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현승] 미국 워너 사장이라도 괜찮다
2008-04-23
글 : 문석
사진 : 오계옥
차기 영진위 인선작업 들어간 이현승 영진위원장 직무대행

4월8일 영화진흥위원 후보를 추천할 임원추천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제4기 영화진흥위원회의 인선작업이 본격화됐다. 4기 영진위 구성은 영화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1999년 김대중 정부 아래서 출범한 이후 영진위는 노무현 정권까지 3개 기수를 거쳐오며 비교적 일관된 노선을 유지해왔지만, 이명박 정부의 영화정책이 아직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차기 영진위의 면면과 노선이 거꾸로 새 정부의 영화정책을 결정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현승 영진위원장 직무대행으로부터 차기 영진위의 구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3월7일 안정숙 전 위원장의 사퇴 이후 영진위원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그는 “임기가 끝나는 5월27일 이후로는 영화정책과 영화산업쪽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내 연출작에만 몰두하겠다”면서도 150분에 걸쳐 영화정책 전반과 영진위의 향후 계획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지면의 제한 때문에 이중 극히 일부분만 담게 돼 아쉽다.

-4기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를 위한 임원추천위원회가 꾸려졌다. 어떤 분들이 참여하게 되나.
=말할 수 없다.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을 자세히 보니까 그 명단을 밝히면 안 되는 것으로 나왔더라. 청탁이 들어오고 할 수 있으니까.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현 영진위원 5명과 정부, 법조계, 경제계에서 각각 1명씩, 그리고 직원 추천 몫으로 노동계에서 1명, 이렇게 모두 9명이 선출됐다. 그리고 나는 참여하지 않는다.

-이후 영진위원 선출은 어떻게 진행되나.
=예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영화계 각 단체에서 추천받은 후보자들을 위촉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번부터는 2005년 제정된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임원추천위원회에서 3배수의 후보자를 만들어 제출하면, 이중 영진위원장은 문화부 장관이 임명하고 8명의 위원들은 기획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서 승인하게 된다. 아무래도 주무 부처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다고 들었다.

-새로운 영진위는 언제쯤 구성될 것으로 보나.
=임원추천위원회가 4월16일쯤 첫 회의를 열면 그때부터 2주 동안 공모를 받게 된다. 그중 3배수를 추려서 4월 말이나 5월 초에 추천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심사가 이뤄진다고 보면 5월 하순경에나 구성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문화부에 4기 위원들을 좀 빨리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인수인계도 하고, 5월 중순에 열리는 칸영화제에서 신임위원장을 소개하려면 빨리 구성될수록 좋다.

-영진위원장 직무대행의 임기가 얼마나 남은 것인가.
=5월27일까지니까 1달 반 정도 남았다. 직무대행을 시작한 지 1달 정도 됐는데, 1년처럼 느껴질 정도로 바쁘다.

-차관급인데 위원장 자리가 좋지는 않은가.
=절대 아니다. 고등학생 때 이후 거의 30년 만에 매일 아침 정시 출근을 해야 한다. (웃음)

-위원장 직무대행의 업무는 부위원장 시절과 많이 다른가.
=위원장 일을 시작하자마자 영화인협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감독협회 등 영화계의 다양한 분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의견을 듣고 있다. 매일 점심, 저녁식사를 의견 청취의 자리로 삼고 있다.

-임기말이고 차기 위원회에 참여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리 열심히 일하나.
=그것이 현재 영진위의 문제 중 하나다. 영진위의 새로운 임기는 5월 말 시작되는데 그때는 이미 그 다음해 예산안이 만들어진 뒤다. 그러니까 차기 영진위를 위해 우리가 예산안을 만들어 문화부에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기 위원들에게는 다음 기수 위원들이 직접 예산안을 만들 수 있도록 몇달 정도 조기 사퇴하는 방안을 권유할 생각이다.

-아무래도 가장 큰 관심은 차기 영진위원장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위원장이 됐으면 좋겠나.
=지금 한국영화가 위기라고 하는데 내게 이 상황은 ‘살인의 추억’처럼 보인다. 미치도록 잡고 싶지만 범인을 잡을 수가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한국영화라는 놈이 핏방울을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쓰러져 있는지 아니면 어디서 객사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는 이렇게 사건이 벌어지면 그제야 범인을 잡기 위해 분주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예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결국 지금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고 본다.

-미래에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한국영화산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시장의 한계라는 부분이다. 인구가 1억 정도 되면 내수시장에만 의존해도 산업이 유지되겠지만, 이 정도 규모의 시장이라면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탈출구는 해외 밖에 없다. 해외 공동제작과 수출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을 위한 펀드를 구상중인데, 한국의 감독, 배우, 이야기를 할리우드로 갖고 나가 영어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는 창의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미국 등에 비해 자본이 한참 달리는 우리로서는 창의력이야말로 큰 무기가 된다. 영화의 창의력은 만화, 대중소설 같은 분야와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결국 전반적인 ‘이야기 산업’을 발전시킬 혜안이 필요하다. 또 영화의 방송, 통신과의 융합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차기 위원장은 영화계 인사보다 다른 분야 출신도 괜찮다고 본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현 단계에까지 올려놓은 김동호 집행위원장 같은 경우가 가장 이상적이다. 관료 출신이지만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어 정치적 네트워크까지 이용해 영화제를 발전시켰잖나. 그렇게 외연을 확대하고 정부와도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영화계의 위상을 끌어올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찾아내야 한다. 법에 저촉만 되지 않는다면 헤드헌터를 고용해 영화계 바깥 사람들을 알아봐서 임원추천위원회에 풍부한 인력정보를 주고 싶은 마음이다. 심지어 미국 워너브러더스의 대표이사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어떻게라도 스카웃할 생각을 품고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영진위원장이 돼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나.
=그동안 영진위는 영화계를 지원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내 생각에 앞으로는 영화계를 이끌어가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민간에서 할 수 있는 영역에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하면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인물은 곤란하다. 너무 정치적인 인사도 곤란하다.

