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인물은 미숙이다. 그건 김정은의 연기나 문소리의 연기라는 뜻이 아니라 미숙(문소리)과 혜경(김정은)과 정란(김지영) 중에 더 감정 이입되는 쪽이 미숙이라는 뜻이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이 공유하는 느낌인 것 같다. 이 영화의 뜨거운 감정은 주로 미숙이 포함된 자리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미숙의 스토리 중에서도 그녀가 영화에서 보여준 강인한 결정 한 가지가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도록 내 생각을 붙들어매고 있다. 미숙은 왜 귀국하지 않고 결승전의 경기장으로 돌아왔을까, 이다.
올림픽 결승전 전날 미숙은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남편 소식을 들었고 공항까지 향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경기장으로 돌연 귀환했다. 문득 푸른색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감독 옆에 나타난 이 장면은 귀환의 놀라움을 배가시키기 위해 일부러 치장없는 평범한 앵글과 편집으로 잡혀 있다. 문득 미숙이 거기 있었다.
미숙은 왜 돌아왔을까. 제일 게으른 대답은 그래야 대중 장르영화의 마지막에 걸맞다는 것이다. 그게 장르적 컨벤션이기는 하다. 또는 가족의 비운에 얽매여 귀향하는 대신 자기 구현의 길을 꿋꿋하게 가는 것으로써 희망을 모색한다는 뜻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투적이다. 다른 이유가 있다. 만약 그녀가 남편에게 돌아갔다면 마지막 승부 던지기의 마지막 주자는 필시 혜경이나 정란이 했어야 할 것이다. 영화는 그걸 원치 않았다. 혜경은 한번도 실력으로 미숙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말했으니 그녀들의 인정에 따르면 혜경보다는 미숙이 나은 선수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미숙이 있다면 그 순간에 혜경이 던질 이유가 없다. 미숙은 승부 던지기의 마지막 주자가 되기 위해 돌아왔다. 사실은 패배의 동인이 되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미숙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화의 구조상, 미숙은 승부 던지기의 마지막 실패를 위해, 이 게임에 지기 위해 돌아왔다. 하지만 이게 미숙의 귀환에 대한 설명의 다는 아니다. 미숙이 끝끝내 돌아왔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동진·김혜리의 메신저 토크를 읽다가 그들의 대화 중 일부가 나의 이 질문을 포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혜경과 미숙을 보는 감독의 시선 내지는 캐릭터화에 대한 의견(“리더십은 혜경에게서 찾는 한편 연민은 온갖 생활의 짐과 불운을 짊어진 미숙을 향한다”, “혜경은 스포츠 안의 세계를 말하기 위한 인물이고, 미숙은 스포츠 밖의 세계를 말하는 인물”)과 “왜 마지막에 혜경이 아닌 미숙으로 하여금 공을 던지게 했을까”라는 질문 두 가지다. 나의 질문은 사실 이 둘의 대화와 모두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추론의 결과가 조금 다른 것 같으니 몇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내 의견을 말해도 될 것 같다.
<우생순>이 표출하는 아줌마의 세가지 층위
임순례의 지난 인물들을 되돌아보았다. 임순례가 지금까지 관심을 두어온 인물들은 사회적 소외에 놓인 소집단이다. <세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개개인들의 곤궁이 부각되는 집단이다. 인물 하나에 갈등 하나씩을 부여하여 그걸 풀어가는 방식이다. 임순례는 그들 소집단의 소속감이나 단결성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놓인 고민과 이슈에 관심을 둔다. <우생순>도 그러한 소집단에 대한 이야기다. 두 번째가 더 중요한데, 생각해보니 나는 임순례의 지난 두편의 장편영화에서 아직 주인공으로서 여자들의 소집단을 본 적이 없다. <우생순>에서 임순례는 최초로 여성집단을 자기의 주인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들을 지칭하는 특별한 용어가 하나 따라 붙는다. 이른바 ‘아줌마’다.
