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사랑 대신 전쟁을 짊어진 여왕의 귀환
2007-11-06
글 : 나호원 (런던 통신원)
세카르 카푸르 감독의 엘리자베스 3부작 프로젝트 2부 <골든에이지> 런던 시사기

1998년 작품 <엘리자베스>의 시대적 배경은 1554년이었다. 10년 뒤 만들어진 두 번째 작품 <골든에이지>는 1585년에서 시작한다. 엘리자베스가 왕좌에 오른 1554년과 노동당의 집권 초반인 1998년은 절충을 통한 새 시대의 개막이라는 공통분모를 갖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신교와 구교 사이에서 절충지점을 모색한 영국 국교회의 행보와 이념적 좌우 사이에서 실리적 행로를 찾으려는 제3의 길이라는 정치적 아젠다 속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고든 브라운이 토니 블레어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2007년이 과연 스페인 함대를 물리치고 잉글랜드의 왕위를 굳건히 다진, 나아가 대영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1595년과 겹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런 섣부른 판단이 자칫 감독의 야심찬 엘리자베스 3부작 프로젝트를 단순히 용비어천가로 전락시키는 과오를 부르는 건 아닐는지. 1998년과 2007년 사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야기는 2005년 <BBC>에서, 그리고 이듬해 <채널4>에서 각각 4부작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이러한 방송가의 열기는 2006년 엘리자베스 2세의 팔순 잔치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채널4> 시리즈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연기했던 헬렌 미렌은 같은 해 만들어진 영화 <퀸>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각도를 약간 틀어보자면, 이 <엘리자베스> 연작의 감독 세카르 카푸르는 인도 출신이고(그는 <밴디트 퀸>을 통해 서구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여왕 역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과 그녀의 충복인 월싱엄 역을 맡은 제프리 러시는 호주 출신 배우들이다. 영연방 라인업인 셈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제작은 워킹 타이틀 필름스가 맡았는데, 이 스튜디오의 두 주역인 팀 비번과 에릭 펠러는 현재 방영 중인 TV시리즈 <튜더스>의 제작을 맡고 있기도 하다(<튜더스>는 엘리자베스의 선왕 헨리 8세 이야기를 다루며, <튜더스>와 <엘리자베스> 모두 마이클 허스트의 펜 끝에서 나왔다). 더욱이 <튜더스>는 미국, 캐나다, 아일랜드의 합작품이며, 워킹 타이틀 필름스의 주요 지분은 유니버설픽처스와 스튜디오 카날이 소유하고 있다(물론 미미하나마 BBC필름도 함께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니까, <골든에이지>에 섣불리 속지주의나 속인주의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점이 이 영화(더 나아가 오늘날 영화가 만들어지는 경제적 상황)에 대해 거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면, 이 영화는 다른 여러 엘리자베스 이야기들 중에서 인간이자 여성인 엘리자베스를 다루기 위해 삼각관계라는 장치를 중심에 놓고자 하였고, 코스튬드라마라는 장르의 제도적 안착을 위해 의상과 그것이 놓이는 몸의 관계를 좇고자 하였다. 그리고 감독의 말을 따르자면, 과거의 역사를 현재진행형으로 놓기 위해서 ‘종교적 관용’을 미덕으로 깔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잉글랜드, 스페인, 프랑스, 스코틀랜드가 한데 얽힌 (서)유럽을 지도에 배치하고, 그 지도 위에 ‘전쟁’의 앞과 뒤를 이어붙이면 얘기는 그다지 멀어 보이지는 않을 테다(고든 브라운이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점이 좀더 흥미를 유발시키려나?). 다음은 세카르 카푸르 감독과 배우 케이트 블란쳇과 제프리 러시의 기자회견 내용.

-어째서 엘리자베스 시대에 집착하는가.
=셰카르 카푸르: 학생 때부터 역사책에 쓰인 연도보다는 거기에 담긴 정서가 중요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건들에는 엄청난 이야기성이 들어 있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벌어지는 모든 보편적인 이야기들. 그 안에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독될 수 있는 점이 있다. 그녀가 선언하는 ‘나는 버진 퀸이다’라는 말 안에는 권력자로서의 모습, 여성으로서의 모습,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다 들어가 있다. 그만큼 함축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버진 퀸’이라고 지칭하지만 거기엔 누가 그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당신 영화에서 역사적 사실과 픽션 사이의 관계는.
=셰카르 카푸르: 따지고 보면 역사의 기술이라는 것 자체가 객관적인 작업은 아니지 않나. 역사의 중심에 엘리자베스가 놓여 있고, 그래서 그녀를 둘러싼 수천명의 발언보다 그녀 혼자만의 이야기가 기록된다. 이처럼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도 결국 상징주의적 태도를 따를 수밖에 없다. 마치 카메라의 중심에 엘리자베스가 놓이듯이 말이다. 사실성을 위해 그 시대 언어 전문가를 옆에 두고 대사 연기를 점검하기는 하지만, 아무도 무엇이 정확한 재현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결국 모든 것은 인물 캐릭터와 배우의 해석, 촬영 분위기와 영화 전체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배우로서의 케이트 블란쳇에 대해 평가해달라.
=셰카르 카푸르: 이전 작품에서는 훌륭한 배우였는데 지금은 훌륭한 인간이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케이트는 꾸준히 성장하는 배우이다. 그래서 깜짝깜짝 놀란다. 삶의 경험을 연기 속에 녹여내는 사람이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고 많은 자료를 접했는데 어느 순간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하더라.

