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여자의 모자를 보고, 끊어진 밧줄을 보고, 이윽고 칼에 찔려 죽은 사무라이의 시신을 본다. 패닉에 빠진 나무꾼은 한달음에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를 하고, 이로써 종잡을 수 없는 해괴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살인사건에 연루된 네 사람의 진술은 모두 확보됐다. 하지만 동일한 사건을 목격한 그들의 진술은 크게 엇갈리며,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다. 네 사람 중 진실을 말하는 것은 누구일까?
네개의 시각
체포된 도적 타조마루가 입을 연다. 사무라이를 기습해 묶어놓고 그의 아내를 겁탈했다. 처음에는 무섭게 저항하던 여자가 곧 자신과의 관계를 즐기는 듯했다. 자리를 떠나려는데 여자가 “자신의 수치를 두 남자가 알게 할 수는 없다”며, 한 사람이 죽기 위해 둘이 결투를 벌여야 한다고 말한다. 스물세합을 겨룬 끝에 사무라이를 살해했으나, 여자는 그 사이에 도망가고 없었다. 그도 여자 찾는 것을 포기한다. “그녀도 다른 여자와 다를 게 없었다.”
절에 숨어 있다 끌려온 마사고가 말한다. 자신을 겁탈한 뒤 타조마루가 자리를 뜨자, 남편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경멸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결박을 풀어준 뒤 단검을 주며 “제발 죽여달라”고 부탁하다가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 보니 남편이 단검을 가슴에 꽂은 채 죽어 있었다. 나 역시 강물에 뛰어드는 등 자살을 기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죽어서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무라이 타케히로는 무당의 입을 빌린다. 아내는 겁탈자의 유혹에 넘어갔다. 아내가 남편을 가리키며 도적에게 말한다. “저 남자를 죽여야 같이 갈 수 있어요.” 이 말에 충격을 받은 타조마루는 아내를 쓰러뜨린 뒤, 내게 여자의 생사를 결정하라고 말했다. “이에 나는 그를 거의 용서했다.” 순간 아내는 도망가고, 도적이 결박을 풀어주었다. 절망한 나는 가슴에 단검을 꽂고, 얼마 뒤 누군가가 그 단검을 뽑아갔다.
당황한 나무꾼은 실은 자신이 사건을 목격했다고 실토한다. 도적은 겁탈한 여인에게 자기와 결혼을 해달라고 애걸했다. 도적의 유혹에 아내는 두 남자가 결투로 결정하라고 말한다. 남편은 결투를 거부한다. “창녀에 목숨을 거느니, 차라리 내 말이나 챙기겠다.” 이 말에 도적도 여자에 흥미를 잃는다. 여인은 흥분하여 사내들의 명예심을 자극한다. “여자는 자신을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가는 거예요.” 결투 끝에 도적이 사무라이를 죽이나, 여인은 기진맥진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간다.
라쇼몽 효과
‘라쇼몽 효과’라는 게 있다. 기억의 주관성에 관한 이론인데, 여기에 따르면 동일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면서도, 그 각각이 모두 개연성을 갖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도 사건에 연루된 네 사람의 진술은 서로 엇갈리나, 그 모두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그 각각이 자기 자신에게는 참일지 모르나, 모두가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네 사람의 진술 중에는 논리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증인 중에 두 사람은 타케히로가 단검으로 자결을 했다고 말하고, 다른 두 사람은 그가 살해됐다고 주장한다. 살해됐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의 묘사도 서로 엇갈린다. 당사자인 타조마루는 자신이 스물세합을 겨룬 끝에 힘겹게 이겼으며, 사무라이 역시 명예롭게 죽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무꾼이 묘사한 결투장면은 이와 거리가 멀다. 두 사내는 서로 벌벌 떨며 졸전을 벌였고, 승자는 엉겁결에 이겼고, 패자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졸전인지 명승부인지는 주관적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문제는 역시 ‘타케히로가 자결했는가, 아니면 살해당했는가’ 하는 것이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자살을 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두 사내의 결투를 종용했다면, 당시에 여인의 생명이나 다름없던 정숙함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남편으로서도 자신이 자살을 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명색이 사무라이가 결투에서 도적에게 졌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타조마루는 왜 자신이 사무라이를 살해했다고 하는 걸까? 전설적인 도적으로서 자신의 명예 때문일 게다. 그는 지은 죄가 많아 어차피 죽을 목숨. 타조마루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사형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럼 나무꾼은 왜 그러는 걸까? 생각해보라. 자살한 사람의 가슴에 꽂힌 단검을 훔쳤다고 하면 윤리적으로 큰 문제가 될 터. 당연히 사무라이가 강도에 살해당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진리는 무엇인가?
