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죽여주는 꿈 구경
2007-11-30
글 : 김애란 (소설가)
시각적 풍요로움이 넘치는 상상력의 만찬 <파프리카>

꿈 구경을 했다. 파프리카라는 이름의 여자가 나오는, 2006년 일본산 꿈이었다. 나는 대낮의 상영관에 앉아 남의 꿈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등장인물들이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속도로. 술회를 통한 공감이 아닌, 그가 본 것을 나도 본다는 경험. 그 순간 꿈은 보는 꿈이 아니라 겪는 꿈이 된다. 등장인물들도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자기 꿈을 관람한다. 스크린과 모니터, 액자와 광고판. 창(窓)과 창(窓)은 겹겹이 포개져, 평일 오후, 영화관 의자에 상체를 묻은 나 역시 누군가 꾸고 있는 꿈의 일부가 아닐까 질문하게 만든다. 스크린 위로는 재패니메이션이 공유하는 질문 중 하나, ‘이 세계는 어떻게 프로그래밍돼 있나’ 식의 고민이 얼비친다. 개인과 네트워크, 과학과 윤리, 침략과 구원의 문제도. 나는 이 만화영화가 뭔가 과잉된 채 끝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감독은 작은 가지들은 가지들대로 가만 흔들리게 놔둔다. 대신 나무를 흔들리게 하는 힘, 장자의 날갯짓에 주목한다. 나비는 우리가 너무 자주 썼거나 쓰다버린 개념들 위에 잠시 앉았다 다른 데로 날아간다. 상기시키되 고정시키지 않으려는 몸짓. 그 안에는 꿈과 영화를 둘러싼 문화사적 배경과 그걸 갖다 쓰는 감독의 애정, 그리고 멋쩍음이 들어 있다.

<파프리카>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우리가 꿈의 질량을 잴 수 없는 것처럼. 대신 꿈의 질감에 대해선 조금 얘기하는 듯하다. 꿈은 물컹거리고 미끌미끌하다고. 그래서 도둑맞기 쉽고, 다른 이의 꿈에 잘 흘러들어간다고. 이야기는 한 과학기관이 만든 ‘DC미니’의 도난에서부터 시작된다. 꿈으로 사람을 치유하려는 연구자와 지배하려는 악당의 대립, 추적, 그리고 대결. 이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건 DC미니라는 설정이다. 자신의 총천연색 꿈을 녹화할 수 있다는 것. 타인의 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 장면 곳곳에는 알 수 없는 성적 긴장감이 흐른다. <파프리카>에서 가장 볼 만한 장면은 꿈을 다룬 부분이다. 시각의 만족에 우선해 정신의 자유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시공을 넘는 파프리카의 시원한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몇 가지 질문과 마주치게 된다. 저 단어와 이 사물은 제대로 배열돼 있지 않은데 왜 즐거움을 주는가? 죽음의 퍼레이드 행군이 내뱉는 정신 나간 말들은 왜 시적인가? 말도 안 되는 게 왜 말이 되는가? 두려움은 왜 매혹적인가? 질문의 답은 결국 ‘이 작품이 누구 편을 들며 끝나는가?’에 있을 것이다. <파프리카>의 세계는 크게 두개로 나뉜다. 낮과 밤, 현실과 꿈, 어른과 아이, 선과 악. 감독은 악당을 만들되 그가 속한 세계까지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는 꿈을 먹고 자라지만, 악몽을 먹고도 성장할 수 있다고 귀띔하는 듯하다. 파프리카는 악당을 죽이지 않는다. 파프리카는 악당을 삼킨다. 감독은 우리에게 어린아이가 되자고, 혹은 정신 차리고 성인이 돼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는 두 세계에 적절한 거리와 반성을 둔다. 작품 속, 어린애 같던 도키타는 책임감을 느껴 동료의 꿈속으로 뛰어들고, 냉철한 치바 박사는 도시를 구하기 위해 어린아이로 몸을 바꾼다. 감독이 지지하는 건 낮의 세계나 밤의 세계가 아니다. 그가 편드는 것은 ‘상상력’이다.

파프리카는 타인의 꿈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며 시각적 풍요로움을 선사한다. 날고, 뛰고, 변신하며 자신이 출연한 꿈의 장르가 뭔지,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얼마나 잘 의식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형식과 내용은 잘 맞아 이미지를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건 그냥 꿈이니까요’ 하고 도망치지도 않는다. 파프리카가 다른 세계로 넘어갈 때는 늘 일종의 틈, 즉 입구가 있다. 상자, 반쯤 열린 문, 지하 계단, 찢어진 스크린. 그녀가 딴 세계를 오갈 수 있는 건 당연하다.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나 ‘반쯤 열린 문’만큼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게 있었던가? <파프리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배경은 ‘영토’가 아니라 ‘경계’이다. <파프리카>에는 감독 곤 사토시가 ‘만화+영화’라는 장르에 대해 갖고 있는 ‘자부’가 비친다. 긴 잠에서 깨어난 도키타의 대사, ‘죽여주는 꿈을 꿨어’에 비치는 자족감. 매표소 앞에서 ‘어른 한장’이라고 말하는 코가와 형사의 미소. 나는 그 긍지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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