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질구질한 전 남자친구에게 도망치려다 구두 굽이 부러진 아미(김민희)가 소리쳤다. “니가 뭔데 또 내 인생을 망칠라 그래!” 결연하게 일어난 원석, 구두 한짝을 움켜쥐며 외친다.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비장해서 코믹하고, 폼 안 나서 현실감있는 그 표정. 세 여자의 사랑과 성장을 다룬 <뜨거운 것이 좋아> 속 주변인물 원석으로 김흥수가 제격임을 증명한 순간이다. 장난기 많고 껄렁껄렁하며 비루한 청춘의 자화상이랄까. 원석은 김흥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다. 그 자신은 <해신> 때문에 막판에 출연을 고사했던 <사랑니>의 김은영 PD가 카메오 수준이라며 설득하여 출연을 결심했다지만, 아마도 원석이 주연급 조연으로 격상될 것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내정된 사실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김)민희 누나한테 그랬어요. “누나, 나도 그 영화 할 것 같아. 근데 누나 안 하면 나도 안 하려고.” 그랬더니 누나가 (느릿느릿하게) “어어~ 나도 할 것 같아~.” 지금 그거 민희 누나 말투 따라한 거예요. (웃음) 일단 원석이라는 친구가 솔직해서 좋아요. 다른 남자 사귀는 전 여자친구가 “너보다 돈은 많아”라는데, “어유, 그럼 됐다” 이러면서 “한번만 안아주라”라고 하질 않나. ‘오만꼴깝’을 다 떠는데(웃음), 나도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럴 것 같아요. 예전엔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먼저 생각했는데, 이젠 누굴 사랑하게 되면 감정 그대로 다 표현하고 싶어요. 사실 지금까지는 항상 제가 먼저 떠났거든요. 만나서 힘이 되는 게 아니라 보기만 하면 싸우다보니까 일에도 지장을 받고, 싫어졌거든요. 원석이 다른 여자와 잔 것에 대해 아미에게 당당하게 말할 땐 ‘지금 너랑 끝낼래’ 하는 심정이었겠죠. 음악을 하고 싶은데, 아미는 결혼으로 부담을 주고…. 나 같아도 여자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접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실제 어떤 남자친구냐고요? 저 되게 잘해요. (웃음) 막 이래. 하하. 누구를 사귀든 둘이 서로 성숙해지는 관계였으면 좋겠어요.
눈물 콧물 흘려가며 엄마(고두심)에게 화를 내는, <꽃보다 아름다워>의 마마보이 김재수는 ‘김흥수의 발견’이었다. 1년에 10cm씩 자라 190cm에 달하는 키 때문일까. 훌쩍 웃자란 허허실실 캐릭터로 익숙한 까닭에 주말드라마 <깍두기>에서 다시 재회한 고두심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르고, 또래보다는 까마득한 선배들과의 작업이 “배울 게 많아” 더 편하다는 모습이 낯설다. 그러나 자신의 경력을 “애매모호”하다고 말하는 그는 본디, 반듯한 모범 청년에 가깝다. 모델 활동과 <학교> <똑바로 살아라> 등의 드라마 속 ‘하이틴 스타’는 여기 없다.
올해로 26살에, 연기생활 9년째예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후회는 없어요. 연기 못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고, 일하면서 순발력도 생겼지만 1, 2년 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굉장히 작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은 영화시장도 좋지 않고, 드라마도 해외시장 때문에 한류스타 위주잖아요. 지금의 상황을 인정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아직도 영화 한편 찍으면 그냥 이름 앞에 배우라는 명칭이 붙는 건 좀 창피해요. 젊고 어리니까,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얘가 이런 느낌도 있네’ 하는 식의 가능성으로 어필하고 싶어요. 주연, 조연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게 중요한데, 연예계 밖의 사람들과 더 친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게임동호회 오프라인 모임을 나가면 공부하는 사람, 바이올리니스트, 증권사 직원, 백수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젠 다 식구 같아요. 아는 형 회사 근처 지나갈 때는 그냥 나오라고 전화도 하고. 그런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연예계라는 울타리도 참 작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신문을 봐도 연예면, 스포츠면만 보는데, 그 사람들은 정치, 경제면까지 보잖아요. 공부가 많이 돼요.
지금은 친구처럼 함께 살고 있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CG슈퍼바이저로, “저보다 필모그래피가 더 긴” 큰형과 요리사인 작은형과 함께 살고 있는 김흥수는 천생 막내다. 애교를 말하는 게 아니다. 보기와 달리 어른스럽고 고집 센 것이 막내들의 특징. 아니나 다를까. 어릴 적 형과 장난치다 생긴 눈 옆의 상처를 “상담하러 갔던 성형외과에서 자꾸만 쌍거풀이니 코수술 같은 얘기만 하기에 그냥 생긴 대로 살자는 생각에 내버려두기로 했다”. 20대의 한복판에 선 그가, 한결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당연히 고민되죠. 군문제가 아직 남아 있는데,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그렇지가 않죠. 개봉을 아직 안 한 첫 주연작 <아버지와 마리와 나> 끝나고 너무 힘들어서 7개월 쉬었더니 한동안 작품도 안 들어오더라고요. 잠깐 쉬어도 그런데, 2년 넘게 공백기를 두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휴. 지금으로선 연기로 좀더 인정을 받은 뒤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조금씩 미루고 있어요. 근데 지금 제가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나이가 아니고, 오히려 서른 넘어서 성숙한 남자가 되면 기회가 더 많을 것 같기도 해요. 진로에 대해서, 남들에게 상담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도 고두심 선생님께 장난처럼 그래요. “어머니, 나 역할도 안 들어오고 죽겠어요, 뭐 해야 해요?” (웃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냥 가는 게 나을까 싶다가도, 같은 소속사에 있는 지섭이 형이 다녀와서 준비하던 작품이 계속 연기돼서 텀이 길어지는 걸 보면, 또…. 갈등이 많은 만큼 타협도 좀 하게 되는 것 같고요. 타협이란 그런 거죠. 지금에서 큰 변화는 주지 않는 선에서 다음 작품을 모색하는 거. 어쨌든 내가 한 선택에 아쉬워도 후회는 하고 싶지 않거든요. 여태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