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마세요. 함께라면, 해볼 만할 겁니다.” 무대에, 카메라 앞에 서지 않고, 순수 ‘민간인’으로 살아온 지 4년째 되는 어느날이었다. 이얼에게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시나리오와 함께 임순례 감독의 편지가 배달됐다. 이얼은 “연기를 하지 않아도 재미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간 수많은 직업을 전전해왔지만, 알 수 없는 권태와 단절감으로 답답해하던 참이었다. 임순례 감독의 편지는 연기자의 길로 되돌아올 ‘고마운 핑계’를 준 셈이다. 이얼은 이제 임 감독을 ‘은인’이라고 부른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이얼은 밴드의 맏형 성우였다. 성우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고, 밴드를 지킨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고 묻는 옛 친구에게, 그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답할 수 없다. 그럼에도 끝내 음악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성우는 뭔가를 저지르는 대신 당하는 편이고, 겉으로 표출하는 대신 안으로 삭이는 스타일. 오랜만에 연기활동을 재개한 이얼로서는 ‘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세친구>를 보고 나니까 그림이 섰어요. 거기 주인공(무소속)이 꼭 성우 같더라고요. 그렇게 당하기만 하고 제대로 표현 안 하는 역할이 ‘힘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연기를 안 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억지로 꾸며내거나 과장하면 안 되겠다 싶었죠.”
노래와 연주 ‘연기’도 “워낙 음감이 없어서” 힘들었다고 말하는 그가, 영화 속에서는 “야간업소의 비틀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리더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맹훈련 탓인지, 이얼의 네살배기 딸은 아버지가 ‘기타치는 사람’인 줄 안다나. 지난해 가을과 겨울에 촬영을 마치고, 올 봄 전주영화제부터 개봉을 앞둔 지금까지, 각지에서 열린 일반 시사회를 십여 차례 따라다닐 정도로, 영화에 정이 흠뻑 들었다. “재밌어서 봐요. 볼 때마다 기분이 다르거든요.”
한 가지 꿈을 좇아 사는 성우와 달리, 이얼은 ‘한우물 파기’보다는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이 많았다. 이공계열 전공자이지만, 연극계에 몸담은 친구를 따라 92년부터 극단 연우무대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마술가게>(초연)와 <산불> 등을 선보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이얼의 얼굴에서 설경구를 떠올리지만, 그에겐 ‘대학로 3대 미남’에 꼽힌 화려한 전적(?)도 있다. <축제> 등 영화에도 간간이 얼굴을 내밀었고, 2회차 촬영 뒤에 접은 영화 <들소>는 임순례 감독과의 인연이 시작된 작품. 그러나 그에게 연기는 ‘대체 불가능한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기를 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스트레스와 공포가 있었다”는 그는, 결혼과 동시에 연기를 접었다. 타이에서 장사를 하기도 했고, 지방에서 에어컨 가설과 부동산 중개일을 하기도 했다. 연기 아닌 다른 일에서 삶의 ‘재미’를 찾을 줄 알았지만, 연기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더라는 깨달음이 찾아왔을 때, 마침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러브콜’을 받았다. 이얼은 영화에 대한, 연기에 대한 애정을 ‘재발견’한 만큼, 다음 작품은 신중히 고를 생각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성우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 다른 인물이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 “앞으로 좋은 작품을 열편 정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쯤이면, 배우로서의 나를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굴곡있는 삶을 살아온 듯한, 연륜과 깊이가 있는 얼굴. 임순례 감독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배우들을 캐스팅할 때 내세운 조건이다. 이얼에게는 뭔가 더 있다. 50대가 되면 사교댄스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꿈을 꾸는 소년의 말간 호기심과 수줍음 같은 것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