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프를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동화, 소설, 희곡 등)의 구조를 분석한 거였다. 좌표를 움직이는 기준은 하나, 그것이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였다. 그래프 모양은 행불행의 시간과 순서, 횟수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포물선, 사선, 다소 변형되고 짜부라진 계단…. 모두 내가 좋아하는, 나를 성장시킨 이야기의 뼈대들이었다. 그래프를 그린 이는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 그는 그래프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이야기는 밑바닥에서 시작한다고. 나는 ‘아, 그렇지. 우리는 정말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하고 끄덕였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재난’을 ‘이야기’를 통해 겪었던가 하고. 그는 좋은 소식에서 시작해 나쁜 소식으로 가는 이야기와 그 반대인 이야기, 그리고 좋고 나쁨을 쉽게 구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차례로 보여줬다. 그중 낯설었던 건 카프카의 소설을 도식화한 그림이었다. 카프카의 서사는 Y좌료를 따라 나쁜 소식에서 나쁜 소식으로, 매우 나쁜 소식에서 훨씬 나쁜 쪽으로 깊숙이 하강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보네거트는 그 곡선 밑에 수학 기호 하나를 붙여놨다. ∞. 무한대. 나는 잠시 그걸 바라봤다. 그런 뒤 이내 소리내어 웃었다.
비오는 아침, 극장에서 <검은 땅의 소녀와>를 보다 그 생각이 났다. ‘그때 나는 왜 웃었을까?’ 하는. 보네거트식 재치 때문일 수도, “불행-불행-무한대”란 공식이 하나의 거대한 농담처럼 느껴진 탓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두려워서였던 듯싶다. 우리 인생에 실제로 그런 서사가 존재할까봐. 그것이 내 것이 아니어도 될 이유가 없을까봐. 내 것이 아니라면 아닌 이유가 있을까봐. 자빠지는 개그맨을 보고 웃듯, 그때 나는 무한대∞를 보고 웃었다. 그건 진실이 아니라 형식이라고. 진실에 기여하기 위해 고안된 과장된 형식일 뿐이라 생각했던 탓이다 하지만 <검은 땅의 소녀와>에는 과장과 비약이 없다. 영화 속, 불행의 연쇄는 어떤 효과를 노린 ‘장치’가 아니라 이야기의 맨살 그 자체다. 맞으면 멍들고, 건조하면 트고, 불 쬐면 발개지는 피부, 그냥 그것. 성적이거나 정치, 문화적이기 이전의 살갗 그 자체.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슬프거나 아름답다 말하지 못한다. 영화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불운과 저 사고는 차분하게 진행된다. 모든 건 개연적이고 사실적이다. 나는 그 자연스러움이 힘들었다. 형식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게. 영화가 그걸 폭로하지 않고 중얼거린다는 게.
영화는 광부 최해곤(조영진)씨 가족의 삶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사물처럼 보여 더 인간적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이들을 사랑하라고 혹은 죄책감을 가지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저 영림을 영림답게 해곤을 해곤답게 보여줄 따름이다. 고작 두권의 책을 냈을 뿐이지만, 나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리고 그걸 ‘안다’라고 말하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시선의 높이를 조정하는 일. 특히 약자에 대해 얘기할 때 겸손, 허영, 도취, 동정, 오만을 떠나 응시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지금도 깨달아가는 중이다. 그런 시선은 단순히 전략이나 계산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영화는 어둠 속 탄(炭)처럼 까맣게 빛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막장으로 넘어간다, 탄광서 하얗게 늙어가네.’ 선술집서 조용히 퍼져가는 광부들의 노래처럼. ‘막장으로 넘어가 서럽다’가 아니라 그냥 ‘막장으로 넘어간다’라고만 말하는 어법 때문에. 죽은 닭을 보며 마루 위서 볕을 쬐는 동수의 평온한 표정과 가장 무표정하고 가장 진실하게 사랑할 줄 아는 아이 영임 때문에. 나는 죄 짓는 마음없이 결국 이 영화가 가진 조그만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만다.
상영관을 나오며 처음 든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글쟁이가 쓰는 말 중 ‘뭐라 말할 수 없는’처럼 바보 같은 표현도 없겠지만. 인간이 손에 쥐게 된 몇개의 그래프란, 그 ‘뭐라 말할 수 없음’의 어마어마한 바다에서 건져낸 최소한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문득 왜 사람들이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궁금해진다. 아마, ‘구원’ 때문이리라. 그러나 더러, 우리를 정말로 ‘살려줄 수’ 있는 것은 먼 하늘이 아니라,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땅, 발바닥으로 꽃을 찍는 검은 땅 위가 아닐까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