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블란쳇이 <아임 낫 데어>에서 연기한 밥 딜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냥 기계적인 것 같습니다. 저처럼 10년 가까이 팬이었던 사람은 블란쳇이 놀라울 정도로 그럴싸하게 밥 딜런의 매너리즘을 흉내낸 것에 경탄하며 무조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겠죠. 하지만 전 그만큼 부정적인 반응도 많이 봤습니다. <아임 낫 데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블란쳇의 딜런 연기가 피상적이고 지루하며, 유머가 제거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식 패러디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요. 전 그들의 반응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정곡을 찌른 비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아임 낫 데어>에서 블란쳇의 연기는 깊이 있을 필요는 없어요. 블란쳇의 의무는 밥 딜런의 내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의 공적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성 배우인 블란쳇을 캐스팅한 것이 더 그럴싸한 겁니다. 특정 배우가 딜런을 ‘흉내낸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스크린에 공공연하게 노출되었어야 했어요.
그러나 블란쳇의 최근 커리어를 보면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과연 이 배우가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치게 흉내쟁이의 장기에 치중하는 건 아닐까? 최근 주목받은 블란쳇의 연기를 보시죠. 대부분 아주 성공적인 성대모사거나 악센트 과시입니다. 그것으로 아카데미상도 하나 받았죠. <에비에이터>의 캐서린 헵번 역 말입니다. 좋은 연기였지만 과연 제가 케이트 블란쳇이 다른 할리우드 배우를 흉내낸 것으로 첫 아카데미상을 받길 원했었는지?
그러나 여기에 대해 툴툴거리는 건 블란쳇의 개성과 장기를 무시하는 것이 될 겁니다. 블란쳇은 아주 희귀한 종류의 배우입니다. 변신에 능한 주연급 할리우드 여성 스타죠. 블란쳇처럼 다양한 변신에 능하면서도 여전히 주연배우의 아우라를 간직하고 있는 여성 스타를 아세요? 전 단 한명 압니다. 메릴 스트립이요. 몇 가지 면에서 블란쳇은 심지어 스트립보다 더 희귀합니다. 처음부터 외모에 개의치 않는 연기파 배우로 경력을 시작했고 여전히 그런 이유로 존중받고 있는 스트립과는 달리 블란쳇은 전통적인 여신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거든요. 물론 마릴린 먼로에 대한 여신 숭배와 블란쳇에 대한 여신 숭배의 성격은 많이 다르긴 합니다만.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능수능란한 성대모사의 달인과 스크린 스타로서의 위치는 충돌합니다. 여자들이 특히 더 심하지만 남자들 역시 특별히 다르지는 않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나 알렉 기네스 같은 배우들의 경력에서 스타성과 모방의 재능이 어떻게 공존했는지 한번 들여다보세요. 어느 한쪽이 뜨려면 어느 한쪽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외면과 행동의 철저한 모방으로 캐릭터 작업을 시작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태도가 오히려 불안한 것이죠. 솔직히 전 <샬롯 그레이>나 <베로니카 게린>의 완벽한 성대모사가 캐릭터의 깊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샬롯 그레이>에는 캐릭터나 드라마보다 블란쳇의 스코틀랜드 악센트와 프랑스 악센트를 저글링하듯 섞어 쓰는 재주가 더 먼저 들어와요.
오해 마시길. 전 여전히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과 <아임 낫 데어>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보여준 연기를 좋아하고 그런 변신 능력을 배우의 매력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 이 배우가 흉내에 조금 덜 신경 쓰고 자신의 모습을 좀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길 바랍니다. 성대모사에 묻히기엔 이 사람의 스타 퀄리티가 너무 아까워요. 배우란 남을 흉내내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건 후자지요.