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좋아한 사람에게는 웬만한 과오나 실수도 용서하고 한번 찍힌 놈은 영원히 찍힌다는 아시아적 가치를 존중하는 나는 배우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 있어서도 이 가치를 적용하곤 한다. 브래드 피트인데 좀 후진 영화에 나오면 어떤가. 정킷에서 브래드 피트를 만난 사람이 “말투가 경박하고 유머감각도 유치하던데”라고 말하는 걸 들었지만 뭔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가 비트겐슈타인까지 인용해서 대화를 해야겠어? 그랬다가는 전세계 500명 이상의 암살자가 그의 목숨을 노리게 될걸?
브래드 피트의 반대 급부에 그와 절친한 동료 맷 데이먼이 있었다. 그 이유는 잘 아실 것이다. 가까이 가면 땀냄새와 발냄새가 진동할 거 같은 옆집 하숙생 오빠를 내가 7천원을 내고 봐야겠냐는 말이다. 사실 그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를 유명 배우로, 또 작가로 알린 <굿 윌 헌팅>이었다. 하버드 출신이 이런 걸 쓰고 또 자신이 주연을 했다는 게 한심하고 유치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울대 출신 배우가 서울대생들을 전형적인 수재로 묘사하고 서울대생들이 부러워할 천재로 직접 출연한다는 건 코미디 아닌가. 알면서 왜 이래? 너 하버드 아니지? 라는 의심이 들었다는 거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나의 영화배우 순위도에서 바닥을 차지하던 맷 데이먼이 급상승을 하게 된 계기가 있으니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이다. 본 시리즈가 역사상 가장 느끼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첩보물, 또는 액션영화가 된 데는 시나리오나 폴 그린그래스의 연출력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맷 데이먼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제이슨 본은 분명 스파이더 맨이라도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은 민첩함과 두뇌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액션 영웅’이라는 말은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인류를 구원하기는커녕 그는 자기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 인간 아닌가. 또한 가끔씩은 거친 드라이빙 실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제이슨은 기본적으로 뚜벅이에 서민형 첩보원이다. 기차표를 끊기 위해 줄을 서고 총상 소독용 보드카를 사기 위해 잔돈을 꺼내는 첩보원을 만약 브래드 피트나 조지 클루니가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브래드 피트가 차를 태워달라고 하는데 여자가 거절하는 장면에서는 “말도 안 돼”, “사기야”라는 비명이 극장을 진동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하숙집 첩보원 맷 데이먼에게는 이 모든 게 너무나 ‘맞춤옷’처럼 잘 어울린다. 잘생긴 남자배우나 007이었다면 재빠른 추격과 거친 몸싸움을 위해서 운동이나 훈련 따위는 필요없겠지만 맷 데이먼은 매일 달리기를 하는 것조차 아메리칸 스타일의 자기 관리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투쟁처럼 보인다. 1편에서 제이슨이 자신의 금고 안에 있는 수백만달러를 찾아냈다지만 2, 3편만 본다면 쫓고 쫓기는 데 쓸 교통비를 마련하기 위해 제이슨이 한가할 때 식당의 접시를 닦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비행기 값을 한푼두푼 모으는 장면들이 기시감처럼 눈앞에 아른거릴 지경이다. 맷 데이먼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나올 수 없는 현실밀착형 첩보원의 디테일들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게다가 <굿 윌 헌팅>에서 <리플리>를 거쳐 ‘본’ 시리즈까지 자기 정체성의 혼란과 존재의 불안은 맷 데이먼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강건한 얼굴 속에 숨겨진 불안과 회의의 그늘은 <본 아이덴티티>의 청년기를 지나 <본 얼티메이텀>에서 장년기에 도착한 그의 얼굴에 이제 어떤 배우도 따라올 수 없는 이지적인 후광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하나가 예쁘면 열 가지가 다 예뻐 보이는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본 시리즈 이후 맷 데이먼의 인터뷰를 보면 그가 꽤나 괜찮은 인간이고 진짜로 지적인 배우처럼 느껴진다. 이를테면 본인이 제이슨 본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어떨 것 같은가라는 질문에 “갖가지 외국어를 술술 하고, 싸움 잘하지, 머리 좋지, 여자들이 줄줄 따르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뭐, 죄의식을 늘 지닌 채 살아가야 하지만, 그쯤이야”라는 그의 대답은 입에 발린 윤리적 대답을 하는 것보다 500만배 쿨하지 않나. 게다가 편당 1천만달러짜리 몸뚱이가 매일 애 보느라 밤을 샌다니 이런 맷 데이먼과 사는 여자는 누굴까. 부럽다, 부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