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폭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질문하는 영화 <폭력의 역사>
2007-10-15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크로넨버그식 폭력의 날인

이상한 일이다. 디지털의 시대가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필름을 오늘날에야 디지털적이라고 부를 만한 무차별적인 상상력의 캔버스로 다루었다. 인간의 신체는 곤충과 몸을 섞고, 기계와 성교하며, 환각은 현실을 밀어내고, 가상은 실재와의 경계를 지웠다. 목적의식과 윤리에서 완전히 해방된 환각과 착란에의 미치광이 같은 탐닉, 기계 혹은 곤충으로 변형된 성기 혹은 항문의 형상에 대한 페티시즘과 혐오, 폭력과 섹스 그리고 죽음에의 매혹, 정액처럼 혹은 침처럼 흘러내리며 멈추지 않는 쓰기와 고쳐쓰기와 덧쓰기 그리고 저절로 쓰여지기의 끝없는 순환. 하나의 신 안에서조차 고정된 의미작용을 멈추고 내부에서부터 불안정화와 변형을 강박적으로 거듭하기. 크로넨버그에게 변치 않는 진실이 있다면 <네이키드 런치>의 서두에 잠언처럼 등장하는 하산 이븐 사바의 말일 것이다. “진실이라는 건 없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산 이븐 사바가 이슬람 테러리즘과 자살특공대의 창시자인 11세기 이스마일파의 수장이라는 것이다.)

크로넨버그의 주인공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돌아와선 안 된다. 돌아와 이전의 자신이 되거나 각성된 자기가 된다면, 크로넨버그의 환각의 여정은 필연적으로 도구화된다. 그것은 환각의 숭고함, 혹은 변형의 활력에 대한 배반이다. 그의 관심사는 사건이 아니라 욕망이며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것이다. 혹은 비인간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것을 다시 쓰는 것이다. 파리가 된 사내는 다시 인간을 꿈꾸지 않으며(<플라이>), 인터존으로 추방된 작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네이키드 런치>), 자동차라는 기계 안에 육체와 함께 자신의 리비도가 영원히 봉인되기를 원했던 부부는 실패의 문턱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섹스를 나누고(<크래쉬>). 정신병원과 인간사회의 중간단계인 재활원에 들어왔던 사내는 다시 정신병원으로 추방된다(<스파이더>). 그의 영화에 단 하나의 논리가 있다면 그것은 환각의 논리이다. 더 포괄적인 초현실주의와 굳이 구분한다면 크로넨버그의 역겨운 상상력에는 그것이 비롯되는 억압되고 불안한 ‘몸’이라는 기원이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어쩔 수 없는 프로이트주의자다.

크로넨버그는 선한 이웃이 아니다

2005년에 만들어진 <폭력의 역사>는 이상한 영화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라는 환각의 시인의 골수 팬이라 해도 이 영화를 그의 것으로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평화로운 소도시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건실한 소시민 톰 스탈의 가게에 두 사내가 방문해 사람들을 위협하고 여점원을 강간하려 하자 톰 스탈은 두 사내를 죽인다. 미디어 영웅으로 떠오른 톰 스탈에게 필라델피아의 갱스터 포가티가 찾아와 톰을 조이 쿠삭이라고 부르며 그의 가족을 위협하자 톰은 포가티 일행도 살해한다. 톰의 가족은 그제야 톰의 본명이 조이 쿠삭이며 오래전 잔혹한 갱이었음을 알게 된다. 얼마 뒤 톰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의 형 리치로부터 전화를 받고, 범죄조직 두목인 형의 저택을 찾아간다. 형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모두를 살해하고 돌아온다.

