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판을 틀고 음악에 맞춰 신나게 점프하는 소년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춤을 추었다. 태어나자마자 춤을 추었다, 라는 음악의 가사처럼.
어쩌면 빌리에겐 음악을 느끼며 춤으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본능이 이미 잠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피아노 앞에 앉아 칠 줄도 모르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어머니를 느꼈던 것도 어머니의 피아노 선율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빌리는 그 피아노 소리에 맞춰 태어나기 전 뱃속에서부터 춤을 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존권을 놓고 치열한 사투를 하고 있는 탄광촌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빌리는 이러한 자신의 춤에 대한 본능을 깨닫고 힘겹게 그 꿈을 키워나간다.
꿈꾸는 소년. 멋진 발레리노가 되고 싶은 소년의 꿈은 우연히 이끌린 발레 수업에 동참하면서부터 시작 되지만, 춤에 대한 열정이 생긴 이후 이미 춤은 그에게 필연이 된다.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꿈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빌리는 계속 춤을 춘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 빌리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열정과 꿈에 대한 의지를 춤으로 보여준다. 눈물을 감추며 돌아서는 아버지는 현실이란 벽 앞에 자식의 꿈을 외면했던 죄책감과 미안한 맘으로 괴로워하고, 아들의 꿈 실현을 위해 자신의 신념조차 버리려 한다.
빌리의 꿈은 탄광촌의 힘겨운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쩌면 허영처럼 보일 수 있는 막연하고 먼 꿈일 수 있다. 배우가 되겠노라고 결심한 어린 소녀의 꿈도 이처럼 막연하고 먼 꿈이었다. 아마 빌리의 나이쯤인 11살, 12살 무렵부터 아주 구체적으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던 것 같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어린 시절. 엄마 옷을 꺼내 입고 화장을 하고 드라마 속 어른들을 흉내내거나, 음악을 틀고 가수들의 춤을 따라 하고, 학교 학예회 때나 소풍 때 장기자랑시간을 늘 고대하며 그 순간을 위해 준비하던 어린 소녀.
배우가 되면 더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내가 가진 걸 마음껏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무엇에 그렇게 끌렸던 것일까. 빌리는 말한다. “춤을 추면 그냥 기분이 좋아요. 모든 걸 잊게 돼요. 다 사라져버려요. 마치 몸에 불이 붙어 변해 한 마리 새가 된 것 같아요. 전기처럼….” 춤을 사랑했던 소년의 이 말이 연기를 열망하며 자라온 나의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연기를 통해 나를 잊고 또 다른 나를 꿈꾸던 내 어린 시절과 너무도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막연한 꿈으로 지워질 수 있는 어린 시절의 꿈. 하지만 그 꿈을 통해 나를 찾고 그 꿈을 통해 미래를 꿈꾸며 오로지 그 꿈이 실현되는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려온 나의 지난 시절의 기억들이 빌리를 통해 되살아난다.
로열국립발레학교의 합격 통지서를 받은 빌리는 흥분하여 소리치기보단 조용히 그 감동에 숨죽여 운다.
힘겹게 노력했던 시간들, 그리고 마침내 꿈의 실현이 현실로 다가온 감동에 가슴이 벅차다.
나는 지금도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나게 되는 그 순간순간이 감동이다. 기회가 있다는 건 누군가 배우로서의 나를 믿고, 내 열정을 인정해준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꿈을 꾸었던 어린 소녀의 가슴을 다시 한번 벅차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배우가 되었다라는.
하지만 나는 아직도 빌리 같은 화려한 도약의 순간을 꿈꾸며 기다린다. 한 마리 새가 된 것 같다며 춤을 사랑했던 빌리는 마침내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그 힘차고 당당한 도약을 그리며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