을 통과해 폐소공포증의 아궁이로, 그리고 서바이벌 게임의 스릴로 나아간다. 이 모든 단계에 걸쳐 눈을 쑤시고 귀를 물어뜯고 부러진 다리뼈가 피부를 찢고 튀어나오는 육체의 파괴가 따른다. 그중에서도 뾰족한 물체에 꿰뚫리는 이미지는 대여섯 차례나 반복된다. 관객은 말초신경의 전율부터 근원적 두려움에 이르는 다채로운 공포를 맛보게 된다.

이 복합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일등공신은 동굴이라는 공간이다. 한 사람이 기어서 겨우 통과할 만큼 비좁은 통로와 피와 점액이 흐르는 괴생물체들의 군거지 등은 유기체의 내부 기관, 특히 여성의 생식기관을 연상시키며 마음의 심연까지 은유한다(프로이트적 해석을 시도하는 대학원생이라면 반색할 만하다). 한편 닐 마셜 감독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에 약 만 번째 경의를 바치는 이미지를 비롯해 수많은 장르영화의 인용을 흩뿌려놓았는데 <서바이벌 게임> <에이리언> <지옥의 묵시록> 등은 그중 일부다. 그러나 <디센트>의 모든 장점을 부화시키는 자궁은 어둠 그 자체다. 몇몇 불가피한 신을 제외하면 인물들이 실제로 소지한 광원- 랜턴, 횃불, 형광봉 등- 으로 조명을 제한한 샘 매커디의 촬영은 스크린의 네모진 가장자리를 지워버린다. 그리하여 스크린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나온 영화는 객석을 휘감는다. 그리고 구렁이처럼 조여든다. 거대한 동굴로 둔갑한 극장에 앉아서 우리는 불특정 다수의 타인과 함께 관람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오래된 영화적 쾌락의 묘미를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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