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진중권의 이매진] 팀 버튼의 어린이 되기
2008-01-10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파괴적이고 창조적인 동화적 상상력의 향연, <가위손>

<가위손>은 히에로니무스 보시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중세의 환상적 전통을 잇는 이 네덜란드 화가는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쾌락의 정원>에는 사람의 몸통을 한 새만이 있는 게 아니다. 칼날이 두귀 사이에 붙어 있는 모습의 괴물도 있고, 투구와 같은 금속성 머리를 가진 생물도 있다. 이로써 유기물과 무기물의 구별이 사라진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괴물들은 물론 중세적 환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질학적 차원으로 시야를 넓히면 그거야말로 과학적 사실이기도 하다. 광물에서 식물이, 식물에서 동물이, 동물에서 인간이 진화해나왔기 때문이다.

가위의 양면성

팀 버튼의 세계를 흔히 ‘고딕적’이라 부르나, 유기물=무기물의 판타지는 고딕이 아니라 로마네스크 전통에 속한다. 물론 팀 버튼이 가위손의 모티브를 미술사에서 끌어온 것 같지는 않다. 그 모티브는 어린 시절부터 팀 버튼의 머리를 사로잡아온 판타지였다고 한다. 굳이 손 대신에 붙어 있다는 설정이 아니더라도, 가위 자체가 이미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다. 가위는 양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위는 파괴적이면서 창조적이다. 그것은 끔찍한 범죄의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아름다운 예술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속에도 가위가 가진 이 모순적 측면이 모두 등장한다. 가위는 나무를 동물 모양으로 바꿔놓는 원예술의 도구이며, 개의 털과 인간의 머리를 세련된 스타일로 바꿔놓는 미용의 도구이며, 멋들어진 얼음조각을 만들어내는 조형예술의 도구가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물침대에 구멍을 내고, 제 얼굴 여기저기에 흉터를 내고, 소녀의 손을 베기도 하고, 소년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고, 짐의 팔에 부상을 입히기도 하고, 나아가 결국은 달려드는 짐의 복부를 뚫고 들어가 끔찍한 살인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상적인 것은 에드워드가 초등학교 학생들 앞에서 종이를 오려 복잡한 문양을 만들어내는 장면. 동화 작가 안데르센은 가위로 오려 만드는 실루엣 예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팀 버튼의 것은 안데르센의 것과 같은 동화적 상상력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저 밝고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이면에 뭔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는 것일 게다. 관객이 그의 눈을 빌려서 보는 세계에는 어딘지 이상한 데가 있다. 실제로 팀 버튼은 어느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자신은 주위의 모든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파괴적 성격

감독은 이 영화가 자전적으로 읽히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속의 에드워드를 어쩔 수 없이 감독의 알터 에고로 보게 된다. 그는 오래된 성에 혼자 살지만, 바깥세상에 매력을 느끼고 거기에 다가가려 한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만지려 하나, 그의 손은 날카로운 가윗날로 되어 있다. 그의 사랑은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게 상처만 입히고 만다. 이를 알기에 그는 제대로 세상에 나갈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눈 맞추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어느 수줍은 소년의 초상을 본다.

가위손은 하나의 인간형을 대표한다. 사람들은 가위손의 독특한 인격과 그의 화려한 예술에 묘하게 끌리나, 막상 다가서려 하면 날카로운 가윗날에 다칠 것 같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실제로 사회에는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에드워드에게 매력을 느껴 그와 친구가 되려 한다. 하지만 마을의 한 여인만은 처음부터 그를 사탄의 자식이라 부르며 경계한다. 결국 그는 사탄이라는 오해를 받아 마을에서 쫓겨난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악마로서 천재’라는 낭만주의적 영웅이다. “파괴적 성격은 타인의 오해를 허용한다.” 발터 베냐민의 에세이 ‘파괴적 성격’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에센트릭’(eccentric)이라고 하던가? 이른바 중심(center)이라는 이름의 평균치에서 벗어나 있는(ex) 성격이 존재한다. 그의 언행은 종종 평범한 이들의 오해를 사나, 파괴적 성격은 굳이 그 오해를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에드워드는 소녀의 부탁으로 남의 가택에 침입했다가 체포되나, 굳이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타인의 오해를 허용한다. 베냐민이 말하는 ‘파괴적 성격’은 아마도 동시에 ‘창조적 성격’이리라.

