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드라마 <전차남>은 다소 독특하게 시작된다. 드라마 오프닝으로서는 흔치 않게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데다, 관례에 따라 유명 가수의 노래를 타이틀로 쓰지 않고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의 고전 <Twilight>를 메인 테마로 차용했던 것. 바니걸 행색의 소녀가 지하철을 타고 밤하늘을 날아올라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번성하게 만든다는 내용의 이 짧은 영상은,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오타쿠 청년인 츠요시가 극중에서 열광하는 것으로 설정된 가상의 애니메이션 <월면토 병기 미나>의 한 장면이다.
드라마의 히트 이후 정식 OVA로도 제작·발매된 <월면토 병기 미나>, 즉 <전차남>의 오프닝은 사실 원전을 가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1983년, 네명의 대학생들이 ‘제22회 일본SF대회’에 출품한 5분짜리 단편애니메이션이 바로 그것. 역시 ELO의 <Twilight>를 배경으로, 검을 타고 날아다니는 바니걸이 다스 베이더에서부터 건담에 이르는 무수한 캐릭터들과 맞서 싸우다 마침내 얼어붙은 지구를 녹이고 생명체들을 부활시킨다는 내용의 이 단편애니메이션은, 특유의 역동성과 재기 넘치는 패러디에 힘입어 관계자들과 팬들 모두로부터 극찬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다이콘’(Daicon)이라는 이름하에 1980년경부터 아마추어 창작 집단으로 활동해왔던 그 네 대학생들- 안노 히데아키, 사다모토 요시유키, 아카이 다카미, 히구치 신지는 자신감을 얻고 상업 프로덕션을 설립,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1984년 12월에 출범한 이 프로덕션의 이름이 바로 가이낙스(GAINAX)다.
오타쿠 집단 가이낙스가 걸어온 길
다이콘 시절부터 가이낙스 출범 직후까지, 이들은 철저히 오타쿠 집단의 정체성을 견지해왔다. 아직까지 <다이콘4>라는 이름으로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제22회 일본SF대회 출품작 속 숱한 인용과 오마주와 패러디의 리스트는 그 방증. 그러니 오타쿠의 연애 성장담을 다룬 <전차남>이 이 전설적인 오타쿠 집단의 숨은 창세기를 인용한 것은 가히 오타쿠로서 바칠 수 있는 최상의 경의인 셈.
하나 설립과 함께 단순 오타쿠 집단을 뛰어넘는 역량 또한 과시하고 싶었던 가이낙스는, 창립작품으로 극장용 대작 애니메이션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이하 <왕립우주군>)를 기획한다. 총제작비 8억엔이라는, 당시로서 이례적인 예산 규모와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참여 등으로 제작 당시부터 여러모로 화제를 낳았던 이 작품은 무엇보다 가이낙스 특유의 패러디나 오마주가 완벽히 배제된 정통 하드SF물. 연출을 맡은 야마가 히로유키를 비롯, 장편애니메이션을 제작해본 경험이 전무한 스탭들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왕립우주군>의 작화 수준은 시대를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시장에서는 쓰디쓴 실패를 맛봐야 했다.
그러나 데뷔전에서 추락한 그들의 자존심을, 다시 시장을 통해 수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이 오타쿠였던 탓에, 팬들이 원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여 가이낙스의 창단 멤버인 안노 히데아키가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든 OVA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1989), TV시리즈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 이하 <나디아>) 두편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당연히 두 작품에는 가이낙스의 특기라 할 패러디와 오마주가 곳곳에 매설되어 있지만, 지금껏 어디서도 보지 못한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명징하게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평단으로부터도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하지만 정작 안노 히데아키 본인은 <나디아>의 성공에 대해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공영방송 <NHK>를 통해 방영된 작품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개입을 많이 받았고, 때문에 작품의 완결성이 훼손되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는 팬들, 그러니까 오타쿠들의 수동적인 열광이 마뜩잖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디아>를 통해 미처 성취하지 못한 야심을 관철시키기 위한 안노 히데아키의 다음 행보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1995, 이하 <에반게리온>)으로 이어졌다.