“아니 태릉이 경로당이야?” 실은 후배의 이 한마디로 태릉에서 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 수 있다. 여전히 체력과 실력이 있지만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이유로 그들은 퇴물 취급을 받는다. 이 점은 영화 초반에 특히 강조된다. 사실 <우생순>은 기획영화로서 많은 다른 영화와 비유할 만하지만, 그중에서도 노쇠한 퇴물들이 돌아와 벌이는 활약상이라는 점에서 <스페이스 카우보이>를 들 수 있다. 물론 <스페이스 카우보이>의 남자들은 실제로 노쇠했지만 미숙, 혜경, 정란은 신체적으로 우수하다. 중요한 건 노쇠한 우주 비행사들과 핸드볼 노장 여자선수들의 복권의 드라마에서 초반 핵심이 되는 것이 과학적인 것 반대편에 있는 그들의 아날로그적 신체 능력과 그 검증이라는 점이다. 세명의 노장 선수는 놀랍게도 이 점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뛰어넘는다. 감독 대행 혜경을 밀어내고 새로 부임한 감독 안승필(엄태웅)과 부딪치는 지점도 초반에는 대개 여기다. 안승필이 제안한 과학적 훈련 방식의 검침을 그들의 몸은 뛰어넘어버린다. 안승필은 인간의 몸은 25살을 기점으로 하강한다고 하지만 아줌마들의 강인한 몸은 그 상식의 잘난 척을 깨버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신체의 단단함으로 내기까지 건다. 핸드볼협회 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안승필은 차범근과 박찬호와 같은 인물인데 혜경은 미숙의 구제를 위해 안승필과 거의 비등하게 겨루는 신체의 뛰어남을 선보인다. “한국형 핸드볼 한물갔다고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는 혜경의 말은 스스로 아줌마의 몸의 뛰어남과 단련 그리고 결속력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걸 지칭하는 것처럼 들린다. 미숙, 혜경, 정란은 단지 노장이 아니라 아날로그적 신체의 위대한 전사들이다.
이 아날로그적 여전사들의 집단을 이 영화식으로 바꿔 부르면 말한 대로 ‘아줌마’다(영화 속에는 아줌마라고 힘주어 지칭하는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그들이 아줌마인 것은 영화를 보거나 그렇지 않거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가 않다. 핵심은 그들이 한 종류의 아줌마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들은 생각보다 각자 다른 아줌마다. 여기서는 혜경과 미숙이라는 주요한 두 인물뿐 아니라 반드시 정란까지 포함시켜 말해야 한다. 물론 세 사람이 특히 아이와 육아의 문제에서 공유하는 지점이 있지만 이 아줌마들은 세 가지 각자 다른 존재의 층위를 갖고 있다.
“난 또 여자감독이면 선수들이 더 잘 따를 줄 알았는데…”라는 말끝에 협회 위원장은 “왜 이혼경력이 있는 걸 말하지 않았느냐”고 혜경에게 따진다. 혜경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반문한다. 사실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 점이 혜경의 발목을 붙든다. 혜경은 결코 사회적으로 뒤처진 여성이 아니다. 엘리트임이 확실하고 모자람이 없는 중산층인 것 같다. 그녀의 사회활동을 지금 가로막는 장애란 그러므로 이혼을 빙자하여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주어지는 편견이다. 이른바 성차에 대한 차별적 문제가 혜경에게는 가장 큰 문제이며 혜경 역시 그 문제에 가장 민감하고 강하게 대응한다. “나한테는 밥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고 혜경은 말하는데, 그 말은 여성으로서의 성차적 편견의 문제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다름 아니라 혜경은 성차의 층위를 대표하는 아줌마다.
정란이 통상의 비하적 의미에서 가장 아줌마다. ‘그 아줌마 몇 미터 바깥에서 귀신같이 가방을 던져 자리를 차지했다네’ 식의 싸구려 유머집에 등장하는 폄하를 증거하고 있는 모델이다. 그런 종류의 짓은 정란이 다 주도한다. 뽀글파마를 한 외양에서부터 머리채 잡고 싸우기, 새치기하기, 보약 챙기기등의 행동은 전부 정란이 앞장서서 한다. 하지만 정란의 그 아줌마 근성은 역도부의 강짜를 이겨내고 후배들을 지키는 힘이다. 정란은 사회가 폄하한 아줌마의 행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힘없는 동료들의 자리를 지켜내는 반어적 수호신이 된다. 정란은 아줌마라는 사회적 비하에 대한 이 영화만의 반어법이다. 정란이라는 아줌마는 반문하는 사회적 표상이다.
