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 시절은 유난히도 길고 아팠다. 낭만보다는 이념이 앞섰고 문학보다는 철학이 먼저였다. 그 흔한 미팅 한번 못해봤고,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언제나 분노와 열정에 사로잡혀 있어야 했고 나의 삶보다는 역사의 현실이 전부였다. 오랫동안 꼭꼭 숨겨두었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에게 살포시 내어주고픈 아름다운 추억일랑 아예 기억에 없다. 그 추억보다는 상처만이 숱한 흔적들을 남겨놓았다.
왜 아니겠는가. 밤마다 제기동 뒷골목을 헤매며 술독에 빠져들었다. 최루탄 가루에 얼룩진 뻘건 눈알이 이제는 술기운으로 더욱 충혈되고, 숱하게 뱉어낸 독설들이 서서히 잦아들 때면 어김없이 허무와 고독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스멀거리던 아픔이 뼛속까지 밀려오면 고통에 치를 떨며 또다시 술독에 빠져든다.
그 당시 나에게는 소중한 술친구가 한명 있었다. 내 기억에 시간을 정해놓고 만난 적이 별로 없다. 그냥 밤이 깊어지면 어딘가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술집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말은 없다. 그를 만나기 직전까지 질퍽대던 분노와 열정, 역사의 운명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직 침묵 속에서 허무와 고독을 즐긴다. 그 친구의 별명은 말 그대로 ‘개’였다. 멀쩡하다 술만 먹으면 돌아버리는 개! 언제나 술자리는 난장판이 되기 일쑤다. 나만 빼놓고 옆에 누가 있든지 시비를 걸고, 때리고 얻어터지고…. 이럴 때에도 나는 침묵을 즐기고 가만히 바라만 본다. 잘 말리지 않는다. 이해가 아니라 그냥 멍하니 지켜볼 뿐이다.
그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와 술을 먹었다. 다른 날과 다른 게 있다면 오후부터 그와 술을 먹었다. 밤 10시쯤 되었을까. 그가 불쑥 “야! 영화보러 가자” 하면서 충혈된 눈가를 치켜들었다. 나는 무슨 영화인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설령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대안이 없었다. 그냥 심야영화를 하는 극장에 가서 걸려 있는 영화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명보극장으로 기억한다. 흐느적거리며 극장 문을 들어섰다. 십중팔구 곯아떨어지겠지. 웬걸 잠자기에도 좋은 환경이었다. 관객은 그 친구를 포함해서 10명을 넘지 않았다. 반쯤 누운 자세로 영화가 시작되었다. 자막이 떴다 사라지고 하더니 갑자기 황량하고 시뻘건 사막이 나타났다. 암울한 하늘 아래 웬 남자가 그 끝없는 사막길을 정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띠웅? 하는 기타 연주가 나의 뇌리를 강타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응어리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밀려왔다. 잠을 자기는커녕 정신이 너무나 또렷하게 일어나서 화면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영화가 언제 끝났는지도 모를 즈음 극장 안이 환해졌다.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극장 직원이 소리를 칠 때쯤 몸을 뒤척이는데 내가 꼭 사막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돌아와서 또 술을 먹었다. 여전히 침묵 속에서….
이때가 대학 2학년쯤이었을 게다. 나는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내가 본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영화 마니아도 아니었고 영화를 즐겨 보지도 못했다. 돌이켜보자면 유소년 시절의 문학에 대한 꿈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는 단지 ‘운동권’ 학생에 불과했다. 내가 이 영화를 알게 된 것은 졸업을 하고 모 월간지 편집장을 할 때다. 지나간 영화를 소개하는 난이 있었고, 그 때문에 영화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필자들에게 원고를 부탁했었고, 정성일씨에게도 부탁한 적이 있는데 그는 기억을 잘 못할 것이다. 나 역시 그때는 그가 유명한 영화평론가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나는 급기야는 비디오 편집실까지 출판 편집실에 갖추는 영화광이 되어가기 시작했고, 어찌어찌 하다가 지금은 영화제작을 하는 영화쟁이가 되고 말았다.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 이런 거장의 영화를 철없던 똘마니가 무례하게도 술에 절어서 관람을 했다니! 그리고 당시 나의 뇌리를 강타했던 기타 반주가 바로 그 유명한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였단 말인가! 그는 이 영화의 음악을 만든 이후 영화음악 뮤지션으로 더욱 유명해졌고, 최근 빔 벤더스 감독의 신작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음악 프로듀서 겸 영화에도 출연하여 한국에 많이 알려졌다. <파리 텍사스>에 대한 부연설명은 더할 필요가 없을 거다. 너무나들 잘 알 거다. 나만 잘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황량하고 소외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헤매이던 트레비스의 모습이 그 당시 바로 나였다. 철저한 의사소통의 단절. 매일 밤낮없이 책읽고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데모하고 그리고 술자리에서 수많은 말들을 늘어놓지만 정작 내 자신과 소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 친구와 술에 절어서 침묵으로 흐느적거리는 나의 몸부림만이 유일한 소통이었다. 당시 나는 영화를 보면서 몸서리를 쳤던 것 같다. 이후 많은 영화들을 보았지만 끊임없이 나의 뇌리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영화를 만나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의 나의 상황과 너무나 절묘하게 맞닥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그 기타음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영화일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구입한 비디오가 <파리 텍사스>다. 그러나 그때 이후 두번 다시 보지 못했다. 다만 소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도 한번 더 볼까 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그때의 그 악몽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한 월간지 <인테르니> 99년 1월호에서 “왜 모든 당신 영화의 줄거리는 여행에 기초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빔 벤더스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바로 여행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파리 텍사스>의 그 사막 어딘가에서 여행중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혹은 영화만들기란 여행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