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인생이… 그렇죠
2008-01-11
글 : 김애란 (소설가)
고적한 시선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스틸 라이프>

몸 안으로 배가 지나가는 느낌이 난다. 내 속 물길을 따라 천천히, 한 시대의 결을 그리며 다가오는 양쯔호가 보인다. 물에 잠긴 뭇별들은 귀가 닳아, 빛을 잃고 풍화한다. 돌이 되고 콘크리트가 된다. 인민화폐가 달러화로 변하듯. 풍경이 풍경화로 바뀌듯. ‘변화’를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뭔가 지불해야 하는 사람들의 무지한 얼굴을 실고…. 원래 물이 많지만, 그것으론 늘 모자라, 차(茶)나 술(酒) 같은 것을 꾸준히 섭취해야 하는 내 몸 안으로. 배가 지나간다. 수림호가 떠나간다.

올해 마지막 영화로 <스틸 라이프>를 보았다. 2007년 개봉작 중 좋은 영화를 모아 재상영하는 기획을 통해서였다. 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대로 지나치면 그대로 작별할 것 같은 영화와 만나고 싶었다. <스틸 라이프>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 ‘사라져가는 것’들이 내 몸 안에 남긴 자국을 생각한다. 돌무덤에서 울려 퍼지는 마크의 휴대폰 벨 소리처럼. 보이지 않는다 해서 없어진 게 아닌 것, 없어진 건 아니지만 예전 같지 않은 것을 떠올린다. ‘나는 수소문할 것이 없다’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그런 게 없을 리 없는 사람의 마음으로, 배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 물살의 세기를 느낀다.

화면 위로 ‘사람 찾기’의 지난한 과정이 보인다. 16년 전 집 나간 아내를 찾는 산밍. 2년 동안 소식 없는 남편을 찾는 셴홍. 두 사람의 여정은 싼샤(三峽)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 싼샤의 신도시 개발 지역을 중심으로 겹치고 갈라진다. 이전부터 개발됐고, 지금도 개발 중이며, 앞으로도 쭉 개발 될 대륙에서, 언제나 ‘공사 중’인 대장정 사회에서, 점처럼 조그마한 인간들이 뭔가를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그 안에선 중간 계급도, 노동 계급도 잘 웃지 않는다. 물론 잘 울지도 않는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나 <인생>과 달리. 2차대전과 문화혁명을 겪고도 농담할 줄 알았던 소설 속 인물들에 비해, 대륙인의 표정은 더 피로한 듯하다. 수다스럽기로 소문난 중국인들은 금세기 싼샤 강변에서 침묵한다. 사탕을 우물거리며 한 시절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관망한다.

카메라는 ‘상실’의 풍경을 비추지만 수위 156.3m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강바닥을 뒤적이며 물먼지를 일으키지 않는다. <스틸 라이프> 속 인간들은 추억하지 않고 노동한다. 배를 타고, 담배를 빨고, 밥을 먹는다. 장면 곳곳에선 푸른 배추 잎이 자주 눈에 띈다. 폐허를 비집고 나오는 인민의 속살인 듯. 유구한 먹을 거리는 유구한 노동을 상기시킨다. 옛날에도 인간들은 뭔가 세우고 부수는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처럼 빠르게 진행된 적도 없었으리라. 2천년 된 도시는 2년 만에 사라지고, 사람들은 쓸모없는 주소를 쥔 채 방황한다. 일꾼들은 차악을 고민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조차 뭔가를 빨고 우물거리고 마시길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을 내색하는 대신 음식을 나눈다. 술, 담배, 차, 사탕. 고작 그것을 나누지만. 그것을 나누는 일만이라도 멈추지 않으려 한다.

감독은 산밍과 셴홍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피사체 뒤편을 보여주는 일에도 공을 들인다. 그들 뒤에(혹은 옆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뭘하는지 알고 싶어하고, 알려주려 한다. 주인공의 목적은 배우자를 만나는 데 있지만, 그가 정말 ‘만나는’ 사람은 혹은 ‘만나야 할’ 사람은 그들이 거기까지 가는 동안 마주친 주변인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오토바이 청년, 마술사, 유행가를 부르는 아이, 팔 없는 사내, 유적 발굴자, 춤추는 남녀, 망치와 괭이를 든 수많은 사람들…. 영화는 당시(唐詩)의 한 구절처럼, 고적하고 철렁한 시선으로 동시대의 얼굴을 그린다. 그렇게 부재하고 사그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보여준다. 비관 혹은 낙관이란 말은, 자신의 생명과 일당을 담담하게 저울질하는 이들에게 무색해 보인다. “급하게 가네요?” “인생이 그렇죠.” 스틸 라이프, 그 안에 이는 기운이 까무룩 나른한 듯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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