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삶에서 연기가 나온다, <킬러들의 수다>의 신하균
2001-02-20
글 : 최수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한낮의 바는 비어 있었다. 바텐더도, 피아니스트도, 자욱한 담배연기도 없었다. 햇빛만이 스스럼없이 카펫을 적시고 있는 정오의 바. 누군가는 그랜드 피아노의 흑백 건반 몇개를 건드렸던 것 같고, 누군가는 둥근 유리잔에 핏빛 와인을 한잔 따랐던 것도 같다. 이따금 피아노 소리에 이끌린 한두명 지나는 이들이 문을 열 때면, ‘그’가 아님을 알게 된 ‘그’를 기다리던 마음은 몇번인가 급한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신하균, 그가 오자, 자신들도 함께 기다렸다는 듯 바 안의 사물들은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폭신한 쿠션은 소파에 기댄 그의 품으로, 와인 잔은 그가 팔을 내려놓은 피아노 위로, 그리고 의자 하나는 창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제 카메라 조명에 그의 검은 가죽재킷이 빛나기 시작한다.

킬러와 용서

정우진에서 이정우로, 마치 말잇기를 하듯 신하균이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맡은 새 역할은 장진 감독 <킬러들의 수다>의 이정우라는 이름의 킬러다. 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다. “<킬러들의 수다>에 나오는 킬러들은 수더분한 사람들이에요. 직업이 킬러인 사람들이라고나 할까요. 의뢰를 받아서 일을 하긴 하지만 즐기면서 일을 하죠.” <킬러들의 수다>는 “이 시대에도 혹시 킬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며 “만약 킬러들이 있어서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사람을 죽여준다면 어떨까”를 실제로 보여주는 가상적인 이야기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킬러를 연기할 신하균의 요즘 화두는 ‘용서’. “제가 불교 신자인데요, 석가탄신일 같은 때만 절에 가지만… 책에서 이런 말을 봤어요. 용서는 남에게 베푸는 자비가 아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반성의 기회다. 스트레스 받고 누군가를 미워하게 될 때 그럴 때가 저도 있거든요, 그냥 묻어두곤 했는데 요즘엔 용서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가 다시 말한다. “킬러랑 용서… 모순이 있나요? 아닌 것 같은데요. 킬러들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용서를 하면 되죠,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마음속의 킬러가 있는 거구요… 어, 그러고보니까 이상하네? (웃음) 영화 다 찍을 때쯤에 얘기해 드릴게요. 지금은 확실히 잘 모르겠어요.”

삶과 연기

“끊기면 안돼요. 생각과 기억과 잠재적인 생각까지, 끊기는 게 아니에요. 일상의 모든 것은 연기로 이어지죠. 마찬가지로 일상을 살면서도 늘 연기 생각이 떠나지 않구요.” 이 말을 들으니 그의 홈페이지 ‘러브씬’ 첫 장면에 떠다니는 독백이 떠오른다. “나는 알고 있다. 내 삶의 경험에서 연기가 나온다는 것을… 나는 지금 준비중이다. 또다른 경험을….” <…JSA>가 아직도 극장에 걸려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북한군 정우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가 연기를 하지 않고 ‘그냥’ 산 시간은 벌써 7개월째다. “연기자들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그 휴식의 일곱달 동안 그는 “나름대로 제 시간을 가지고 사람들도 만나며” ‘경험’들을 준비했다. 그 경험을 토양으로 그는 지금 언제보다도 깨끗하고 싱싱한 새 잎사귀들을 돋아내고 있는 중. “<…JSA>가 잘돼서 주위의 기대가 커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나는 바뀐 게 없어요. 신경쓰지 않아요.” 전작의 성공을 무게로 느끼지 않을 만큼 삶에 기반한 그의 연기의 뿌리 역시 깊이 뻗어 있다. “건강해 보여요”, 말하니 “운동도 하고 하니까요”, 하며 자신도 뿌듯해 하는 눈치. ‘운동’이라 함은 “몸을 풀기 위해서” 류승완, 류승범, 정재영씨와 함께 배우러 다니는 중국무술 ‘십팔기’인데 꽤 재밌다고 한다. 인사동에서 십팔기를 하다 며칠 뒤에는 <…JSA> 팀과 함께 베를린영화제에 간다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행복하냐고 물으니, “그렇죠, 뭐”하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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