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스틸 라이프> 부끄러움을 가르쳐준 영화
2007-08-08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부서지는 공간 위에서도 삶을 지속하는 노동 인민들을 바라보는,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

“<동>과 <스틸 라이프>에서 똑같은 화면, 동일한 프레임으로 리우샤오동이 있던 그 장소, 그 자세, 그 각도, 그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비판입니다. 그때 둘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싼샤를 보는 사람은 예술가 리우샤오동이 아니라 노동자 한산밍입니다. 세상 안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동>과 <스틸 라이프>는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지아장커, <씨네21> 575호) 사실 지아장커의 이 말에는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스틸 라이프>의 핵심이 담겨 있다. 게다가 나는 리우샤오동을 중심으로 싼샤에서 찍은 다큐멘터리 <동>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 이 영화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풍경의 저항, 인민들의 저항

싼샤. 1993년부터 시작된 중국정부의 댐 건설로 중국 인민폐 10위안에도 그려진 아름다운 풍광과 2000년의 장구한 역사가 서서히 물에 잠겨가는 곳. 과거는 그렇게 수장되고 현재는 끊임없이 부서지고 미래는 안개로 덮여 보이지 않는 곳. 그곳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여기 두 남녀가 있다. 산밍은 16년 전 자신을 떠난 아내와 딸을 찾기 위해, 션홍은 2년째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기 위해 싼샤의 시간 속으로 들어선다. 이것은 사라져버린 누군가를 찾으러, 사라져가는(허물어지는) 시공간 속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느 날 삶의 텅 빈 구멍을 목도한 사람들과 자신의 일부가 점차 부서져가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하는 풍경의 만남. 처음 볼 때는 자신의 의지로 붙잡거나 제어할 수 없는 상실에 이 영화의 슬픔 혹은 근대화의 슬픔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볼 때야 비로소 <스틸 라이프>는 그저 사라짐의 슬픔을 환기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 사라짐을 끝까지 응시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사라짐 앞에 자신을 던져두고 거기에 저항한다. 나는 여기서 풍경의 저항, 인민들의 저항을 본다. 물론 이것은 불굴의 의지로 투쟁의 대상을 설정하고 싸우는 저항이 아니라, 완전한 먼지로 흩어질 때까지, 실체를 잃을 때까지,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다는 의미에서의 저항이다. 살아남음으로써, 즉 존재함으로써 저항한다.

영화 속 싼샤의 산수는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영화는 그 풍광을 감상의 대상으로 찍지 않았다. 영화는 유람선을 타고 산수화를 보듯 그 풍광을 감상하는 사람들과 인민폐에 그려진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지만, 자신의 시선을 이들의 것으로부터 구별한다. 카메라가 싼샤의 산수에 도취될 수 없는 이유는 이 풍광의 흐느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완전히 죽지 못하고 자기 몸의 일부가 점차 썩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풍경의 눈물이다. 싼샤의 산수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부서지는 이 변화의 시공간에서 더이상 나아가길 거부하며 그 자리에 멈춰서 있다. 그리고 죽기도 전에(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유령이 되는 길을 택한다. 영화는 그렇게 찍었다. 그래서 카메라가 담아낸 싼샤의 자연은 그 자체로 초현실적인 연기를 피워낸다. 이것은 어쩌면 싼샤의 마지막 저항이 아닐까. 카메라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들을 바라본 뒤, 인물들이 프레임 밖으로 나간 뒤에도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다. 마치 싼샤의 소리없는 마지막 저항을 지켜보는 마지막 증인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과거의 찬란함을 돌아보며 전근대의 어느 시절을 향수하는 것은 아니다. <스틸 라이프>가 보는 싼샤의 진실은 사라진 풍경이 아닌, 지금 이 순간 그 부서진 공간 위에 발을 딛고 땀을 흘리는 인민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안개 낀 싼샤의 풍경과 그을린 노동자의 단단한 맨몸