미숙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그녀는 사리가 밝은 것 같고 마음이 깊은 것 같다. 문제가 터져도 실리적으로 질문한다. 영화 초반, 팀 해체와 함께 회사의 사원이 될 것이라는 말에 다들 분개할 때 미숙만 “직원이면 정직원이겠죠? 계약직 아니고…”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미숙 스스로 하고 있다. “나는 이기든 지든 먹고살려고 미친 듯이 뛰었다.” 미숙에게 핸드볼은 혜경처럼 자존심을 건 운동이거나 사회의 폄하에 대한 반어적 표상이 아니다. 혜경이 갖고 있거나 미숙이 갖고 있는 것들 중, 즉 사회적 지위나 조촐한 가정의 안식이 미숙에게는 유독 없다. 미숙에게 핸드볼은 밥이며 그걸 하는 건 밥을 버는 행위다. 아줌마 미숙은 이중의 구속에 갇힌 하층계급 노동자다.
그러므로 혜경, 정란, 미숙을 성차, 사회적 표상, 계급이라는 삼중의 관계로 놓을 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관해 질문을 바꿔 하는 것이 가능하다. 왜 성차(혜경)가 공을 던지고 실패해서는 안 되는가. 혹은 왜 사회적 표상(정란)이 던지고 실패하는 것으로 이끌리지 않는가. 영화는 결국 ‘계급’이 공을 던지고 실패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리하여 미숙이 돌아와 공을 던진다. 낮은 계급의 아줌마가 돌아와 마지막 공을 던지고 실패한다.
실패한 승부 던지기는 아쉬워 할 필요 없다
그런데 미숙이 승부 던지기에 실패하고 난 다음, 2004년 당시 실제 선수들의 자료 화면이 나오는 것은 확실히 기획영화로서는 안전한 선택이지만 이 인물들이 각자 세심하게 표방해온 지점을 저버린다는 점에서는 다소 허술한 선택이다. 아니, 영화는 여기서 갑자기 다른 강조점을 내세운다. 우리가 받아드는 갑작스런 질문은 이런 것이다. 당신,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그때 이걸 보고 있었습니까. 그렇게 유도함으로써 이 영화의 모태가 된 실화적 인지도에 얽매이기를 우리에게 강요한다. 이건 항상 생각보다 무척 큰 힘이고 실화를 기초로 한 대중영화들은 대개 이 힘을 발휘한다(<화려한 휴가>). 하지만 이 새로운 강조점의 등장에서 미숙의 존재는 확실히 상실되는 경향이 있다. 대중 장르 안에서 이런 효과는 곧잘 올바르고 감동적으로 끝내기 위한 상투적이며 부정적 효과의 측면으로 발휘된다. <우생순>의 라스트신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나는 집단적 감동이란 언제나 가장 최후에 염두에 두어야 할 만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부분을 더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는 기회가 있을 때 다른 자리에서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미숙의 귀환이 여전히 강력한 긍정의 여진을 남기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생순>을 나는 여성영화나 스포츠영화에 대한 관점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실은 임순례가 그것보다는 다른 관심 때문에 이 영화의 애초 기획과 결합했다고 믿는 편이다. 이 말은 이 영화가 여성에 대한 관심을 저버렸다는 뜻이거나 스포츠영화의 재미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의 모든 바탕이 되는 토대로서의 무엇을 무의식적으로 미숙의 귀환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다. 임순례는 성차의 문제나 반어적 표상이라는 문제보다 (적어도 장편에서는) 그것들을 감싸안는 계급과 계층의 정황을 더 크고 넓은 토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왜곡되지 않은 서민의식의 실현 안에서 인물들을 돌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미숙은 자기의 일터에서 낮고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 속한다. 그러므로 미숙은 다만 우리의 연민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 지친 아줌마인 것이 아니라, 승패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다. 