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록키> -가수 이석원
2007-10-26
록키, 그때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줘

나는 인생의 훼이보릿이 명확한 편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룹은 ‘펫샵보이스’이며 18년째 거의 매일 듣고 있는 인생의 음악은 그들의 <being boring>이고 살면서 가장 그리운 사람은 안토니오 이노키처럼 멋지고 웃긴 턱을 가졌던 내 친구 ‘이상문’이다.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배우는 <사관과 신사>에 나오는 ‘데브라 윙거’이고 되찾고 싶은 공간은 홍대 주차골목에 있었던 카페 ‘루카’이며 두말할 필요없는 내 인생 최고의 영화는 실베스터 스탤론 각본·주연의 <록키>이다.

난 남의 취향에 관대한 편이 아니어서 언젠가 음악하는 어떤 동생이 ‘서드 아이 블라인드’가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라기에 막 뭐라고 한 적이 있다. “네가 서드 아이 블라인드를 좋아할 수는 있어. 그런데 어떻게 ‘가장’ 좋아할 수가 있지? 어떻게 그런 애들이 너의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 될 수 있냔 말이야.” 존중할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는 취향이었던 거다. 그런데 내가 어디 가서 <록키>를 좋아한다고 하면 꼭 그런 반응들이 나온다.

“<록키>를 좋아할 수는 있어. 그런데 어떻게 인생 최고의 영화가 <록키>가 될 수 있지?”
<록키>는 내게 단순한 권투영화가 아니다. 인생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렸던 시기인 유년기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평생을 과거지향적 인간으로 살아온 내게 가장 멀리 돌아갈 수 있는 가장 성능좋은 타임머신이 어떻게 소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걸 타고 언제나 다섯살 때 영화를 보던 미도극장으로 날아갔다가 익숙한 필라델피아의 뒷골목 새벽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거나 날이 밝으면 광장에도 올라 러닝을 하곤 한다.

나의 완벽한 행복은 학교라는 델 들어가면서부터 끝나버렸다. 선생님들의 충만한 사랑이 가득했던 유치원 시절. 덕분에 난 정서적으로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으며 지낼 수 있었지만 우리 삼총사의 라이프 사이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만으로도 그 시절 또한 어둠의 징조는 피할 수 없었다고 봐야 한다. 어느 날이었다. 생일이 2월이었던 동호가 우리는 가지 않는 어떤 곳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은 아침이면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는 노란 모자를 쓰고 어색하게 유치원엘 갔고 홍이와 나는 비어 있는 삼분의 일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1년 뒤 우리도 유치원엘 갔지만 동호는 다시 학교라는 곳엘 들어갔다. 그때부터 우리는 늘 엇갈렸다. 우리가 1학년이 되면 동호는 2학년이 되었고 우리가 6학년이 되자 그애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번엔 아예 이사까지 가버리면서 이후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이 사연 같지도 않은 사연에 과연 공감이 가는가? 생일이 빠른 어릴 적 친구가 1년 먼저 학교에 들어가는 바람에 어울리지 못하다가 급기야 중학생이 되면서는 연락이 끊겨버렸다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는 건지. 그런데 나의 경우는, 어린 시절에 무슨 엄청난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거창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과거지향적 기질이 정말 유난했다. 학교 다닐 때 애들이 ‘공상’을 할때 난 ‘회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혼자 있을 때 하는 일은 늘 ‘회상’이 대부분일 정도로 ‘그리움’에 절어 살았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임수정이 환상 속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슬픔에 잠기는 것, 설렘, 망설임, 쓸데없는 공상,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 가장 큰 죄인 동정심까지. 이 일곱 가지 칠거지악 중에 실제 박찬욱 감독이 가장 자주 범하는 죄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공상’이란다. 창작이란 바로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게 아니냐면서. 난 그 인터뷰를 보면서 웃었다. 창작하는 사람인 나는 어찌된 게 ‘공상’이 아닌 ‘회상’으로 머릿속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가 해서 말이다. 팔거지악이 있다면 아마도 ‘추억에 잠기기’ 정도가 추가될 것이다. 그리고 내겐 그것이 팔거지악 중 가장 큰 죄가 될 것이며 늘 그것을 범하며 살아왔다. 동반되는 죄의 도구는 영화 <록키>. 나는 여전히 영화에서처럼 모두가 잠든 새벽길을 홀로 걸으며 집에 돌아와서는 거북이를 상대로 유치한 농담을 던지다가 잠이 들곤 한다.

이석원 / 밴드 ‘언니네 이발관’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