줄거리만 보면 이 영화에는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기를 완강하게 저항하며 그 안에서 온전하게 버텨내려는 의지가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신은 명료하게 하나의 사건을 전달하고 그 안에서 인물들은 명확한 자리를 배당받는다. 게다가 ‘폭력의 역사’라는 품위있고 엄숙한 제목(크로넨버그는 과거를 다룬 적은 있지만 역사적 시간을 직접 다룬 적이 없다), 그리고 환각의 부재까지. 세상이 디지털의 경쾌함과 자유로움에 안도하기 시작하자, 크로넨버그는 오히려 필름의 안정되고 믿음직한 재현의 질감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를 통해 사건을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상상하기를 멈추고 세상을 근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크로넨버그가 변한 것일까. “예술가는 무책임한 것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던 무정부주의적 예술가가 갑자기 모범 시민이 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미국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크로넨버그에게 속았거나 아니면 당신 자신을 속인 것이다. 또한 크로넨버그가 갑자기 너무 착한 이웃으로 변신했다고 오인하는 일이다. 당신은 사악한 두 사내를 멋지게 해치운 톰 스탈의 눈부신 액션에 경탄하지 않았는가. 또 포가티 일당을 죽이고, 자신에 대한 마지막 위협인 형 일당까지 처리한 그의 탁월한 살인 기술을 보고, 그것이 슬퍼해야 할 일이라고 정말 느끼는가. 가족과 이웃을 악당들의 위협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톰은 정말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는가. 냉혹한 갱스터 출신이라 하더라도 그가 이제 충실한 이웃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만 준다면(톰은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 오히려 이 공동체는 그의 범죄경력으로 키워진 살인 기술을 공동체의 자위 능력으로 찬미해야 하지 않는가. 모든 살인을 완수하고 돌아와 침묵의 식탁에 앉은 그에게 그의 겁 많은 어린 딸이 접시를 조심스레 꺼내줄 때 그 딸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관객은 봤으나 등장인물은 보지 못한 첫 시퀀스

<폭력의 역사>는 미국사회 혹은 세상의 폭력성에 대한 성찰이나 근심이 아니다. 그것은 크로넨버그가 당신에게 걸어온 몹시 심술궂은 게임이다. 이 영화를 보고, 쾌락을 말하지 않고 근심을 말하는 것은, 크로넨버그의 제안을 무시하는 일이다. 첫 시퀀스의 트릭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는 인적이 드문 사막 지대의 한 식당에서 시작된다. 톰의 마을에 오기 직전에 두 사내는 한적한 모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물통을 채우기 위해 젊은 사내가 다시 모텔 식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주인과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녀가 모두 처참하게 죽어 있다. 물론 늙은 사내가 죽였을 것이다. 젊은 사내는 휘파람을 불며 그들 사이를 지나 물통에 물을 채운다. 이때 주방쪽 문이 열리고 여자아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밖을 바라본다. 사내는 아이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이 숏은 톰의 딸이 악몽을 꾸다가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는 두 번째 시퀀스로 이어진다.