기어코 일터를 떠나고 싶지 않아 다시 돌아온 어느 여성 노동자의 현현이다. 미숙이 코트로 돌아온 것은 그러므로 어느 노동자가 자기의 작업대 앞에 돌아온 형국이다. 노동자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몸으로 일해 먹고사는 낮은 서민이 일터로 돌아온 것이다. 때문에 이 장면이 가슴을 치게 하는 것은 그녀의 공이 상대편 골키퍼에게 막혔거나 빗맞아서 운동경기에 졌기 때문이 아니다. 운동경기의 승패란 아쉽지만 격분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여 경기에서는 패배하였으나 감정적으로는 승리하는 경험을 우리에게 안겼기 때문도 아니다. 첫 장면을 생각해야 한다. 미숙이 마지막 골을 넣었건 그렇지 않건 미숙은 마트로 가야 할 것이다. 우승을 했어도 팀은 해체되었던 그녀들의 과거가 이 영화의 라스트신 다음에 있을 일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미숙이 골대와 마주 섰을 때 다시 또 현실의 고난이 되돌아올 것이 예고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작 가슴 아파해야 한다.
절망을 왜곡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
혜경은 일본으로 돌아가 훌륭한 지도자로 승승장구하면 될 것이다. 정란에게는 지극 정성의 남편이 있으니 적어도 생활만큼은 편할 것이다. 하지만 우승이 아니라 준우승에 그쳤으므로 미숙은 연금을 타지 못했고 혜경의 돈은 갚아야 할 것이며 남편은 몸져누워 있고 빚은 산더미다. 유독 미숙에게만 돌아갈 곳이 없다. 돌아간다 해도 방법이 없다. 빚을 갚기 위해 미숙이 할 수 있는 일은 영화의 초반에 빚쟁이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마트에서 일하는 것뿐이다. 미숙은 이제 곧 마트로 돌아가서 야채를 뒤에 놓고 늠름하게 핸드볼 공을 쥐었던 두손으로 다시 서럽게 박수를 치며 어울리지 않는 호객을 벌일 것이다. 그게 그녀에게 남아 있는 살아남의 방식이며 밥을 얻는 방식이다. 하지만 대형마트는 다시 말해도 미숙이 원하는 일터가 아니다. 경기장이 그녀의 일터다. 미숙은 그걸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기의 일터에서 일하고 싶어 기필코 돌아오고야 만다. 그러므로 <우생순>은 내게 있어 미숙이라는 여성노동자의 마지막 생산에 관한 기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게 미숙이 경기장으로 복귀해야만 했던 필사적인 이유다.
<우생순>처럼 너무 착한 대중영화 혹은 기획영화를 만날 때 실은 좀 비평적 무력감에 시달린다. 여기에는 언제나 보편성과 가상성이라는 이름이 거대하게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어 진짜 영화적 감각과 사유를 뒷전으로 미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생순>도 더 많은 부분을 말하다보면 크게 예외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임순례 영화의 장점은 여전히 어떤 지점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절망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범속하였지만 한없이 서정적이었던 통속의 마지막 무대였다. 모두가 패하고 흩어지고 나서 남은 두 사람이 별다른 희망없이 다시 살아가려는 마지막 장에서 쓸쓸하게 가슴속으로 통곡했던 기억이 있다. 미숙이 골을 넣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던 그때, 촌스러운 양품점 마네킹에서 막 꺼내온 것 같은 무대복을 입고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르던 그 여자를 문득 떠올린 것 같다. 그러니 이 영화가 임순례가 임순례적인 작가적 고집을 다소 덜어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해도 그것이 <우생순>의 대중적 친밀도를 높인 것이라면 지금은 만족하고 싶다. 지금은 이 영화의 그런 성과를 굳이 해치고 싶지 않다. 다만 뻔하다 해도 미숙의 그 다음 삶이 궁금할 뿐이다. 미숙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남편은 온전히 병석에서 일어났을까. 아니, 미숙씨, 아이는 잘 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