히트 애니메이션을 넘어 사회현상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다소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에반게리온>의 첫 방영 무렵 성적은 퍽 좋지 못했다. 1995년 10월4일 방영된 첫회의 시청률은 1% 미만이었으며 심야시간대로의 편성 조정 이후 그나마 5~7%를 오가던 시청률은 마지막 26회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10%를 넘어섰다. 그러니까, 이른바 ‘에바 신드롬’은 바야흐로 종영 이후부터 마치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에바 현상의 촉발 진원 또한 오타쿠. 소년이 거대 로봇을 타고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과 싸운다는 플롯은 너무도 익숙하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의 소년은 로봇을 타지 않으려 도망치는데다가, 적은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나타나는지 모른다. 초반부 미증유의 디자인으로 등장한 거대 로봇의, 호쾌하기 짝이 없는 액션신에 매료된 애니메이션 팬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이 애니메이션의 이야기와 세계관이 매우 다층적인 퍼즐처럼 짜여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는 곧바로 넷상의 뜨거운 토론으로 이어졌다. 본격적인 네티즌 토론 문화 형성은 <에반게리온>이 낳은 주요한 사회현상 중 하나로 기록되었는데, 작품을 통해 던져진 정신분석학, 성서 외전, 사해문서, 카발라(유대교 경전) 등의 코드들은 오타쿠들의 탐구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다음. 매회 네티즌의 먹잇감을 잔뜩 던져놓았던 안노 히데아키는, 그 모든 수수께끼를 그대로 남겨둔 채 마지막 2회를 주인공 이카리 신지의 사이코드라마로 마무리한 것이다.
TV시리즈의 결말에서 보여진 안노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작품에 매몰되지 말고, 이카리 신지에 투영된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라는 것. 하지만 팬들은 그것을 <에반게리온>의 진짜 결말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충격적인 결말 탓에 뒤늦게 불붙기 시작한 <에반게리온>에의 열광은 VHS나 LD 등 파생 상품의 대히트로 이어졌다. 1만5천장 판매를 성공의 척도로 보는 LD시장에서 <에반게리온>은 회당 10만장의 대기록을 세웠으며, 오프닝 테마 <잔혹한 천사의 테제>는 에니메이션 주제가 사상 두 번째로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바야흐로 범대중적인 인기 애니메이션을 넘어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매김된 <에반게리온>의 팬들이 다음으로 요구한 것은, 극중 남겨진 질문들의 해답이 모두 충족된, 진짜 결말이었다.
1997년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사도 신생>과 1998년 <신세기 에반게리온: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개봉과 기록적인 히트는, 이 시리즈물이 70년대의 <우주전함 야마토>, 80년대의 <건담>에 이어 90년대 애니메이션의 이정표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두 번째 극장판을 통해 TV시리즈의 남겨진 숙제, 그러니까 ‘인류보완계획’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점은 밝혀졌을지언정, 안노 히데아키의 메시지는 TV판의 결말과 큰 차이가 없었다. ‘타인에 의해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광장으로 나오라’는, 오타쿠들을 향한 그의 어조는 극장판을 통해 더욱 무게가 실렸으며, 그 같은 주제의식은 이후 안노가 연출을 맡은 두 작품 <그와 그녀의 사정>(TV시리즈, 1998), <Re: Cutie Honey>(OVA, 2004)에까지 동어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신세기 가이낙스, 그리고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
그 목적이 무엇이었건, 결국은 오타쿠 지향적이었던 가이낙스는 2000년 이후 새로운 노선을 취하게 된다. 전과 같이 실험적인 성향의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매진하는 한편(<FLCL> 등), <마호로매틱> (2001)이나 <이것이 나의 주인님>(2005)과 같은 작품으로 본격 상업 애니메이션 시장에도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안노 히데아키가 12년 만에 새롭게 제작하는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신극장판의 프로듀서 오쓰키 도시미치는 2007년 9월 개봉을 시작으로 총 4부작으로 진행될 새 <에반게리온>에 대해 “스토리의 타임라인은 1995년 TV판과 동일하다. 하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밝혀, TV시리즈의 재편집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달리 말하자면 신극장판의 세계는 TV시리즈의 세계와 평행 우주의 관계에 놓여 있는 셈. 또한 오쓰키는 “일부러 난해한 말들을 늘어놓아서 당혹스럽게 만드는 테크닉은 이미 12년 전의 것”이라는 표현으로 형식이나 내용에서 90년대 <에반게리온>의 정서와는 확실히 결별하였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남은 것은 <에반게리온>의 산파, 안노 히데아키의 세계관과 메시지의 변화 유무일 것이다. 2002년 만화가 안노 모요코와의 결혼 이후 ‘건강한 오타쿠’로 거듭났다고 밝힌 바 있는 안노 히데아키의 2007년 현재의 가치관은 또 어떤 모습으로 이 새로운 극장판 시리즈에 반영될 수 있을까? 만약 과거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 시절과 같은 우주적인 감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신극장판 제작에 부치는 안노 히데아키의 선언에 희망을 걸어도 좋겠다. “<에반게리온>을 모르는 사람들도 즐기기 쉽게, 극장용 영화로서의 재미를 더해, 세계관을 재구축하여,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영상을 목표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