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아론 유] “아시아계 배우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길”
2007-09-06
글 : 김도훈
<디스터비아>의 한국계 배우 아론 유

새끈한 스릴러 <디스터비아>는 샤이어 라버프의 매력이 빛을 발하는 영화다, 라는 문장에 대한 아론 유의 생각을 들어보자. 물론 그가 ‘<디스터비아>는 아론 유의 매력이 빛을 발하는 영화’라고 말할 만큼 뻔뻔한 배우는 아니니 안심하자. 다만 아론 유에게 <디스터비아>는 “여주인공 사라 로머의 비키니 덕분에 성공한 영화”일 따름이다. 79년생 한국계 미국 배우 아론 유는 이따위 귀여운 농담을 인터뷰에서 재잘거리며 깔깔거리는 배우로, <디스터비아>의 캐릭터 ‘로니’는 어쩌면 자연인 아론 유와 똑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람들이 나에게 로니 역에 대해서 계속 말을 해줬다. 나와 똑같다고, 나한테 정말 완벽한 역할인 것 같다더라. (웃음) 오디션을 본 지 단 며칠 뒤에 캐스팅 디렉터와 만났고, 다음날은 스필버그도 만나고… 뭐, 초현실적인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로니를 흔해빠진 아시아인 조연이라고 지칭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다. 할리우드의 인종차별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감지덕지 연기해야 했던 지난 아시아계 배우들의 역사적 슬픔과는 달리 아론 유가 연기한 ‘로니’는 캐릭터 자체의 매력만으로 오롯이 선 조연이다.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슬쩍 언급되고 지나가기는 하지만 인종적인 정체성이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으며, 심지어 <해롤드와 쿠마>의 존 조처럼 전통적인 아시아계 너드(Nerd: 유약한 공부벌레) 이미지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아시아계 미국 배우의 새로운 진화상이랄까. 몇몇 인디영화들과 TV시리즈에서 작은 역할을 맡고 연극 무대에서 경험을 쌓아온 아론 유에게 <디스터비아>는 정확한 투수가 던져준 스트라이크처럼 보인다. 아론 유에 따르면 각본가 크리스토퍼 B. 랜든은 이미 시나리오 초고에서 로니를 한국인 캐릭터로 설정했었단다. “아마도 10년 전이었다면 이런 역할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다.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줘서 고맙다.”

아시아계 배우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냐는, 어쩔 수 없이 장중하고 숙연한 질문에 그는 길게 답했다. “하야카와 세슈라는 일본인 배우를 알고 있나. 그는 무려 40여편의 미국 무성영화에서 로맨틱한 남자주인공을 맡았던 전설적인 배우다. 하지만 하야카와 이후로 지금껏 그와 같은 배우는 나오지 않고 있고, 그 뒤로는 미키 루니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일본인 역할을 맡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됐다. 흑인의 경우도 시드니 포이티어가 나오기 전까지는 영화에서 스테레오 타입화된 흑인밖에 볼 수 없지 않았나. 동양계 배우들은 여전히 스테레오 타입과 싸워야 한다. 아시아계 미국인 아이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따라할 수 있는 롤모델이 필요하다. 브루스 리처럼 말이다. 내가 맡는 역할들 역시 배우를 지망하는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회의적인 사람들은 아론 유의 생각이 일종의 몽상이라고 여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아론 유는 다음 스텝을 한층 더 높이 밟아올랐다. 곧 미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그의 차기작은 <21>.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천부적인 두뇌를 이용해 수백만달러를 벌어들인 MIT 학생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아론 유는 케빈 스페이시, 로렌스 피시번, 케이트 보스워스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연기한다.

“한국과 전화 인터뷰를 한다고 부모님에게 말했다. 부모님은 거의 광적이다. (웃음) 내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한다고 한국의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계신다.” 그의 부모는 20년 전 미국 텍사스주로 이민한 이민 첫 세대다. 이후 뉴저지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던 아론 유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배우가 되겠노라 선언했다. 하지만 아시아계 배우에게 떨어지는 배역(+출연료)이 얼마나 되겠는가. “땡전 한푼도 없어서 사람들에게서 생활비를 빌려야만 했던” 그에게 아론 유의 엄마는 조용히 말했단다. “얘야, 한푼도 줄 수 없단다.” 대신 그녀는 아들의 허름한 아파트에 음식을 보내는 것으로 못난 자식의 고통스런 아사(餓死)를 방지했다고 한다. “돈 대신 한국 음식을 계속 보내주셨다. (똑똑한 한국 발음으로) 갈비찜, 해물파전, 계란찜….” 그러니까, 아시아계 미국 배우의 새로운 진화상은 사실 한국 음식의 힘?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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