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는 좀 쉬어가자. 숨어 있던 내 블로그가 드러났다. <붉은 돼지>의 이름을 딴 블로그의 배경사진으로 깔린 것은 2차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주력이었던 메서슈미트. 지난해에 플라스틱 모델을 사다가 조립해서 흑백으로 찍은 것이다. 얼마 전엔 이대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발견한 플라스틱 모델 전문점에서 영국 공군의 스핏파이어를 샀고, 지금은 용산 전자랜드의 취미코너에서 일본군의 제로센을 사서 조립하는 중이다.
어렸을 때야 전쟁도 그저 낭만으로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기를 좋아하면서 뭔가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낀다. 전투기라는 것이 원래 인명을 살상하는 기계가 아닌가.
<붉은 돼지>에 나오는 포르코는 기관총으로 상대의 엔진만 망가뜨린다. 이 애매모호함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애니메이터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당시 항공기를 디자인하는 일을 했단다. 한편으로는 비행에 대한 낭만적 동경, 다른 한편으론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기억. 이 둘을 적절히 화해시킨 것이 바로 비행을 하되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 포르코의 태도가 아닐까?
라파예트 에스카드릴
<라파예트>는 1차대전 중 프랑스 공군에 자원입대한 미국 청년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정확한 시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직 미국이 참전하기 전이니 비행단이 조직된 1916년 4월에서 미국의 참전으로 부대가 미 공군에 배속되는 1918년 2월 사이에 벌어진 일일 게다. 이 비행단을 거쳐간 38명의 미국인 조종사들은 20개월 동안 57대의 독일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미국의 청년들이 왜 남의 나라 전쟁에 지원했을까? 당시 미국 정부는 머나먼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에 말려들기 싫어 차일피일 참전을 미루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사회의 여론은 확연히 독일에 적대적이고 프랑스에 우호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몇몇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목숨을 걸고 프랑스를 지원하는 전쟁에 뛰어들어 자국 정부의 참전을 끌어내려 했다는 것이다.
참전의 이유야 각자 다르겠지만, 그들 모두가 공유했던 것은 “유럽의 자유를 지킨다”는 철없는 이상주의, 아니, 그 거창한 명분으로 위장한 비행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베르덩의 전선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참혹한 현실. 불타는 기체로 귀환한 고참 캐시디는 그 비행단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참고로, 그해에 베르덩 하늘에서 영국 조종사들의 평균수명은 3주에 불과했다.
뉴포르와 포커 삼엽기
영화에서 ‘라파예트 비행단’의 조종사들은 뉴포르(Nieuport 17)로 무장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당시에 루이스 기관총을 장착한 130마력의 뉴포르는 연합군이 보유했던 가장 우수한 기종으로, 영국 공군 RAF에서도 이를 주문해 사용했다. 단엽기 포커 아인데커(Fokker E.1)는 뉴포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지 심지어 독일군에서도 이 비행기를 노획해 복제해서 쓰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포커 드라이데커(Fokker Dr.1)가 뉴포르의 맞수로 등장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포커 삼엽기는 디자인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대량 생산되지 않았다. 또 삼엽기가 모두 붉은색으로 도장된 것 역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붉은색으로 칠한 포커 삼엽기는 ‘붉은 남작’이라 불리는 독일의 에이스 리히트호펜과 그를 기리는 몇몇 조종사들만이 몰고 다녔기 때문이다.
라파예트 비행단이 베르덩의 하늘에서 마주친 것은 알바트로스(Albatros D.1)였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제공권은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 모두가 알바트로스라는 새로운 기종과 전설적 에이스 오스발트 뵐케가 직접 훈련시킨 전투비행단 야스타(Jasta) 덕분이었다. 포커 드라이데커는 그 다음 세대로, 알바트로스에 밀린 프랑스쪽에서 새로 스파드(Spad) 시리즈를 내놓자 거기에 맞서기 위해 독일이 개발한 기종이다.
비행선 역시 사실과 다르다. 실제의 체펠린 L32는 파리가 아니라 런던을 공습하러 출격했다. 또 벌건 대낮이 아니라 한밤에 서치라이트에 걸려 마침 공중을 순찰하던 영국 공군 조종사에게 격추되었다. 아무리 호위기를 대동했다 할지라도 가스 덩어리나 다름없는 비행선을 몰고 벌건 대낮에 공습에 나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이 역시 붉은색 삼엽기처럼 영화의 시각적 효과를 위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도그 파이팅
재미있게도 공중전을 영어로 ‘도그 파이팅’이라고 한다. 개싸움에도 규칙은 있다. 가령 영화에서 독일 공군은 태양을 등지고 고공에서 급강하를 하며 공격을 해온다. 이는 이른바 ‘뵐케 수칙’(Dicta Boelcke)에 따른 독일 야스타의 전형적 기동이다. 8개의 조항으로 된 뵐케 수칙의 첫 번째가 바로 그것이다. “1. 공격하기 전에 적보다 높은 고도를 유지하고, 가능하면 태양을 등져라.” 급강하로 속도를 높이고, 햇빛으로 적의 시야를 가리기 위함이다.
