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진중권의 이매진] 안개가 몰고온 공포와 광기
2008-02-15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안개를 장르영화의 모티브로 효과적으로 이용했으나 동시에 한계도 드러낸 <미스트>

평화로운 호숫가 마을 롱레이크.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날 아침, 호수 건너편 산자락에 첫눈에도 이상해 보이는 안개가 걸렸다. 창문이 깨지고, 전기가 나가고, 전화선마저 끊긴 집에서 데이비드는 생필품을 사러 아들 빌리와 함께 다운타운으로 향한다. 시내로 향하는 도로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군용차량들이 앞으로 벌어질 불길한 사태를 예고하고, 그 암시는 피를 흘리며 슈퍼마켓 안으로 뛰어들어온 사내와 함께 현실로 나타난다. “안개 속에 뭔가가 있어.”

괴수영화의 대부분은 인간의 오만이 재앙을 부른다는 아주 오래된 신학적 무의식, 즉 바벨탑의 죄의식을 깔고 있다. 이 영화도 다르지 않아 괴수들의 출현은 신적인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실수로 설명된다. 가장 흔한 방법은 괴수의 기원을 환경의 오염이나 유전자 조작의 결과로 돌리는 것이나, <미스트>에서 괴물은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잘못 불러들인 것으로 설정된다. 이는 바벨탑만큼이나 오래된 무의식, 즉 인간의 호기심이 재앙을 부른다는 판도라 상자의 모티브다.

<미스트>의 괴물들은 “다른 차원”에서 온 생명체들이다. 우리가 아는 이 세상 외에도 수많은 평행우주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는 현실이 어쩌면 유일한 현실이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능세계라 부르는 다수의 현실들이 우리의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나란히 공존할 수도 있다. 거기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플로라와 파우나가 살고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3차원의 밖에 평행현실을 내다보는 창을 내려다 거기에 사는 생물들이 들어오는 문을 내고 만 것이다.

안개의 스푸마토

사실 괴(傀)생명체들 자체는 그리 인상적인 게 못 된다. 메뚜기를 닮은 커다란 곤충, 익룡을 닮은 조그만 파충류, 높이가 족히 100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빨판 코끼리. 저예산영화라 그런지 괴물들의 CG는 들인 돈만큼 나왔다. 안개가 그 모습을 희미하게 덮어주지 않았더라면, 눈에 띄는 합성의 역력함에서 비롯되는 리얼리티의 결여가 공포 효과를 현저히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는 무섭다. 끝나기 바로 직전까지 소름끼치게 무섭다. 그 효과는 히치콕의 <새>를 연상시킬 정도다.

무서운 것은 괴수가 아니라 안개인지도 모른다. 만약 안개가 없었다면, 괴수와 인간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감이 존재했을 것이다. 괴수가 없어 안전한 공간과 괴수가 있어 위험한 공간을 눈으로 보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개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과 절대적으로 위험한 공간의 구별을 지워버린다. 이로써 괴수가 있든 없든 모든 공간은 잠재적으로 절대적 위험의 영역으로 변한다. 이는 사물들의 윤곽을 묻어버림으로써 전체적으로 극적 효과를 강화하는 바로크 회화의 기법과 비슷하다.

안개나 연기와 같은 효과로 경계를 흐리는 기법을 회화에서는 ‘스푸마토’(sfumato)라 부른다. 다빈치는 스푸마토를 “연기처럼 선과 경계가 없는 것”으로 규정했다. ‘모나리자’가 미소를 짓고 있는 건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던 것은 스푸마토로 처리된 양쪽 입 꼬리를 보는 이마다 다르게 상상했기 때문이다. <미스트>에서는 안개가 그 연기의 역할을 한다. 최대의 공포는 불확실함에서 나온다. 그것은 세계를 안개로 뒤덮어 온통 불확실성의 지대로 바꾸어놓는다. 이로써 관객은 항시적 긴장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접촉의 공포

“저것은 사신이야.” 기독교를 광신하는 여인이 안개를 가리켜 외친다. <미스트>에서 죽음은 공간적 거리를 두고 나타나는 게 아니라 안개라는 아주 구체적인 매질이 되어 온몸을 감싼다. 안개는 촉촉한 죽음의 기운이 되어 파충류를 만질 때의 느낌처럼 차가운 냉기로 스멀스멀 피부에 스며든다. 그것은 평범한 안개가 아니다. 그것은 괴수의 아우라, 즉 괴수의 분위기이자 동시에 어원 그대로 괴수가 내뿜는 차가운 숨결이다. 공포는 이 죽음의 숨결이 피부에 와닿는 데에서 비롯된다.

