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시대의 문을 열어젖히다
2008-02-15
글 : 김애란 (소설가)
1970년대 미국 갱스터를 통해 당시 사회를 엿보게 하는 <아메리칸 갱스터>

할렘의 낡은 아파트, 그곳의 굽이진 계단을 따라 죽 올라가다 보면 1970년대 미국사회로 통하는 하나의 문(門)과 만나게 된다. 하얗고 보얀 마약 분진들이 검은 육체 사이를 혼미하게 떠도는 하나의 숏, 한장의 풍속화와 마주치게 된다. 그 앞에는 말끔한 성장 차림의 사내가 서 있다. 흑인이면서 자본가인 동시에 갱스터이자 프로테스탄, 자선가이자 범죄자인 남자,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 자신이 만든 문을 통해 한 시대를 통과한 개인. ‘아메리칸 갱스터’는 그가 조금 전 어느 문을 통과해 거기에 다다랐고, 그것이 바깥의 어디와 연결되며 확장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영화는 하나의 문이 열리는 장면(보스 범피가 올라탄 자선 트럭의 문)에서 시작해 두개의 문이 여닫히는 장면(프랭크가 출소할 때 보이는 문)에서 끝난다. 그 사이 베트남전쟁이, 무하마드 알리의 경기가, 분자를 재배열하는 원리로 팝콘을 아름답게 부풀리는 전자레인지 출시가, 어느 보스의 죽음이 있다.

일개 운전사였던 프랭크는 두목이 사망하자 뉴욕을 주름잡는 대부호가 된다. 프랭크의 성공은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가지가 마술처럼 합해지며 시작된다. 베트남전쟁과 대형 할인마트를 접목시킨 상상력이 그것이다. 중간상인을 없애는 것. 질 좋은 물건을 싼값에 파는 것. 팝콘의 분자를 재배열하는 것만큼 단순한 착상이지만, 질서를 바꾸고 시대를 앞서갈 만큼 놀라운 생각이기도 하다. 자본은 ‘스몰스 클럽’의 경쾌한 트럼펫 소리에 맞춰 번식하고 또 번식한다. 약은 흔하고 사람들은 즐겁다. 프랭크는 그 즐거움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헤로인 공장 환경은 지저분하지만 작업 방식은 체계적이다. 통유리 사이로 내부를 훤히 비추는(마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듯) 대형 마트와 달리 프랭크의 회사는 외부와 차단돼 있다. 그러나 프랭크가 추구하는 일종의 건전한 정신- 근면, 금욕, 합리성 등의 가치는 대형 마트가 지향하는 그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에선 소니와 도시바를 팔고 다른 편에선 마약을 공급한다는 점 정도일까.

한국 조폭영화에서 깡패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양아치’와 ‘건달’로 구분하는 것과 달리, 프랭크 일족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두팔 벌린 선의의 독점가, 즉 ‘아메리칸 갱스터’가 아닌 ‘갱스터로서의 아메리카’ 구성원으로 존재한다. ‘두배의 품질에 절반의 가격이 어떻게 가능한가?’란 천진한 질문이 가능했던 시대의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추수감사절 식탁은 흥겹고 활기차다. 반면 <폭력의 역사>(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척하려 애쓴다. ‘추수’에 ‘감사’하기 위해선 두개의 얼굴과 합의된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묵인한다. 그래서 이들 부자(夫子)의 식탁은 저들 형제의 식탁보다 무겁고 암울하다. 프랭크의 할렘이 매혹적인 건 그때의 폭력이 지금보다 덜 위선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 청교도적 갱스터가 있다. 경건한 블랙, 순결한 화이트. 흑인과 헤로인의 조우는 그렇게 이뤄진다. 검정과 하양을 섞으면 청색이 만들어지듯 ‘블루 매직’이 탄생한다. ‘블루 매직’은 푸른색의 반투명 비닐봉투에 담긴(이걸 보고 이상하게 다국적기업인 베네통의 콘돔 디자인이 떠올랐다) 예쁜 마약이다. 이를 추적하는 형사 리치(러셀 크로)와 프랭크의 거래. 그리고 종전. 더 나쁜 이와 덜 나쁜 이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우리는 결국 이들을 둘러싼 사회와 경제 구조에 집중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뉴욕 경찰 부패 스캔들 15년 뒤, 두개의 문을 등지고 선 프랭크를 본다. 카메라는 신자유주의 거리 한복판에 선 프랭크를 응시한다. 평면적으로, 오랫동안. 사각의 프레임은 그가 맞이할 새 시대의 문처럼 그곳에 있다. 그리고 그에게서 천천히 멀어진다. 가로로 무한히 확장되는 문처럼, 무한히 확장되기 때문에 열 수도 없고 닫지도 못하는 문처럼 그로부터 달아난다. 프랭크는 자신이 추구한 가치가 실현되고 또 진화한 세계에 도착했으면서도, 그곳에 홀로 버려진 고아처럼 보인다. 감독은 프랭크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주지 않는다. 그의 감정을 헤아릴 단서를 건네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그의 표정이 정 궁금하다면 그와 비슷한 세계에 속한 우리가 지금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본디 마술(MAGIC)은 우울(BLUE)한 것이 아니겠느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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