영화에서 자주 보는 장면은 뵐케의 다섯 번째 수칙과 관련이 있다. “공격을 하기 전에 적기의 꼬리에 따라 붙으라.” 일단 꼬리가 잡히면 격추를 피하기 어렵다. 꼬리가 잡히면 적의 조준을 방해하기 위해 좌우로 스윙을 하거나, 공중으로 솟구친 뒤 루프를 그려야 한다. 루핑에 성공하면 외려 적의 꼬리를 잡을 수도 있지만, 자유 낙하하는 기체의 수평을 회복할 때 조종사는 4G가 넘는 기압을 견뎌내야 한다. 영화에서 라파예트의 조종사는 뒤에 바짝 따라붙은 적기를 따돌리기 위해 갑자기 속도를 줄이면서 고도를 약간 높여 자기 비행기의 랜딩 기어로 뒤따라오던 적기의 윗날개를 망가뜨린다. 교본에는 없는 재미있는 기동인데,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다. 태평양전쟁 당시에 미 해군의 와일드캣을 몰던 서덜런드가 제로센을 몰던 사카이의 추적을 따돌리는 데에 이와 비슷한 기동을 사용한 적이 있다.
곡예비행의 아버지는 포커 독일의 에이스 막스 임멜만. 그는 절반의 루프를 한 뒤 기체를 뒤집는 이른바 ‘임멜만 턴’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몰던 포커 단엽기의 엔진으로는 그런 기동이 불가능하단다. 실제로 그가 사용했던 것은 90도 각도로 위로 솟구쳤다가 실속 상태에서 그대로 추락하여 다시 떨어지는 것으로, 오늘날의 ‘해머 헤드’에 가까웠다. 영화에서 캐시디는 이 기동을 이용해 체펠린을 파괴한다.
창공의 법칙
비행사들의 농담 중에 ‘창공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비행은 결코 위험하지 않다. 위험한 것은 추락이다.’ ‘양호한 착륙이란 당신이 비행기에서 걸어나올 수 있는 착륙을 말한다. 우수한 착륙이란 다른 사람들이 비행기를 다시 쓸 수 있는 착륙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실수로부터 배우라. 그 모든 실수를 직접 다 해볼 정도로 당신이 오래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생존의 법칙. ‘늘 이륙횟수와 착륙횟수가 일치하도록 관리하라.’
이런 조항도 있다. ‘프로펠러는 선풍기와 같다. 선풍기가 멈추면 조종사는 땀을 흘린다.’ 영화에서 실제로 라파예트의 조종사는 적기의 사격으로 프로펠러가 멈춘다. 이 경우 조종사는 곧바로 기수를 숙여 활공에 들어가야 한다. 비행기마다 활공비가 있다. 가령 ‘1:10’이라면, 고도가 100m 떨어질 때 1000m를 날 수 있다는 뜻. 1차대전 당시의 복엽기라면, 영화에서처럼 활공을 해 불시착할 수가 있었을 게다.
또 이런 조항도 있다. ‘연료가 충분할 때란 오직 기체에 불이 났을 때뿐이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고참 캐시디가 느닷없이 신참들에게 권총 두 자루를 나눠주며 말한다. “기체에 불이 붙었을 때, 너희에게는 세 가지 옵션이 있다. 기체 안에 머물면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불에 타는 것, 수천 피트 상공에서 뛰어내리는 것, 아니면 신속하고 고통없는 방법을 택하는 것.” 1차대전 때에도 낙하산은 있었지만, 펴지는 경우보다 안 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복선
<라파예트>는 딱 내 취향의 영화다. 평론가들로부터는 서사가 허술하다고 혹평을 받았지만, 빈약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CG로 연출한 공중전 장면만은 볼 만하다.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좋아하는 원숭이들이 방방 뜨는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다. 브레히트처럼 ‘반(反)아리스토텔레스’를 외치며 아방가르드로 나갈 게 아니라면, 용가리 통뼈라도 극작술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서사가 허술하다는 <라파예트>에서도 위기의 해결은 앞에 깔아놓은 복선의 뒷받침을 받는다. 권총 두 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