사라진 단검을 나무꾼이 가져간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타케히로가 자살했는지 혹은 살해당했는지를 밝혀주지는 못한다. 나무꾼은 타케히로의 가슴에서 단검을 뽑았을 수도 있지만, 마사고가 떨어뜨려 땅에 꽂혀 있던 놈을 주워 챙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일까? 영화는 그 어느 쪽으로도 답을 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동일한 사건에 관한 네개의 진술은 끝까지 진위가 확정되지 않는다.
미국의 어느 비평가는 이 영화를 “원자폭탄과 일본 패망의 알레고리”로 읽는다.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영화에 굳이 상징적 해석을 가하자면, 차라리 영화의 시네마토그래피를 담당했던 미야가와의 말을 듣는 게 낫겠다. 숲을 찍을 때 카메라를 아래에서 위로 비쳐 나뭇가지들 사이로 해가 비쳤다가 사라졌다 하게 한 것은 허위에 의해 가려지는 진리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이 영화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라쇼몽>은 철저하게 해석학적이다. 네 사람의 엇갈리는 진술이 있어서가 아니다. 외려 감정과잉의 오버액션을 하는 스님 때문이다. 사실 영화에서 스님이 하는 역할은 거의 없다. 그는 영화 속에 있으나, 실은 영화 밖에 있다. 거기서 그는 영화 속에 없는 ‘진실에 대한 궁극적 믿음’을 대변한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이 영화를 좋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진리란 가려진 것이 드러나는 ‘탈은폐’(aletheia). 그는 이 진리의 궁극적 일어남을 믿는다.
스님은 진술이 엇갈리는 상황을 참을 수 없다. 영화 시작부터 “이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인간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지옥”이라고 외친다. 드디어 구원이 찾아온다. 진리의 부재가 진실의 회복으로 바뀐다. 나무꾼이 “오늘 같은 날 인간을 신뢰하는 게 어렵겠지만” 버려진 아기를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하자, 스님은 감격한다.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인간에 대한 신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해석학과 해체론의 경계
그런데 네 사람의 진술이 그저 거짓말이기만 한 걸까? 그들의 진술에도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고 하면 안 될까? 데리다에 따르면, 원래 진리란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 네개의 진술 역시 그저 허위에 불과한 게 아니라, 진리를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의 처지에서 사물을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제3자인 나무꾼의 증언 역시 주관적 해석에 물들어 있지 않던가.
주관적 해석, 상대적 관점들의 끝에 언젠가 ‘최종적 진리’에 닿으리라는 믿음. 이 초월의 욕망마저 버릴 때 해석학은 해체론이 된다. 초월적 기의는 없다. 영화의 바깥, 현실의 바깥은 없다. 영화 밖에서 궁극적 진리를 확인하는 스님만 없었다면, <라쇼몽>은 해체론적 영화가 될 뻔했다. 영화 안에서 영화 밖으로 초월하려는 스님의 오버액션. 그것 때문에 영화가 많이 촌스러워졌다. 게다가 아이를 안고 가는 나무꾼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밝은 햇살이란.
증언에 따르면, 구로자와 아키라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거대한 먹구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로써 영화 속의 상황이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려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 속의 상황은 현실 속에 사는 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얘기. 라쇼몽 위로 먹구름만 드리웠더라면, <라쇼몽>은 해석학을 넘어- 데리다에 수십년 앞서- 해체론을 선취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