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김지영] 박복한 여자가 더 아름답지 않나요?
2008-01-17
글 : 강병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김지영

“넌 왜 그렇게 무식해? 쉽게 할 수 있는 걸 왜 꼭 그렇게 망가지면서까지 덤비는 거야?” “나 혼자 하는 거 아니잖아요. 다들 죽어라 고생하는데, 어떻게 나만 몸을 사려요. 흑흑.” 재벌 2세 실장님과 똑순이 부하 여직원의 대화가 아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을 촬영하는 동안 김지영은 실제로 남편과 이렇게 대화했다. 격한 운동 덕분에 근육을 지지하려 붙인 테이프는 짓무른 살과 함께 떨어져나갔다. 접질리고 굳어버린 발목은 그녀의 마음과 달리 꿈쩍하지 않는 날이 허다했다. 매일 온몸에 생채기를 안고 들어온 아내에게 남편인 배우 남성진은 속상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다그치기부터 했고, 남편의 마음을 고맙게 느끼면서도 감정이 복받친 김지영은 서글피 울었다. “제가 원래 좀 요령이 없어요. 그렇다고 다른 배우들이 몸 사리는 사람들 같으세요? 다들 더하면 더했지. (웃음)” 하긴 문소리와 김정은 등 만만치 않은 배우들이 참여한 <우생순>을 두고 주위에서는 “독한 것들이 모여 만든 영화”라고 말하곤 했으니 촬영현장의 풍경이 그려지는 것도 같다. “만약 <우생순>이 상을 타게 되면 가족들한테도 상을 줘야 할 거예요. 만날 아프다고 하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려니 가족들 마음이 어땠겠어요.”

<우생순>은 박복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녀들은 대한민국의 무한한 영광이나 운동선수로서의 명예 대신 생계에 대한 절박함 혹은 운동 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처지 때문에 코트로 돌아온다. 김지영이 연기한 정란은 매번 국가대표 선발에서 떨어지다 은퇴할 나이가 되어서야 국가대표 마크를 단 노장 핸드볼 선수. 집에서 고상하게 놀고 있어도 된다는 남편의 사랑이 고맙지만, 놀 수 없는 본능을 가진 그녀는 남편의 설렁탕 집에서 공기밥으로 패스와 리시브를 반복하던 중 태릉선수촌의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의 박복함은 단지 운동선수로서의 능력부족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가진 비애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더더욱 쓰라리다. 선수 시절 생리를 할 시기가 되면 엔트리에 빠질까 두려워 꼬박꼬박 호르몬제를 복용한 탓에 그녀는 불임을 겪는다. 하지만 아마도 박복함으로 치자면 그동안 김지영이 연기했던 다른 여자들도 밑질 게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나름대로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사람들은 그런 역할만 기억한다”고 하지만 ‘박복함’은 그녀의 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는 한량 차인표 때문에 속앓이를 했고, 남편인 남성진과 출연한 <제비꽃>에서는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자살했으며, <사랑은 아무도 못말려>에서는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 식당에 나가 쟁반을 날랐다. 비교적 최근 작품인 <내 사랑 못난이>의 차연은 그 모든 박복함의 완성일 것이다. 생계를 위해 안마사, 밤무대 가수, 청소부 등의 직업을 동시에 섭렵하는 그녀는 게다가 부모를 잃은 고아에 미혼모였다. “진짜 딱한 여자들이었죠. 울기도 많이 울어야 했지만, 눈물을 참기도 많이 참는 여자들이었어요. 하지만 정란은 그런 아픔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잊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른 여자예요. 그래 내가 이거 하나쯤은 접어줄게 하는 거죠. (웃음)”

스스로 “주어진 게 많은 인생보다는 발품 팔아가며 사는 사람이 좋다”지만, 사실 김지영이 연기한 여자들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조연으로 머물렀다. 어떤 이들은 <용띠개띠> <제비꽃> 등 설날, 추석, 심지어 가정의 달 특집드라마까지 연이어 출연하는 그녀를 ‘특집드라마 전문배우’로 부르기도 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이제는 호가 돼버린 복길이”의 연장선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연기자의 마음가짐과 집중력을 배운데다 배필까지 정해준” <전원일기>를 그 어느 작품보다 소중히 여기고 “작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캐릭터들은 모두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조연으로 아시지만, <우생순>에서도 저는 주인공이에요. (웃음)” 혹시 <우생순>이 그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주는 작품이 되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지난 13년 동안 한달 이상 쉬어본 적이 없는” 그녀는 당분간 활동을 중단할 계획이다. 그녀의 다음 결승전 상대는 바로 ‘아기’이기 때문이다. “결혼 4년차인데, 이제는 2세를 가지고 싶어요. 부모의 심정이 어떤 건지도 궁금하고, 아기를 키운다는 현실이 내 연기로 어떻게 표출될지도 궁금하고요.” 자신에게는 “공기와도 같은” 연기를 멈춰야 하는 게 아쉽지만 급하게 굴지는 않겠다는 게 새로운 경기에 임하는 그녀의 자세다. “정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기다려주시겠죠.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어머, 내가 막 이런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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