첫 시퀀스의 이상한 점은 그것이 서사 안에서 아무런 기능이 없다는 점이다. 몇 장면 뒤에 이들 사내는 톰의 카페에 나타나 난동을 부리다가 톰에게 살해된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히 사라진다. 뉴스에 몇건의 살인사건 연루자로 얼핏 언급된 뒤로는 누구도 이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 크로넨버그는 왜 이야기의 전개에 불필요한 잉여의 신을 마치 주인공을 등장시키듯 사뭇 비장미마저 불러일으키는 유장한 움직임의 롱테이크로 공들여 찍었을까. 다음 신들에서 톰의 평온한 일상이 진행되다 이들이 다시 등장하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긴장과 불안을 불어넣는 극적 장치라고 말하면 간단하다. 그러나 이것이 이 신의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이 시퀀스를 관객인 우리는 보았지만 극중 인물의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까지 살해하는 이들의 잔혹성을 이미 본 우리는 극중인물들보다 더 열렬히 톰의 방어적 폭력을 지지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첫 시퀀스는 톰의 폭력 과잉을 은폐하는 효과를 관객에게 발휘한다. 그것이 없었다면 두 사내가 톰의 카페에서 원하는 게 돈인지, 여자인지, 살인인지 알 수 없다. 첫 시퀀스를 본 우리는 그들이 톰의 카페에서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감하지만, 실은 이 경우에도 완전히 확신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상황은 대단히 미묘하다. 사건이 벌이지고 있는 시점에, 누구도 두 사내가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이 저지르려는 범죄는 여종업원 강간이다. 그러니까 톰은 동료의 강간을 피하기 위해 두 사람을 죽인 것이다. 여기서 상대가 총을 들고 있었다 해도, 두 가해자 살해가 윤리적으로 정당한지는 단정짓기 힘든 문제다. 또 하나, 톰이 늙은 사내를 죽이는 순간, 톰은 총을 들고 있었고 늙은 사내는 넘어진 채 칼을 톰의 발에 꽂은 상태였다. 그는 꼭 총을 발사해 죽여야 했을까. 여종업원은 사후의 방송 인터뷰에서 “그들이 내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고 증언하는데 우리는 그 장면을 영화에서 보지 못했다. 또 다른 종업원은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 했다”고 과장해서 말한다. 톰의 리액션에는 미묘한 과잉이 있었고, 그것은 은폐된다. 늙은 사내의 얼굴이 톰의 총에 맞아 걸레처럼 짓이겨진 이 시퀀스의 종결부 숏은 그 과잉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그 사소한 과잉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물어선 안 된다. 문제는 크로넨버그가 왜 그런 미묘한 과잉과 은폐를 설정해놓고 관객이 그것을 잘 알아채지 못하도록 첫 시퀀스를 배치했는가에 있다.

약간 모자란 원인, 넘치는 결과

첫 시퀀스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모텔을 나와 짐을 챙기던 늙은 사내는 젊은 사내에게 “체크아웃하고 나올 테니 차를 이동시켜”라고 말한다. 잠시 뒤에 늙은 사내가 나왔을 때, 젊은 사내가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라고 묻자 늙은 사내는 “여종업원과 문제가 좀 있었다”라고 대답한다. 젊은 사내가 물통이 빈 것을 알고, 다시 모텔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두 남녀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다. 젊은 사내는 어린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처음 볼 때 이 신은 세련된 장르적 기법으로 촬영된 것으로 보였으나 영화를 다 본 다음 다시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다. 여기엔 어떤 생략이 있다. 결과(쓰러진 시체) 혹은 행위(격발)만 등장하고, 늙은 사내의 살인 행위와 죽은 아이의 모습이 생략된 것이다. 이 생략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이후에 이어진 톰의 살인신들에서는 톰의 액션 뒤에 카메라가 반드시 죽은 자의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첫 시퀀스에서 우리는 늙은 사내가 두 남녀를 죽였고, 젊은 사내가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이 확신에는 이 생략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닌다. 행위와 결과를 동시에 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첫 시퀀스에서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이 생략은, 톰의 카페신에서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과잉과 미묘하게 조응한다. 관객에게 카페에서의 톰의 살해 행위는, 첫 시퀀스에서의 두 사내의 만행에 대한 응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우리는 폭력의 과잉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못 본 척한다. 그들은 얼굴이 걸레처럼 짓이겨져 죽어도 싸다! 이것은 인과응보이며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나면 무언가 모자란다. 징벌의 폭력은 약간 넘치는데, 죄악의 폭력은 약간 모자란다. 혹은 리액션은 넘치는데 액션은 약간 모자란다. 혹은 결과는 넘치는데 원인은 약간 모자란다.

톰의 폭력의 과잉의 거처는 어디인가. 우리 모두는 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관객인 우리의 욕망이다. 혹은 인간의 무의식에 잠복한 공격성과 잔혹성이다. 많은 대중영화들은 그것을 알고 폭력을 재현한다. 동시에 그것을 윤리적으로 심미적으로 정당화하며 의식의 세계에 편입시킨다. <폭력의 역사>도 그렇게 한다. 카페에서의 톰의 폭력은 즐길 만한 것이었다. 크로넨버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또한 정당한 이유도 제시한다. 하지만 어쩐지 충분치 않다. 크로넨버그는 폭력으로 우리를 만족시킨 다음,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윤리관이 해소하지 못하는 미세한 잉여를 남겨둔다.