-이 영화에서는 인물의 의상만큼이나 카메라의 위치도 부각되었다.
=셰카르 카푸르: 서사극의 장대함과 개인의 섬세함을 함께 갖고 가고 싶었다. 시대적 상황은 스페인과의 전쟁처럼 상당히 거대하다. 그러면서도 그 중심에는 엘리자베스의 심리적 상황이 놓여 있다. 서사극 따로, 개인의 섬세함 따로 각각 떼어놓다보면 결국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양자가 빚어내는 충돌과 파열음이 상승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카메라가 궁정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식의 설정은 아래의 인물들을 상대적으로 작은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서사극의 언어를 지니지만, 그러고 나서 인물에 다가가는 카메라는 그만큼 그 존재에 밀착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발리우드와 할리우드를 모두 경험했다.
=셰카르 카푸르: 할리우드는 아직까지는 가장 큰 배급망을 지니고 있다. 할리우드만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파워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자신의 영화가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으면 하는 열망은 늘 갖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발리우드는 할리우드와는 전혀 다른 철학으로 돌아가고, 발리우드 관객은 이야기보다는 연희적 성격에 더욱 치중한다. 이 점은 발리우드의 특징이자 장점으로 봐야 한다. 아마 이 영화에서 시각적인 면이 드러난다면 이러한 발리우드의 영향일 것이다. 하지만 발리우드의 색깔은 엘리자베스의 색깔보다는 덜 화려할 수 있다.

-다시 엘리자베스 여왕 역을 맡게 되었다.
=케이트 블란쳇: 캐스팅 섭외가 왔을 때 망설이긴 했는데 감독과 제프리 러시, 의상 담당 등 이전 작품에 함께했던 배우와 스탭들과 다시 한다는 얘기를 듣고 출연을 결정했다. 이번 이야기는 지난번보다 훨씬 내면적인 모습에 집중해야 했다. 왕좌에 오르는 사건을 역동적으로 다룬 전작에 비해, 이번 작품은 절대 권력자의 내부에 가리워진 수많은 번민과 고뇌를 다루어야 했기 때문에 내면적 역동성을 섬세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 연기는 상당히 섬세하게 들렸다.
=케이트 블란쳇: 대사 하나하나가 정치, 외교, 종교, 게다가 엘리자베스 자신의 결혼문제까지 복합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집중력을 갖고 임해야 했다. 이전 작품 이후 엘리자베스를 다룬 여타 영화와 연극,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그 작품들이 대부분 빅토리아 시대의 시선으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하물며 1930년대식의 낭만적 시선으로 그녀의 재임 시절을 다룬 경향도 있었다. 나로서는 그런 시도들과는 차별성을 두고 접근해야 했다. 50년이 넘는 장기집권 안에서 그녀가 마라토너로서 이끌어가는 상황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점에 비해 나는 그 사이에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에, 그 반대편에서 겪은 경험도 도움이 되었다.

-전작보다 더 의상이 화려하다.
=케이트 블란쳇: 이 작품의 옷들은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훨씬 강한 인상을 준다. 지난번 작품에 쓰였던 의상들을 이번에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웠다. 이 영화에서 의상은 여왕의 권위와 권력을 그대로 반영한다. 연극은 마지막 리허설을 할 때야 비로소 의상을 입어볼 수 있지만, 영화는 의상을 입은 즉시 촬영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의상과 배역의 심리상태를 함께 이끌어가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녀가 모든 의복을 벗고 나체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의복을 입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남성성으로 보여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벗었을 때 남는 것은 그녀의 여성성이다. 그래서 대역 쓰는 일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나이를 먹는 것을 거부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만큼 그녀의 몸은 중요했다.

-10년 전과 비교해볼 때, 케이트 블란쳇과의 연기 호흡에서 달라진 점이 있는가.
=제프리 러시: 전작 <엘리자베스>는 내가 호주 밖에서 찍은 두 번째 영화였고, 케이트로서는 첫 번째 영화였던 걸로 안다. 그만큼 다른 곳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시나리오에 집중했었다. 그러고 나서 케이트는 성숙해졌다. 마치 롤스로이스 엔진을 장착했다고 해야 할까. 삶이 묻어 있는 연기를 해내더라. 나도 그 사이에 이런저런 역할을 했지만, 케이트는 그 이상으로 성장했다. 그러다보니 나로서는 많은 영감을 받았고, 그런 점이 이번 이야기를 해독해낼 때 서로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엘리자베스 이야기가 당신에게 얼마나 흥미로운가.
=제프리 러시: 10년 전에는 셰익스피어를 경유했다고 해야 하나. 개인적으로 연극 무대 출신이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동시대 극작가였던 벤 존스의 시선을 통해서도 독해했다. 55년의 통치시대는 그만큼 많은 얘기를 갖고 있다. 상상해봐라, 존 F. 케네디가 여전히 통치한다고…. 그녀 시대에 대한 기록은 골든에이지라는 말이 지칭하듯, 상당히 많은 기록들을 남겼다. 그것들이 지닌 저마다의 색깔을 감상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 아닌가.

-이 영화에는 당신과 케이트 블란쳇, 그리고 그녀의 분신과 같은 궁녀 베스의 역할을 맡은 애비 코니시까지 주요 세 인물이 모두 호주 출신이다. 호주 배우들이 영국의 전통극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제프리 러시: 우리 셋 모두 연극 무대에서 출발했다. 그만큼 연극 전통이 강하다. 한편으로는 호주 대륙이 지닌 지역적 고립이 모험심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한때 나 자신이 돈키호테 이야기에 끌렸듯이 말이다. 특히나 이 영화처럼 영국의 역사적으로 오래된 건물 속에서 촬영하는 작품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호주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 감옥이었으니까 말이다. 하하. 게다가 이 영화는 유럽 대륙이 신대륙에 대해 갖는 반응 또한 다루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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