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밝은 미래> -소설가 편혜영
2007-11-23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청춘아

이십대의 태반을 보습학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보냈다. 학원 옆에는 주유소가 있어서 열린 창으로 기름 냄새가 스며들었다. 냄새 때문인지 문제지에 고개를 처박은 핏기없는 아이들 때문인지 교실에 들어가면 자주 멀미가 났다. 도대체 뭘 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어 막막하던 때였다. 시험 대비용 문제지를 풀어주는 날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다. 이도저도 생각하기 싫어서 틈날 때마다 잠을 잤다. 어떤 꿈에서는 낯선 도시를 헤맸다. 어떤 꿈에서는 깨고 나면 새까맣게 잊어버릴 소설을 썼다. 간혹 아이들을 가르치는 꿈도 꿨다. 똑같은 문제를 계속 풀어주거나 답을 알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쩔쩔매는 꿈이었다.

친구는 날마다 전화를 걸어와 실패한 사랑 때문에 눈물을 쏟았다. 보습학원에서 아이들에게 문제를 풀라고 시켜놓은 틈에, 수업시간에 교수님의 강의를 듣다 말고 복도로 나와서, 자다 말고 일어나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친구는 사랑 때문에 죽고 싶다고 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친구는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그렇다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다고 대꾸했다. 친구는 잠깐 침묵했다. 나도 입을 다물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묘하게도 마음을 쓰다듬는 소리였다. 내 곁에서 누군가 숨을 쉬고 있어서였다. 친구는 뭘 좀 먹겠다고 했다. 나는 이왕이면 맵고 짠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친구는 흐응 콧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이후로도 우리는 오랫동안 비슷한 말을 주고받았다. 청춘이어서 그런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왜 모든 청춘은 지루하거나 뭔가에 실패하거나 불안한 꿈속에서만 허무맹랑해지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밝은 미래, 상처없는 평온한 미래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걸까. 어째서 어떤 꿈은 미래처럼 음울하고 막막할까. 어째서 도망갈 곳은 꿈속 아니면 감옥뿐일까. 어째서 마모루의 손가락같이, 혼란스러움을 잠재울 단 하나의 신호는 그렇게 금세 무참히 사라져버리는 걸까. 어째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는 길을 계속 가야 하는 걸까. 어째서 내가 바라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뿐일까. 어째서 이미 청춘을 지나보낸 사람들은 중고가전 제품이나 고치며 고물처럼 살아가는 걸까. 어째서 그들은 한결같이 현실이 비루할지라도 땅에 발을 딛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걸까. 그리고 어쩌자고 이런 질문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나는 마모루의 손가락이 딱딱한 용수철에 감겨 ‘가라’는 신호로 멈춰진 것이 좋았다. 그것이 비록 갈 데 없어 선택한 죽음을 뜻한다 해도 말이다. 마모루의 숨과 함께 사라졌을 손가락의 온기는 칭칭 감긴 용수철에 고스란히 남아 나와 니무라에게 길을 가르쳐줬다. 그것은 미래란 알 수 없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갈 수밖에 없으니, 어쨌든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주었다. 사려 깊은 누군가의 말보다, 경험 많은 어르신의 말보다 진심어린 손가락질이었다. 민물에 적응하여 살아남은, 그리하여 강을 온통 아름다운 분홍색으로 물들인 맹독성 해파리들도 마모루의 손가락 신호를 알아차린 것처럼 어딘지 알 수 없는 바다를 향해 천천히 흘러갔다.

나는 마모루가 니무라에게 말한 것을 흉내내어, ‘날 가리키면 기다리고 널 가리키면 가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기다리다’와 ‘가다’라는 사인이 정해지면 용수철같이 딱딱한 손가락을 들어올려 말할 거였다. “지금까지 난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가라는 신호는 벌써 떨어졌는데.”

편혜영/ 소설가 <아오이 가든>·<사육장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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