-많은 사람들이 영진위원장에 도전하고 있다고 들었다.
=나 또한 여러 채널을 통해 굉장히 다양한 분들이 다양한 경로로 로비를 하면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던 자질을 갖췄느냐이다.

-영진위가 영화계를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 스크린쿼터 같은 사안은 민간이 리드하고 영진위가 지원했지만 지금 영진위는 돈과 조직을 갖고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제작가협회 등 민간단체는 재원도 없고, 실행력 또한 부족하다. 영진위에겐 앞에 이야기한 해외진출, 창의력 제고 등 외에도 할 일이 많다. 내가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 중 하나는 영화인 데이터베이스다. 영화산업노조가 만들어졌는데, 프로듀서들은 여전히 임금에 비해 숙련도가 떨어진다는 점을 문제삼고 있지 않나. 만약 한 영화인이 어느 영화에서 어느 정도 기간에 걸쳐 어떤 직책을 수행했으며 얼마만큼의 임금을 받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면 문제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한국의 영화인이 몇명인지에 관해 5천명에서 1만5천명까지 의견이 분분한데, 그런 기초적인 데이터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이 산업을 파악하고 개선책을 만들 수 있겠나. 그리고 데이터베이스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가 촬영을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영진위에 의무적으로 신고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영화제작 신고를 의무화한다니, 과도한 통제 아닌가.
=과거 관의 규제와는 다른 것이다. 프랑스의 영진위에 해당하는 CNC도 영화제작 신고를 의무화하고 있다. CNC는 신고한 영화에 대해 ‘프랑스영화등록증’을 준다.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심지어 에로영화도 신고를 해야 한다. 미국은 민간조합의 활동이 활발하니까 스탭들이 어떤 영화사와 계약하면 그들의 기록을 관리하는 곳으로 자동적으로 전송돼서 데이터가 보관된다. 누가 얼마를 받고 얼마 동안 일했는지가 기록에 남아 다음 작품 계약 때 근거자료로 쓸 수 있다. 내 임기가 1달하고 조금 더 남았지만, 임기 중에 강력하게 추진할 계획이다.

-한때는 감각적인 영상을 만드는 감독이었는데 어쩌다가 8년씩이나 정책, 산업분야에서 활동하게 됐나.
=2001년 중앙대 영화과 교수로 임명됐는데, 나는 그게 영화계가 내게 준 혜택이라고 봤다. 월급도 받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셈인데, 이 혜택을 영화계에 되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봉사활동 차원에서 영화인회의 사무총장을 맡게 됐다. 그때 나는 도제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마침 스탭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비둘기 둥지’를 만나게 됐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조수협회를 만들도록 도움을 줬고, 그게 조수연대로 발전하더니 영화산업노조까지 결성된 것이다. 그렇게 제작환경 개선에 관한 연구를 해왔는데 이것을 현실화하려면 조직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영진위원이 된 것이다.

-정책, 산업분야에서 8년 동안 활약했는데 개인적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얻은 것은 많은 경험을 통해 시야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프로듀서, 감독, 교수, 그리고 영화계 바깥의 인사까지 만나면서 균형감각이 많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잃은 것은, 당연히 창작이다. (웃음) 솔직히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영화를 못 만들었다기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준비 중인 시나리오가 여자가 주인공인 스릴러와 남자가 주인공인 스릴러인데, 아무래도 투자사가 여자가 주인공인 스릴러는 꺼리는 듯해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스릴러를 먼저 들어갈 공산이 크다. 임기를 마치고 나면 구체적 준비에 들어가 이르면 가을쯤 촬영에 들어가려 한다.

-오랜만에 만드는 영화니 야심도 있을 것 같다.
=젊은 관객이 알진 몰라도 나도 스타일리스트다. (웃음) 이번 영화를 통해서는 미장센을 보여주고 싶다. 예를 들면 피의 붉은색에는 슬픔 같은 게 묻어 있는데 그 옆에 싸구려 비닐구두가 놓인 이미지를 통해 인생의 느낌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스릴러영화의 구조 안에서 내 나름의 미장센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인권영화 <시선 1318>은 언제 찍었나.
=지난해 가을에 시나리오를 써서 12월, 그 바쁜 와중에 찍었다. 이번 인권영화의 주제는 청소년이었는데, 나는 여고생 미혼모라는 소재를 놓고 영화를 만들었다. 무겁게 풀면 답이 안 나올 정도로 무거운 주제가 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재밌게 풀어내고 싶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만들었는데 과거에 비해 편해진 것 같았다. 옛날에는 영화를 통해 뭔가를 마구 발언하려 했는데 그런 게 없어졌고, 원했던 앵글이 구현되지 않으면 화내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다른 앵글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 여유가 생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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