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지중현] 대평원 추격신을 가슴에 묻고
2008-07-22
글 : 문석

“허무한 죽음이란 없지. 살아남은 자들이 허무한 거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마지막 장면에서 창이(이병헌)가 내뱉는 이 대사는 지도를 쫓아 대추격전을 펼치다 부하를 잃은 보스의 허탈감을 보여주는 말일 뿐 아니라 아끼던 스탭을 잃은 김지운 감독의 공허한 내면의 울림이기도 하다. 김지운 감독을 비롯해 <놈놈놈>의 모든 스탭과 배우들에게 허무할 정도의 슬픔을 안겨준 이는 고 지중현 무술감독이다. <놈놈놈>에서 정두홍, 허명행 감독과 함께 무술감독으로 참여했고, 스턴트맨과 배우로도 활약한 그는 지난해 9월21일 촬영지로 이동하던 중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32살. 유달리 지중현 감독을 아꼈던 김지운 감독은 그의 사망 이후 창이의 대사를 만들어 애도의 뜻을 담았고, 엔딩 크레딧에도 ‘故 지중현, Bana Tehrani Ali Asghar(<놈놈놈>에 출연한 이란 배우로 지난 3월 교통사고로 사망)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자막을 집어넣기도 했다.

지중현 감독이 지상에서 보내고 간 32년은 짧고 굵었다.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스턴트맨이 되기를 꿈꿨다. 그는 1992년 드라마에서 스턴트 연기를 하다 사망한 정사용씨의 삶을 다룬 TV 다큐멘터리 <인간시대>를 본 뒤 그냥 ‘저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로선 스턴트맨이 될 수 있는 방도를 몰랐던 그는 꿈을 접은 채 1998년 음반회사 입사시험에 응모했고, 멋지게 합격했다. 출근을 얼마 앞둔 어느 날 그는 영화잡지 <스크린>에서 서울액션스쿨이 교육생 1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된다. 공교롭게도 서울액션스쿨의 응시날은 그의 음반회사 첫 출근날이기도 했지만 그의 선택은 당연히 서울액션스쿨이었다. 이후 그는 3~4년 동안 서울액션스쿨에서 막내 노릇을 하며 스턴트와 액션연기, 무술지도를 익혔고, 2002년에는 <패밀리>로 무술감독에 입봉했다. 이후 지중현 감독은 <달콤한 인생> <뚝방전설> <중천> <놈놈놈> 등을 거치며 한국영화계의 신세대 무술감독이자 액션 연기자로 발돋움해왔다.

지중현 감독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운동감각을 높이 평가한다. 까마득한 후배이자 가까운 동료로서 그를 대했던 정두홍 무술감독은 “중현이는 서울액션스쿨에 들어올 때까지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도 타고난 몸과 운동신경을 갖고 있어서 고난이도의 액션 연기를 해냈다”고 말한다. 김지운 감독은 <달콤한 인생>을 찍던 당시의 한순간을 잊지 못한다. 빨리 달리는 차에 매달리는 연기를 펼치던 도중 그는 회전력 때문에 튕겨져나가 벽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다. 모든 스탭들이 그에게도 달려갔지만, “그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는 것 같더니 금세 옷을 툴툴 털고 일어나서 ‘감독님 오케이인가요?’라고 수줍게 물어봤다”. 액션장면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놈놈놈>의 대평원 추격장면은 그의 주도로 구성됐고, 창이의 칼 액션과 도원(정우성)의 장총 액션을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감독이 만족할 때까지 수도 없이 반복해서 디테일한 동작을 만들었다”.(김지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부재를 더욱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과묵하면서 믿음직했던 그의 태도 때문이다. <무사> <중천> <놈놈놈>에서 그와 함께했던 정우성은 그가 “묵묵하면서도 수줍음이 많은 순수한 친구”였다고 회상하면서 “혼자 조용히 사막 한곳에 세워놓은 천막 그늘에 앉아 평원을 바라보며 고즈넉이 식사를 즐기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그와 10년 가까이 절친한 사이였던 허명행 무술감독은 “내가 4살이나 어린데도 서울액션스쿨 선배라는 이유로 나에게 4년 동안 존댓말을 썼다”고 소탈한 그의 성격을 설명한다. 그는 또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정두홍 감독은 “아무 말 없이 사라져서 1달 뒤에 나타나는 경우도 많았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답게 그는 “늘 외로움을 타는 듯 보였다”.(정두홍) 물론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중현 감독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두홍 감독은 “<놈놈놈> 작업에 막 들어가 액션 구상을 하는데, 중현이는 세르지오 레오네와 스파게티 웨스턴의 액션에 대해 줄줄 이야기했다. 이미 상당히 준비를 해놓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정우성 또한 “조용하고 묵묵한 친구가 액션을 선보일 때의 모습은 정말 에너지가 넘쳤고, 주변의 시선이나 환경,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는 열정, 즉 ‘순수의 열정’이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아무리 애절한 말일지라도 먼 곳을 여행 중인 외로운 영혼을 달랠 수는 없을 터. 또 그의 체온을 우리 곁으로 끌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지운 감독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읽은 뒤 허공을 본다면 당신은 어쩌면 지중현 감독의 진실한 내면을 어슴푸레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컷 사인이 나면 그는 누구보다 빨리 모니터로 뛰어왔고, 장면이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으면 인상을 찌푸리면서 안타까워 했으며, 좋은 장면을 얻었을 땐 감독보다 더 큰 환호를 질렀다. 감독보다도 이 영화를, 이 장면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시켜줬다. 영화를 진정 사랑하고 애쓰는 마음을 놓고 보자면 난 지중현의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간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의 이름을 헛되이 하지 않게 끝까지 영화를 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생각에 한쪽 가슴이 먹먹해지고 명치끝이 사그라진다. 사고가 있던 날, 혼자 동산 위로 올라가 대평원을 바라보다 내려와 ‘대평원 추격신을 상상만 해도 너무 좋다’면서 차를 타고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붕하고 떠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영영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한다.”

사진제공 바른손 영화사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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