창고에서 처음으로 괴수와 접한 사람들은 그것의 특징을 ‘빨판’(tentacle)으로 규정한다. 그 역시 우리의 신경을 촉각적으로 건드린다. 거머리에 빨려본 사람은 그 느낌이 얼마나 징그럽고 끔찍한지 알 것이다. 몸에 닿은 빨판은 그 강력한 흡착력으로 몸에서 피부조직을 통째로 뜯어낸다. 뜯겨나간 피부조직 아래로 드러나는 붉은 살점들은 소름을 끼치게 만든다. 막대기를 갖다대자 도끼로 잘라낸 괴수의 촉수가 번개 같은 반사운동을 일으키고, 순간 관객은 말미잘의 촉수에 놀란 물고기처럼 흠칫 놀라게 된다.

거대한 거미가 내뿜는 하얀 액체도 마찬가지다. 하얀 끈 모양의 액체는 염산보다 더 강한 산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강력한 레이저광선 혹은 날카로운 수술용 메스처럼 인간의 피부를 째서 빨간 살점을 드러나게 만든다. 곤충들이 그 하얀 액체의 거미줄이 공간에서 춤을 추듯이 인간들을 향해 날아올 때, 관객의 공포는 극대화한다. 이렇게 안개와 빨판과 염산의 촉각적 효과를 통해 관객의 ‘접촉공포’를 극대화하는 것이 <미스트>가 공포를 일으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인간의 괴수성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서서히 이성을 잃고, 절망에 빠진 그들을 향해 기독교 광신도의 선동이 시작된다. 그녀는 <요한계시록>의 구절을 외치며 이 모두가 신을 모욕하고 조롱한 인간의 오만함의 결과라고 말한다. 옳든 그르든 적어도 그녀는 현상의 원인에 대한 설명과 현상의 극복을 위한 처방을 갖고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죄의식을 씻는 길은 오직 희생양의 제의뿐. 이제 프로타고니스트들은 건물 밖의 괴수만이 아니라, 건물 내부의 괴수들, 아니 인간 내면의 괴수성에도 쫓기게 된다.

슈퍼마켓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모든 문명의 바탕에 깔린 어떤 인류학적 원형을 보여준다. 그 원형은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가령 중세에는 종말의 공포에서 비롯된 마녀사냥으로, 50년대에는 공산주의에서 비롯된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그리고 9·11 테러 이후에는 선제적 전쟁의 광기로. 공포는 광기에 권력을 준다. 공포에 사로잡힌 슈퍼마켓 안에서 권력은 점차 광신도에게 집중된다. 광인 취급을 받든 여인은 이제 신의 대리인이 된다. 이제 광기는 신성으로 여겨진다.

안개는 장르의 경계도 불분명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미스트>는 차원이 다른 평행우주의 SF적 상상력에서 나온 괴수영화이기도 하고, 안개의 불확실성과 촉각효과로 접촉공포를 자극하는 호러영화이기도 하다. 거기에 죄의식과 희생양이라는 인류학적 모티브에 공포와 광기와 권력의 관계를 결합한 심리영화의 요소가 더해진다. 감독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적절히 혼합하여 하나의 스토리로 조직하는 데에 비교적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딘지 개운치 못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안개의 모티브

변호사가 끝까지 괴물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 하는 것도 억지스럽고, 창고에서 두 병사가 급작스레 자살하는 것도 동기가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광신도의 위험을 미리 경고할 때 슈퍼마켓의 점원은 직업이 인류학자나 심리학자인 듯이 느껴진다. 사람들이 광신도의 선동에 설득되어 넘어가는 대목도 스토리 전개를 위해 너무 급히 서두른다는 느낌이 든다. 괴생물체의 알을 품은 고치가 된 채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헌병은,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아 전모를 상세히 아는 고위 장성이나 된 듯하다.

영화와 달리 원작은 주인공이 차를 몰고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이렇게 주인공의 운명마저 안개 속에 묻어버리는 게 아마 ‘안개’라는 모티브에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안개가 말끔히 걷힌다. 안개라는 모티브에 일관성을 주려면 거대한 괴수의 존재 역시 끝까지 안개 속에 묻어두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볼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게 또한 장르영화의 임무. 여기서 장르의 성격과 모티브의 특성 사이에 어떤 균열이 느껴진다.

가장 황당한 것은 원작과 현저히 달라진 엔딩. 대개의 경우 프로타고니스트들은 노력의 결과로 구원에 도달한다. 이런 관행의 전형성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일까? 감독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을 도입한다. 절망에 빠진 죄로 몰락을 하고, 희망을 놓지 않은 덕에 구원을 받는 게 아니다. 마지막 프로타고니스트들의 생과 사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우연한 차이로 갈린다. 뒤늦게 울부짖는 주인공의 실존주의적(?) 상황은 새뮤얼 베케트의 부조리극을 연상시킨다. 장르영화 가지고 대체 이건 뭐 하자는 취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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