아마도 그 불안한 잉여는 악몽과 같은 것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두 사내의 모텔신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톰의 딸의 악몽은 그래서 징후적이다. 톰의 딸이 악몽을 꾸고 나서 “꿈에서 옷장에서 나와 그림자에 숨어 있는 괴물들을 보았다”고 말한다. 톰은 “괴물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톰의 아들은 “그림자 괴물들은 빛 아래서는 꼼짝할 수 없으니, 불을 켜놓고 자라”고 동생에게 말한다. 톰은 거짓을 말하거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 중이다. 괴물은 있다. 그것은 자기 밖에도 있고 자기 안에도 있다. 아들 잭의 말대로 그것은 빛 속에선 꼼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그 괴물은 자신의 그림자다. 심지어 첫 시퀀스는 딸의 꿈일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 시퀀스만 악마적이되 시적 정취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폭력을 즐기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갱스터와 조폭이라는 괴물의 영화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감추려 하는 우리 안의 폭력성을 편안하게 대리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잔혹한 그들은 온순한 우리의 쾌락을 위해 피흘리고 있다. 비유컨대 그들은 사회라는 인격체의 무의식이다. 알고 보니 톰은 그 스스로 괴물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자기 안에서 사라졌다고 믿고 있다. 그는 괴물 같은 건 없다고 말했으므로 그 말에 책임져야 한다. 그는 먼저 자신을 찾아온 괴물들(포가티 일당 3명)을 살해하고, 그 다음 필라델피아로 가서 더 많은 괴물들(형인 리치 일당 5명)을 영웅적으로 살해한 다음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괴물은 더 있다. 형 리치는 톰에게 “보스턴 아이들이 옛날에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 톰의 다음 방문객은 보스턴 아이들이 될 것이다.

더 나쁜 일은 설사 톰이 자신의 과거와 연관된 모든 인물을 제거하더라도, 첫 시퀀스의 두 사내는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들을 끝내 알 수 없다. 하나의 제도처럼 조직화된 범죄조직과 달리 그들은 밑도 끝도 없는 괴물, 존재의 그림자, 사라지지 않은 악몽 같은 존재다.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을 뿐인데도 <폭력의 역사>는 실로 괴이한 플롯의 영화다. 홈드라마의 세계를 사는 톰의 가족 이야기를 호러에 가까운 연쇄살인마의 이야기와, 서부극을 변형한 갱스터가 앞뒤로 감싸고 있다. 톰은 자신 안에 괴물이 있으므로 끝내 버텨낼 것이다. 그의 가족은 불행한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톰이 괴물임을 알아버린 아내는 톰 아니 조이와 등에 상처가 날 정도로 격렬한 섹스를 자기 집 계단에서 벌인다. 이 섹스는, 두 사내가 등장하기 전에 아내가 치어걸 옷을 입고 외딴집에서 벌였던 음란하지만 따분한 섹스보다 훨씬 자극적이지 않은가. 또한 톰의 소심한 아들 잭은 톰의 영웅적 살인 이후에야 자신을 괴롭히던 두 친구를 통쾌하게 묵사발로 만들지 않았던가.

크로넨버그는 근심하거나 비평하지 않는다. 다만 차갑게 질문할 뿐이다. 이래도 당신이 폭력을 싫어하고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폭력의 역사>는 폭력의 장르를 횡단하고 무의식의 경계를 은밀히 넘나들며, 우리의 폭력적 본성을 자극하고 그것에의 윤리적 저항을 비웃고 굴복시킨다. 그 어조는 조용하고 진중한데, 솜씨는 너무 정교해서 오히려 사악하게 느껴진다. 그가 역사라는 말을 끄집어냈을 때,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화의 불가능성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 영화는 폭력의 역사라기보다 차라리 폭력의 날인(mark)이다. 크로넨버그는 선한 이웃으로 돌아온 적이 없다. 여전히 무책임한 예술가의 자리에서 그는 생애 최고작을 만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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