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전문가 100자평] <카핑 베토벤>
2007-09-14

카피스트는 작곡가가 손으로 쓴 악보를 여러벌의 연주용 악보로 깨끗이 옮겨적는 사람이라 한다. 문학작품의 교열을 보는 사람이 그러하듯, 카피스트 역시 작곡의 기본은 물론 작곡가의 의도도 어느정도 알아야 하리라. 누구나 알고있듯이 말년의 베토밴은 청각을 잃고 괴팍해졌으며, 고독과 궁핍을 견디며 십년만에 내놓은 걸작 9번 교향곡을 발표하는 자리에선 완전히 귀가 먹은 상태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영화는 그 마지막 상태에 상상력을 가해 여성 카피스트를 그려넣는다. 영화는 여성감독의 작품답게 주인공 안나가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카피스트로 일하는 것 조차 수많은 성희롱과 감정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곤경을 잘 담아내고 있다. 또한 그녀를 섣불리 베토벤의 연인으로 규정하지도 않는 데, 이 또한 영화의 미덕이라 할만하다.
영화의 최대 장점은 역시 음악인데, 십여분간의 9번교향곡 초연장면은 보는이를 숭고함 속에 빠뜨리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초반 도입부의 'B장조 대푸가'는 마치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이 그러하듯 음악과 화면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아주 만족스럽지 못한 이유는 상상된 이야기의 함량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마치 '기-승' 까지만 보고 오케스트라 공연보고 나니 끝나는 느낌. '전-결'은 어디에? (베토벤의 대사처럼 '구조 강박'인가?) 한참 재미있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니 런닝타임을 확인하게 된다. (런닝타임 104분이 짧게 느껴진다니, 영화가 그만큼 재미있다는 방증인가?)
빡빡한 서사를 기대하지 않고 클래식 음악을 한껏 들을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베토벤이라는 괴팍한 예술가의 부릅뜬 눈매를 사랑한다면 이 영화를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황진미/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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