싼샤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산밍은 동네 건달들이 주관하는 마술쇼에 강제로 끌려간다. 그들은 백지를 달러, 유로화, 인민폐로 바꾸는 쇼를 보여주면서 자신들이 불러모은 구경꾼들로부터 관람료를 갈취한다. 이 장면은 세계화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기도 하지만, 돈이 돈을 낳는, 즉 자신의 회전 속에서 확장되는 자본의 본질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에 비한다면, 영화 속에 삽입된 <영웅본색>의 일부, 즉 “우린 모두 옛날을 그리워하지”라고 말하며 지폐에 멋지게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던 주윤발의 모습은 자본을 조롱하는 자본주의의 반영웅을 보여준다. 그러나 싼샤의 현실 앞에서 주윤발은 그저 낭만일 뿐이다. 주윤발을 꿈꾸던 청년 마크는 결국 근대화의 파편들에 깔려 죽었다. 지아장커는 자본의 흐름에 승차한 건달들이나 판타지를 살았던 마크를 보며 슬픔의 한탄을 내뱉지만, 이들의 삶은 정작 그가 보고자 하는 인민들의 삶이 아니다. 그의 카메라를 움직이는 건 사라져가는 시간 한가운데에서 그 고단한 시간을 살아내려고 하는 인민들의 결단이다. 그는 죽어가는 풍경에 가장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길은 그 풍경을 살아 있는 죽음으로 담아내는 것이지만, 그 안의 인민들의 삶은 결코 유령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는 안개 낀 싼샤의 풍경과 검게 그을린 노동자의 단단한 맨몸이다. 이 둘은 근원적으로는 근대화의 상처를 공유하지만 대립되며 충돌하는 이미지처럼 보인다. 싼샤의 풍경 속으로 노동자들의 육체는 스며들지 않고 때때로 튕겨져나가는 느낌을 준다. 영화가 특정 숏 혹은 신을 붙이는 방식도 이와 연결된다. 이를테면 산밍의 이야기에서 션홍의 이야기로 넘어갈 때, 하늘에는 유에프오가 날아가고 션홍의 시선은 그걸 따라간다. 영화는 그런 다음 더이상 돌아가지 않는 녹슨 공장의 숏으로 시작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과 그 자리에 정지된 시간의 충돌. 션홍이 남편의 동료를 만나러 갔을 때, 문화재국원인 그는 싼샤가 수장되기 전에 서한시대 유물을 발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 장면 바로 뒤에는 파편으로 부서지는 건물의 모습이 등장한다. 복원과 파괴의 충돌. 다시 산밍의 에피소드로 돌아왔을 때, 산밍과 노동자들은 한 가수의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서글픈 공연을 지켜본다.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굳이 뒤돌아보지마. 이 땅 없이는 집 없고 집 없이는 당신 없고 당신 없이는 나도 없어.’ 이것은 사라지는 고향에 대한 회한과 향수의 노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 노래를 함께 즐기던 노동자들은 건물 철거에 매진하고 있다. 흥겨운 노랫소리는 건조한 망치질 소리로 전환된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생존을 위해 고향을 부수기. 이미지 혹은 의미의 이러한 충돌을 통해 영화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섣부른 감상주의를 경계하려고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가난한 인민들에게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슬퍼하는 일보다, 역사를 보존하는 일보다, 지금 현재에 살아남는 일이 절실하다. 나아가 이러한 배치는 표면적으로 충돌하는 이미지들이 사실은 동일한 사태의 두 가지 현상임을 보여주려는 정교한 성찰의 결과다. 근대적 시간 안에서 이 둘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언제나 함께 간다. 완전한 소멸이 이루어진 무의 지점에서 새로움이 증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 속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소멸의 피흘림이 이미 잠재되어 있다.

미래를 향해, 죽음과 함께 떠도는 노동자의 삶

션홍은 2년 만에 마침내 남편을 만난다. 그러나 다른 사랑이 생겼다고 말한 뒤, 싼샤의 시간을 떠난다. 그녀는 싼샤의 부서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남은 사랑과 기다림을 부순 뒤, 상하이라는 새로운 도시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산밍은 16년 만에 마침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아내를 찾는다. 아내는 오빠의 빚을 갚기 위해 팔려온 상태다. 그는 아내를 소유한 노인에게 빚을 갚을 테니 1년의 시간을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딸의 사진을 본다. 다음 장면에서 산밍과 아내는 폐허가 된 건물 안 모퉁이에 어색하게 서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사탕을 건네자, 남편이 아내에게 다시 건네준다. 둘은 만남 이후 처음으로 다정하게 마주앉아 서로를 보고 있다. 그때 그들 뒤로 거대한 건물이 붕괴되고 둘은 일어서서 그걸 지켜본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어떤 시간 앞에서 이들이 기어이 되찾으려는 시간. 산밍은 부서지는 시간 속에서도 부서진 가족을 끝끝내 붙잡는다. 영화는 가난한 인민들의 삶에 드리워진 자본의 교환논리를 끊임없이 환기해왔다. 이를테면 철거일은 일당 50-60위엔, 숙박비는 1.5위엔, 아내를 사온 돈은 3천위엔…. 그런데 산밍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아내의 빚을 대신 갚기 위해 1년의 시간을 요구한 순간, 빈곤한 노동자의 삶을 지배했던 교환의 논리는 속도를 늦추고 지연된다. 그 지연된 시간에는 1년의 고된 노동, 고된 기다림이 예정되어 있다. 영화는 이 지연된 시간, 그 시간을 감당하기로 결정한 어느 노동자에게서 자본 한가운데서 자본을 넘어서는 삶의 윤리를 발견한다. 산밍이 숙소로 돌아와 일당 200위엔을 받을 수 있는 산시의 광산으로 떠난다고 말하자, 동료들은 동행하기로 한다. 산밍은 그 200위엔의 대가로 감수해야 할, 예견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말한다. 잠시 정적이 감돈다. 카메라는 천천히 이동하며 이 노동자들의 침묵을, 그러니까 죽음과 함께 살아야 하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응시한다. 그리고 함께 길을 나서는 이들의 뒷모습을 비춘다. 땅을 소유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언제든 미련없이 떠날 수밖에 없다. 그때 산밍은 문득 뒤를 돌아본다. 두개의 고층 건물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줄을 타고 있다. 도약은 결코 불가능할, 오직 버티기 아니면 추락뿐인, 더 나빠진다면 죽음밖에 없을 그런 길. 그런데 산밍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려 동료들이 앞서간 미래의 길을 쳐다보고는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마치 여기나 거기나, 현재나 미래나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그의 결단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더 많이 벌어 아내의 빚을 갚고 아내와 딸을 데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 이 텅 빈 화면은 보는 이에게 부끄러움을 안긴다. 나는 산밍이 아내와 재회한 순간부터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내내 부끄러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걸 가르쳐주는 영화는 정말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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