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모두 하고 있습니까> -연리목
2008-02-22
막가보자 정신의 절정

공상은 대개 자기 머릿속에서만 유효하다. 매일 타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던 청년과 여고생이었던 누구의 로맨스 또한 그러했다. 아침마다 그녀는 그가 주는 첫 선물이 꽃일지 향수일지, 그와 가정을 꾸린 신접살림 인테리어의 메인 컬러는 핑크로 할지 화이트로 할지를 꿈꿨다. 그와 나눌 첫마디의 말부터 연인의 단계로 가기 위한 시나리오도 여러 편이었다. 또 어떤 날은, 청년이 지금 그녀를 보며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당시 여고생이 가진 지식의 범위에서 가장 새빨간 섹스신을 상상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들이 무색하게 그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넘쳐나던 출근 인파 덕에 매일 몇분씩 그의 콧김을 쐰 것이 그녀에게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추억으로 남았을 뿐이다. 아, 아련하여라.

이처럼 공상은 보통 공상에서 그치게 된다. 상상이라는 것이 강의시간표처럼 정연한 순서로 되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현실성있게 느껴지던 치밀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다보면 기억 속에서 흩어져버리고 만다. 게다가 정리되지 않는 공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남이 들으면 별 재미가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오락실 두더지처럼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공상들을 놓치지 않고 잡아둘 수 있는 몇몇 예외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공들여 모은 공상들에 시간과 노력을 덧붙여 설득력있게 나열한 것. 그리고 그것을 보는 독자 혹은 관객이 현실성을 느낄 수 있도록 정교하게 재연한 것이 소설이고, 연극이고, 영화이다. 여기서 ‘설득력있게 나열하는 것’과 ‘현실성있게 재연하는 것’이라는 룰은 매우 중요하다. 이 룰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말이 안 되는 것’이 되어 미숙아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가끔은 어렵고 고상한 것이 되기도 한다).

좋아하는 영화 제목 하나 말하는데 이렇게 긴 변을 늘어놓은 이유는 이 영화가 말이 안 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1994년작 <모두 하고 있습니까>가 룰에 익숙한 내 마음을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했는지 설명하고 싶다. 첫 장면부터, 공터에서의 카섹스 남녀를 비추는 뽀얀 핀 조명에 불안해지기 시작하여 설마가 사람 잡는 현란한 판타지들이 쉴새없이 이어지다가, 결국엔 거대한 파리인간이 거대한 똥더미 위에서 거대한 파리채에 압사당하는 대목까지.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각각의 장면들은 사실은 여느 남자들이나 한번쯤 해보는 흔한 공상이다. ‘멋진 차에서 예쁜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승무원이 화끈한 기내서비스를 해주는 비행기가 있지 않을까. 누가 나한테 1억원만 줬으면. 투명인간이 돼서 여탕에 들어가보고 싶어.’ 별로 기발할 것도 황당할 것도 없어서 입 밖에 잘 내지 않는 소재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공상들이 형상화되고 너무나 쉽게, 마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처럼 이어져버리는 통에 설득력과 현실성 찾기를 포기해버리자 한참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간 것처럼 시원 통쾌했다고나 할까. ‘저렇게 막가도 되는 거야?’가 ‘저렇게 막가도 되는 거야’로 바뀌는 순간의 쾌감.

내가 음악을 하는 방식은 최근 2, 3년간 확연히 변했다. 악보를 그리거나 연주해보기 전에 머릿속에서 구체화하고 지워버리던 패턴에서 일단 손을 놀려보는 것으로의 변화다.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다. 나의 연주 스타일을 찾게 되었고, 나만의 영역이 생겨났다. 음악이 더 재미있어졌고, 웬만한 일도 일단 ‘해보면 재밌겠지’ 마인드로 뛰어드니 일도 점점 따라왔다. 전에는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안 했던 즉흥연주까지도 좋아하게 됐고, 이를 연극이나 무용, 영화음악 작업을 할 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차를 이용한 갑작스러운 진행을 매력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요즘 참 즐거운 일 중 하나다. 어느 날 갑자기 변하자고 다짐한 기억도 없는데 누가 나를 이렇게 변화시켰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중 하나, 이 영화가 있더라. <모두 하고 있습니까>를 시작으로 <지옥갑자원> <새벽의 황당한 저주>같이 만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영화들을 접하고 보니 자연스럽게 룰에 대한 강박이 점점 희미해졌다. 말하자면 ‘막가보자 정신’이 스몄다는 얘기(이 영화들이 막가보자는 식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도 좀 있어 보이는 감동 대작을 내 인생의 영화로 꼽아보고자 참 많은 날들을 고심했지만 결국 <모두 하고 있습니까>가 생각할수록 고마운 영화라는 결론이다. 추천했다가 좋은 소리 듣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면 100분 뒤에 배꼽 찾게 되는 영화라는 설명과 함께, 요즘도 꾸준히 막가보자 정신을 전파하고 있다.

연리목/ 뮤지션·밴드 눈뜨고코베인, 사운드듀오 Yohm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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