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DC미니’라고 하는 비상한 기계가 완성된다. 필립 K. 딕의 단편에 등장할 법한 이 기계를 이용하면 타인의 꿈으로 들어가는 게 가능하다. 모든 과학의 허영이 그렇듯이, DC미니 역시 사람들의 심리 치료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사용 허가가 내려지기도 전에 기계는 도난당한다. ‘파프리카’라는 18살의 자아로 변신한 뒤 사람들의 꿈속으로 들어가 정신치료를 돕던 정신의료종합연구소의 아츠코 박사는 천재 도키타와 함께 기계를 찾아나서고, 개발에 참여한 동료 히무로와 사람의 꿈을 장악하려는 연구소 이사장이 도난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고나가와 형사와 함께 히무로의 꿈속으로 들어간 아츠코와 도키타는 DC미니의 폭주로 인해 악몽 같은 모험에 빠져들고 만다.
이것은 황홀경. 꿈속으로 뛰어든 주인공들의 모험은 넋놓고 따를 수밖에 없는 시청각적 롤러코스터다. 애니메이션은 원래 물리적 경계가 없는 매체지만 <파프리카>는 애니메이션이 지켜왔던 최소한의 물리적 경계마저 제멋대로 파괴하고, 화려한 색채는 끊임없이 관객의 망막에 폭죽을 터뜨린다. <천년여우>와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의 작가 곤 사토시는 <파프리카>를 통해 미디어와 현실,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테마를 건드리면서도 오시이 마모루처럼 거기에 함몰되는 법이 거의 없다. 대신 그는 원작자 쓰쓰이 야스다카의 활자유희를 애니메이션의 화력으로 영상화하는 데 신나게 집중한다. <파프리카>는 유이사 마사아키의 <마인드 게임>, 마이클 엘리어스의 <철콘 근크리트>와 함께 도달한 2000년대 일본 아니메 미학의 정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