개인성벽

팀 버튼은 어린이 같은 느낌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가지고 와 작업을 한다고 말한다. “어린이들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존재라 할 수 있죠. 타락은 문화적인 것이니까요. 아이들 그림을 보면 다 똑같습니다. 누가 누구보다 잘 그리는 게 없죠. 거기에는 힘과 열정, 그리고 명확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당신이 문화의 틀 속에 들어가면서 문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거죠. 그런 틀을 깨고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힘과 단순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문화’라는 말을 ‘평균’ 혹은 ‘정상’이라는 낱말로 바꿔도 될 것이다. 교육이란 곧 ‘사회화’, 즉 아이의 개인성벽(idiosyncrasy)을 사회의 보편적 코드로 길들이는 과정. 교육을 마친 아이는 타인과 오해없이 정상적으로 소통하게 되고, 그렇게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철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코 보편자로 환원할 수 없는 개별자의 질적 차이는 그 과정에서 간단히 지워지고 만다. 평균을 정상이라 부르는 곳에 아직도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객관적 점수로 측정되는 양적 차이일 뿐이다.

파울 클레는 회화의 “근원적 시작”을 위해 원시부족, 정신병자, 어린아이의 그림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동안 인류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쌓아온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파괴는 창조를 위한 것이리라. 미술사의 맥락에서 고전주의의 파괴는 모더니즘의 창조를 위한 전제가 아니었던가. 바로 이 때문에 창조적 성격은 동시에 파괴적 성격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괴적이며 창조적인 가위손을 팀 버튼의 ‘어린이 되기’의 시각적 상징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변명으로서 내러티브

팀 버튼의 영화에서 흔히 지적되는 것이 서사의 문제. 사실 <가위손>의 경우에도 서사의 연결은 빈약하다. 실제로 에드워드가 살인까지 하게 되는 데에는 뭔가 비약이 존재한다. 이 서사의 빈곤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팀 버튼의 세계가 안데르센에 고딕적 분위기를 가미한 동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 서사의 연결은 인과관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을 전제하나, 아이들의 얘기에는 많은 경우에 조리가 없다. 배경마을의 집들에 칠해진 크레파스 같은 색깔은 팀 버튼이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색깔이기도 하다.

문자문학과 구전문학은 애초에 서사의 모드가 다르다. 가령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생각해보자. 에드워드가 가위손으로 얼음조각을 할 때, 얼음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가루가 하늘에서 눈이 되어 내린다. 영화의 마지막에 어느새 할머니가 된 킴은 손녀에게 아직도 에드워드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 증거로 아직도 마을에 예전에는 내리지 않았던 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이는 오누이가 죽어 햇님과 달님이 됐다는 전설처럼 사물의 기원에 관한 구전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팀 버튼의 사유가 은유적이라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로만 야콥슨이 지적한 대로 서사의 힘은 환유의 능력에 속한다. 은유에 강한 사람은 시인이 되고, 환유에 강한 사람은 소설가가 된다. 영화의 저자를 이미지에 강한 감독과 스토리에 강한 감독으로 나눈다면, 버튼은 분명히 전자에 속한다. 이 영상의 시인은 머릿속에 떠오른 시각적 인상에서 출발하여, 그것들을 실로 꿰어가는 식으로 영화를 완성한다. 시인들에게 종종 그러하듯이, 그에게 서사는 시각적 은유의 향연을 펼치기 위한 변명에 가깝다.

고딕풍의 성. 팝을 연상시키는 교외의 집들. 50, 60년대풍 패션. 에드워드의 펑크 복장. 그의 예술이 연출하는 현대식 헤어스타일. 서로 공존하기 힘든 시각적 요소들이 하나의 영화 속에 모여 있다. 그뿐인가? 영화는 에드워드와 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관한 동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상처난 얼굴은 바늘로 꿰맨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을 닮았다. 동화와 호러 역시 하나의 텍스트 안에 묶이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지 않은가? <가위손>이 히에로니무스 보시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은유적 상상력으로 실제로는 불가능한 결합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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