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이 변태적인 사랑 싸움
2007-12-27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결혼의 환멸에 대한 가장 진부한 판타지, <싸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의 집 부부싸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만큼 한심한 게 그 싸움을 구경하는 일이다. 아무리 픽션일지라도 부부싸움의 스펙터클 앞에 서 있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도대체, 왜 내가 여기서 남의 부부싸움을 보고 있어야 하지? 말하자면 <싸움>은 그걸 보고 있는 이를 내내 한심하게 만드는 영화다. 인물의 내적 변화도, 행동의 동기도 제대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주야장천 두 남녀의 잔인한 싸움 행각만을 나열하는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하는 바는 단 하나. 잘 보셨소? 결혼은, 아니 남녀의 사랑은 결국 환상에 불과할 뿐이오. ‘너 없으면 죽어버릴 테야’가 ‘너를 죽여버릴 테야’로 바뀌는 것이 결혼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자들이여, 기어이 피를 본 뒤 후회할 텐가? <싸움>은 한때는 부부였던 두 남녀가 서로에게 행하는 폭력을 통해, 그것이야말로 결혼의 환상이 거두어진 뒤 드러난 뼈저린 현실이라는 듯 말한다.

<싸움>을 본 뒤, 당장 지적하고 싶은 건, 영화가 극단적인 상황과 분노의 표현에만 치중한 나머지, 이야기와 캐릭터의 구성, 결혼과 이혼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전형적이고 안이한 태도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특정 우유, 휴대폰, 극장의 노골적인 PPL은 이것이 영화를 위한 광고인지, 광고를 위한 영화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그걸 일일이 나열하는 건 이런 영화를 보고 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비평이 되는 길일 터. 내게 정작 이상하게 생각되는 건, 영화가 남녀의 싸움을 결혼의 환상을 균열하는 현실로서 그 환상의 대척지점에 위치지울수록, 그들이 펼치는 각양각색의 싸움은 (아무리 장르를 고려하더라도) 어드벤처판타지 혹은 꿈처럼 찍히고 특정 장면은 실제 주인공의 꿈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영화가 결혼은 결국 판타지임을 말하기 위해 싸움을 끌어들였어도 이 영화에서 진짜 판타지처럼 보이는 건 두 남녀의 싸움이다.

그 싸움은 이들의 숨은 욕망을 지속시켜주는 환상, ‘법적인 부부를 넘어서는 부부관계’를 완전히 끝내지 않기 위해 붙드는 환상처럼 보인다. 이들이 다른 운전자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액션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자동차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이나 비오는 달밤에 쇠파이프를 창으로 삼아 칼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보자. 아무 이유없이, 아니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나 빼앗긴 시계추를 되찾기 위해서와 같은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서로의 목숨을 담보하며 싸울 때, 그것은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는 싸움이다. 싸움을 중지하지 않음으로써, 증오하고 맞고 복수하고 증오하고 맞고 복수하길 지속함으로써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도마조히스트가 되어 영원한 부부가 되리라? 그러므로 설경구와 김태희는 부부관계를 끝내고 싸움을 멈추기 위해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게 아니라, 둘 사이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별 사사로운 것들을 꼬투리 삼아 싸움을 한다. 이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서로를 쫓는 모습이나, 비를 맞으며 진흙탕 속에서 뒹굴 때, 그 장면들이 폭력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에로틱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뻔한 말이겠지만, 이들이 ‘너를 죽여버리겠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난 여전히 죽도록 당신을 사랑해’를 표현하는 도착의 수사다. 설경구가 아내가 떠난 집에 뭔가가 빠진 것 같다며 허전해하면서 아내가 가져가버린 시계추에서 그 결핍의 근원을 찾을 때, 그는 시계추가 아니라 시계추를 가진 아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결말이 가까워오자, 싸움에 지쳐버린 남녀가 결국 자신들이 그토록 붙잡았던 마지막 환상을 포기하려는 시점에 이른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그토록 원한다고 믿었던 말, 그러나 사실,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금지해야만 하는 화해의 단어, ‘미안해’와 ‘고마워’를 주고받은 뒤 각자의 길로 돌아선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영원한 이별을 예고하는 대신, 김태희를 출국금지시킴으로써 이들 사이에 새로운 싸움의 국면을 예견하며 관계를 기어이 지속시킬 명분을 제공한다. 참으로 변태적인 해피엔딩. 그리하여 <싸움>은 결혼의 환멸과 결혼의 환상이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 그리고 결혼의 환멸이 결혼의 환상만큼 사랑의 클리셰가 된 이 시대에 대한 가장 관습적이고 진부한 방식의 형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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